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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107)화 (107/122)

제107화. 18장 소원이 꿈이 된 경위에 대하여 (7)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한 물음이었다.

그런데 레이프는 눈을 휘둥그레 뜨는가 싶더니 곧 단정하게 눈가를 접었다.

“제법인걸, 세이딘? 그런 것까지 알아챌 줄이야.”

와아, 정말 쓸데없는 데서 빛나는 촉 같으니라고.

전신을 휩쓸었던 긴장이 단번에 빠져나가자 허탈한 웃음만 흘러나왔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그걸 말이라고 하니?

나는 레이프를 살짝 흘겨보며 대꾸했다.

“너무 티가 나잖아. 어떤 주목도 받지 않는 꿈에서 공략… 아니, 엮인 놈들이 뜬금없이 나타나 말을 거는데.”

“그것만으로 알기엔 너무 단서가 적지 않아?”

“결정적인 건 네가 나타나면서였어.”

“나?”

레이프가 눈을 반짝였다.

노골적으로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가 바라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응, 네가 날 데려가려고 할 때 황제가 막아섰잖아. 원래라면 그는 내게 아무 관심도 없어야 해.”

“하지만 황제는 그렇지 않았지.”

정확히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이티엘뿐만 아니었다. 린든도, 단테도 오늘 처음 봤을 뿐인 백작가 영애에게 흥미를 보였다.

이것들을 종합해서 내가 내린 결론은 공략캐들은 내 꿈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후로 레이프는 어쩌다 공략캐들이 내 꿈속에 섞여 들게 되었는지 짧게 설명했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둔다던 신의 말은 전부 거짓말이었고, 그들을 나와 함께 다른 세계로 옮기려 했다고 한다.

“그들이 다른 세계로 가든 상관할 바는 아니었지만 너를 다른 세계로 보내는 건 다른 문제였어. 그리고 이것만큼은 궁금했어. 그 작자는 나와 아티야만 남겨 두려 했거든.”

“그야….”

너희가 게임 속 주인공이라 그런 게 아닐까?

그렇지만 이를 말해 버리면 여러 가지로 복잡해지기 때문에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야.’

레이프의 설명을 아무리 곱씹어 봐도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아무리 아티야와 레이프가 주인공이라고 해도 다른 공략캐들 또한 <바이올린과 꽃미남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을 나와 함께 다른 세계로 보내려 했다는 것이 다소 의문이었다.

잡힐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생각과 밀당을 하던 나는 결국 내려 두었다. 신의 목적을 알면 훨씬 수월하게 반격할 수 있겠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아까웠다.

“레이프, 데려가자.”

“데려가자니…. 황제랑 그자들을?”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프의 반듯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내키지 않는 기색이 역력한 그는 불만을 드러냈다.

“오붓하게 둘이 돌아가는 건 줄 알았는데.”

“눈 뜨자마자 신이랑 거하게 한판 떠야 하는 마당에 오붓 좋아하네. 그리고 이곳에 계속 있으면 저 사람들이 죽을 수 있다고 말한 건 너야.”

레이프의 이마에 새겨진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말하지 말걸.”

“뭐라는 거야. 헛소리 말고 얼른 움직여. 싫으면 나 혼자 알아서 할 테니 황성으로 보내 줘.”

레이프는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그 속이 훤히 보였다.

레이프는 데스티니와의 빠른 손절을 통일만큼이나 바라던 내가 운명의 붉은 실을 사용해 가며 저를 살렸던 것을 떠올렸다. 거기에 상황에 따라선 내가 그들에게도 똑같이 할 거라는 것 또한 예상한 거고.

그리고 레이프의 추측은 정확했다.

그가 아니어도 내가 아는 사람이 내 앞에서 죽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가뜩이나 살날이 창창한데 수십 년을 그 일로 괴로워하며 잠을 설치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한참 나와 눈싸움을 벌이던 레이프는 마침내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 다 같이 가도록 해.”

“그럼 얼른 움직이….”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답지 않게 진중한 목소리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웃음기가 사라진 레이프를 대하는 것은 무척이나 껄끄러웠다.

저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날아드는 질문들은 하나같이 대답하기 껄끄러웠고 회피하기도 버거웠다.

그중에서도 제일 힘든 건 멋대로 술렁거리는 심장이었다. 평소에는 존재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고요한 그것은 이럴 때마다 어김없이 존재감을 드러내며 멋대로 굴었다.

그렇다 해서 말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어찌 됐건 도와주겠다는 사람이니까.

