제108화. 19장. 망한 게임을 위한 솔루션 (1)
모처럼 신비롭고 유능해 보이는 척을 시도했건만, 날아오는 대답은 가차 없었다.
“설명이 부족하다.”
누구보다 설명을 안 하는 사람이 뭐라는 거야?
나는 이의를 제기한 사람을 향해 눈을 길게 늘어뜨렸다. 노골적인 비난의 눈초리 앞에서도 단테는 오래된 고목처럼 꿋꿋하기만 했다.
오래 끌어 봐야 힘들어질 것이 뻔해서 더는 고집 피우지 않았다.
“잊혀진 향수라고 해요. 이걸 뿌리면 향이 사라질 때까지 기척을 지울 수 있어요. 이걸 쓰는 이유는….”
“시선 끌기 방지를 위해 사용하는 거군.”
설명이 부족하다고 해서 설명을 하는데 말을 잘라 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게다가 금방 알아들을 거면서 굳이….’
어이없어하는 나와 달리 단테는 무척이나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길 바라지만 그는 자신이 굉장히 보탬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듯싶었다. 유감스럽게도 짜증만 늘었지만.
“아아, 그래서….”
하지만 그다지 자세한 설명이 아니었음에도 이티엘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수긍했다.
내가 잊혀진 향수를 사용하려는 이유는 공략캐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어떤 식으로 신을 쓰러뜨릴지는 공략캐들의 정신을 차리게 하기 전에 어느 정도 생각해 두었다.
이제 남은 것은 현실에 돌아가 그대로 실행하는 것뿐인데 문제는 공략캐들이었다.
현실에 돌아갈 때 그들이 함께라면 신이 그들을 인질로 삼을 수도 있었다. 신의 손짓 하나에 맥없이 사라졌던 것을 떠올리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만약 공략캐들이 잡히게 된다면 생각한 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니 잊혀진 향수로 그들의 기척을 감추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웨니르 영애. 기척을 감춘다 해서 모습까지 감출 수 있는 건 아닙니다만….”
“맞아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죠. 그래서 한 가지 더 준비했어요.”
나는 아이템 창고에서 한 가지를 더 꺼냈다.
공략캐들은 허공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아이템에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기에 일단은 설명을 우선 했다.
“그림자 망토라고 해요. 이걸 쓰면 모습과 발걸음을 감출 수 있어요.”
“이…, 망토가 말입니까?”
굉장히 믿기 어렵다는 듯한 린든의 반응이 돌아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름과 달리 그림자 망토는 무지개색으로 그라데이션이 되어 있어 매우 휘황찬란했기 때문이었다.
린든의 반응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보기에도 부담스러운 데다 효과가 있을지 모를 망토를 입어야 하니 거부감이 들 수밖에.
‘이런 건 말보다 행동이지.’
그래서 나는 망토를 몸에 둘렀다.
집에서 몰래 빠져나갈 일이 있을지도 몰라 사 두고 한 번도 쓰지 못한 것을 이렇게 사용할 줄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당황하던 시선들이 곧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이건…!”
“그웨니르 영애, 그대 목이….”
나는 내 모습을 이리저리 보았다. 망토를 두른 몸 밑으로 몸이 아닌 주위 풍경이 보였다.
흡사 VR게임을 할 때나 볼 법한 일인지라 생소하면서도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망토를 머리 위까지 푹 둘러썼다.
아까보다 한층 더 눈이 휘둥그레진 린든과 이티엘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주위를 살피는 모양새가 혹시 근처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흐뭇하게 망토를 벗으며 대꾸했다.
“보기에 좀 그래서 그렇지 효과는 확실하네요.”
“당연하다, 레이프 님께서 만드신 거니까.”
생각지도 못한 대답의 주인공은 단테였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효과는 확실한데 이렇게 구린 망토를 만들 줄이야.
심지어 새벽의 망토를 본 후였기 때문에 의문은 더욱이 하늘로 치솟았다.
“세이딘,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지만 잠시 해명할 기회를 주겠어?”
해명이고 자시고, 이렇게 만들어 놓고 무슨 해명이람?
나는 어이없어하면서도 일단 들어나 보자 라는 심정으로 레이프에게 턱짓했다.
그는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관객들을 골탕 먹이기 위해 만든 거야.”
“…뭐?”
다람쥐처럼 놀란 나와 시선이 마주친 레이프는 픽 웃으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음악가로 활동하던 시절,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연주자들이 전부 사라지는 퍼포먼스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마법을 쓰면 너무 티가 나니 망토를 만들어 타이밍에 맞추어 연주자들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나 어쨌다나.
“와, 그것참….”
이렇게까지 듣는 보람이 없는 이야기라니!
“칭찬 고마워, 세이딘.”
“칭찬 아니야. 감탄도 아니고.”
칼같이 대꾸한 나는 공략캐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도 황당한 건 마찬가지인지 그렇게 썩 표정이 좋지는 않았다.
“이거라면 기척과 모습을 둘 다 감출 수 있으니 신에게 들킬 위험은 없겠군. 신경 써 줘서 고맙네, 그웨니르 영애.”
이티엘은 나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렸다.
새삼 제 뜻대로 하려던 첫 만남이 무색하리만치 달라진 모습이 생생하게 와닿았다.
괜히 머쓱해진 나는 조금 빠른 어조로 대꾸했다.
“뭐, 이런 거 갖고요. 그리고 그냥 숨죽이고 가만히 있으라고 주는 거 아니에요.”
“또 다른 계획이 있으신 거로군요.”
누가 상단주 아니랄까 봐 눈치가 빠르다 못해 번뜩였다.
린든은 싱그러운 미소로 무슨 계획인지 말하라는 압박을 보냈다.
‘저런 성격이었나?’
다정다감했던 모습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것도 잠시, 안 그래도 말할 예정이었던 나는 씨익 웃었다.
“본론은 여기서부터예요.”
나는 품에서 종이 쪼가리 두 장을 꺼냈다. 티켓을 연상시키는 그것은 ‘페널티 무효권’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나는 이티엘의 이벤트에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까 전 느닷없이 생긴 것이었다. 아마도 시스템이 실수를 했거나 무언가의 보상으로 준 듯싶었다.
의아하긴 했지만 지금은 찬물 더운물을 가릴 때가 아니었던지라 그저 고맙게 받았다.
“그게 뭐지, 세이딘?”
단테의 물음에 나는 더욱 미소를 드러냈다.
“이건 앞으로 여러분들의 목숨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방면으로 도움이 될 만능 티켓이에요.”
* * *
“어머나, 세상에!”
흐릿한 시야와 함께 멀리서 어린 여자아이의 외침이 들려왔다.
깜찍한 반응과 달리, 따라붙는 시선은 어찌나 서늘하던지 몽롱한 정신이 금세 맑아졌다.
“여긴….”
아직 조금 무거운 눈꺼풀을 깜박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하늘인 것을 보아 무사히 현재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세이딘!”
겨우 상체를 일으키자, 아티야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그런 그녀와 나를 부리부리한 눈으로 번갈아 보는 신은 금방이라도 터질 활화산처럼 보였다.
‘으아, 어떡하지? 아까보다 더 긴장되네.’
꿈에서 빠져나오기 전, 몇 차례고 신 앞에 설 각오와 다짐을 다지고 나왔지만, 코앞에 닥친 현실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온갖 음습한 감정들을 끌어올렸다.
‘만약 잘 안 되면….’
속절없이 흘러온 걱정에 휩쓸리려던 나는 퍼뜩 놀라 고개를 저었다.
시스템은 내가 가지고 있는 아이템으로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다고 했다.
여차할 상황을 대비해 가지고 있는 아이템 효과를 하나도 빠짐없이 외웠고, 혹시 몰라 그동안 모아 둔 H로 상점을 탈탈 털다시피 했다.
‘만반의 대비를 갖췄으니 남은 건 타이밍을 잘 노려서….’
스스로를 도닥이며 안정을 되찾아 가던 중이었다.
“억!”
달려온 아티야가 그대로 내게 돌진해 안겼다.
하나부터 열까지 갑작스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가운데, 아티야는 나를 이리저리 살피며 혼을 쏙 빼놓았다.
“세이딘, 어디 다친 곳은 없어요?! 아픈 곳은요? 제가 누군지 기억해요?!”
“아, 아티야? 전 괜찮거든요. 그러니….”
아티야와 시선을 맞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푸른 눈동자 가득 눈물을 머금은 그녀는 입을 벙긋거리다 고개를 떨구었다.
“미안해요…! 미안해…!”
“어, 저기….”
숨을 죽이며 우는 아티야를 보니 그저 난감할 따름이었다.
내 상황을 알고 걱정한 건 알겠는데 이제 막 정신 차린 사람한테 숨 돌릴 틈은 줘야 할 거 아냐.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티야가 정신을 쏙 빼 준 덕분에 줄곧 주위를 맴돌던 불안과 긴장이 사라졌다.
“참 이상하네.”
햇살처럼 밝은 앳된 중얼거림이었다.
이 소동을 지켜보던 신은 나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방긋 웃었다. 그리고 느긋한 걸음을 한 발 내딛더니 금세 지척에 섰다.
나와 아티야를 바라보던 신이 입을 열었다.
“한낱 인간이 빠져나올 수 있을 만한 게 아니었는데 말이야.”
“아, 딱 봐도 그래 보이죠?”
나는 일부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태평하게 실실 웃었다.
너스레 떠는 내 대답에 신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투명한 황금빛 눈동자는 매우 날카로워서 눈으로 사람을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 그래도 다행이다.’
나는 쫄깃해진 심장을 달래며 속으로 안도했다. 아까는 난감해서 어쩔 줄 몰랐지만, 이 순간만큼은 나를 끌어안은 아티야가 너무도 고맙기 짝이 없었다.
어찌 됐건 그녀 덕분에 신이 섣불리 나를 어떻게 하려 들지 못하니 말이다.
“…고작 대마법사의 환심을 샀다고 분수도 모르고 설치는구나.”
미간을 찌푸렸던 신은 한참 후에 내 말에 대꾸했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불쾌감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모습을 보며 나는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너무도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반응을 보니 오히려 머릿속이 차분해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어쩌지?”
한편 그런 내 속을 모르는 신은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말없이 미소를 짓던 그녀는 시간을 아로새기듯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레이프는 아직 깨어나지 못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