이성과 감정 사이를 오가던 저울은 결국 전자의 손을 들었다.

“저 중에 마음에 품은 사람이 있어?”

역시나 한 치의 예상도 벗어나지 않은 물음이었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것만큼은 조금도 대답하는 데 껄끄럽지 않다는 점이었다.

나는 사심이라곤 일절 없는 진실한 표정과 담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친 소리 하지 마.”

공기가 가라앉은 것도 잠시, 바람 빠진 풍선 같은 소리가 적막을 단숨에 허물어 버렸다.

그런 가운데 마주친 시선을 기점으로 레이프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하!!!”

‘결국 미쳐 버렸구나.’

레이프의 그칠 줄 모르는 박장대소에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애잔한 표정으로 웃음이 그치기까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네가 좋은 거야.”

한참을 웃은 레이프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름답고 단정한 얼굴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텔레포트를 할 거라고 말하면 될 것을 왜 저런 식으로 말하는지.

문제는 쓸데없이 자연스러운 탓에 하마터면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는 것이었다.

‘제정신이 아냐.’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레이프의 손을 잡았다.

외면하려 할수록 고막을 울리는 소리가 그 깊이를 더해 갔다.

*  *  *

“미안하네, 그웨니르 영애.”

나를 향해 숙인 남색 머리가 목을 옥죄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러나오는데 옆에서 들려오는 옷깃이 스치는 소리들이 더욱 불편함을 가중시켰다.

“죄송합니다.”

“미안하다.”

이티엘을 시작으로 사과가 연달아 이어지자, 나는 한숨을 터뜨렸다.

이래서 첫 시작을 누가 어떻게 끊느냐가 중요한 건데.

“고개 드세요, 폐하.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요.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예요.”

“그렇다 해도 다른 사람도 아닌 그대를 잊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저 또한 폐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후원하던 분을 잊어버린 후원자라니요.”

“변명할 생각은 없다. 내 방심으로 인해 너와 레이프 님을 위험에 처하게 한 건 사실이니까.”

“아니, 좀….”

나는 그저 난감할 따름이었다.

공략캐들을 구하기로 결심하고 황성에 돌아간 것까지는 좋았다. 원래의 계획은 레이프의 마법으로 그들의 기억을 되돌려 놓는 것이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공략캐들은 나에 대한 기억을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본능적으로 집착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레이프와 내가 다시 나타났을 땐 나를 지켜야 한다며 눈이 뒤집혀 달려들었다.

어지간해서는 얌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레이프는 공략캐들을 전부 힘으로 제압해 버렸다. 봉인 해제가 이룬 쾌거였다.

공략캐들은 그 과정에서 받은 충격으로 정신을 차렸고, 그 결과가 저거다.

“사과는 충분히 받았어요. 그러니 제발 고개를 드세요.”

“하지만….”

“계속 그러신다면 저도 생각이 있어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나머지 강하게 대응하자 세 남자의 어깨가 연달아 움찔거렸다. 도미노를 연상시키는 모습에 괜히 웃음이 나려 했지만 참아야 했다.

모처럼 긍정적인 분위기가 조성됐는데 내 손으로 망칠 수는 없었다.

공략캐들은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쭈뼛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휴, 이제야 대화 좀 할 수 있겠네.’

내 뒤에 선 레이프의 시선이 따가웠다. 그는 아까부터 불만을 일절 숨길 생각 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너도 그만해, 레이프.”

“하지만 세이딘, 저들은 널 공격하려 했어.”

“공격을 피하다 보니 불가피하게 그렇게 된 것뿐이야.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니까 이쯤 해 둬.”

레이프는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아 보였다.

‘사방에 널린 게 애구나.’

나는 어린이집 교사가 된 기분을 물씬 맛보며 레이프를 달랬다. 그저 조금 기운을 추켜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네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공격에 노출되지 않게 어련히 잘 지켜 줄 거면서.”

별안간 레이프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나는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싶다가 문득 그가 내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 좋아하는 거랑 매번 손이 가는 건 별개이긴 하지.

“싫으면 말해 줘. 딱히 지켜 주지 않아도 가지고 있는 아이템이면 얼마든지….”

“싫지 않아.”

빛보다도 빠른 대답이 해명을 끊어 먹었다.

달처럼 휘어진 눈동자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확실한 시선을 보냈다.

“나는 언제 어디서든 널 지키고 싶어. 그러니 내 역할을 뺏지 마.”

하, 거참. 그냥 간단하게 대답해도 되는데 왜 저렇게 적극적으로 어필을 하는 거야?

의도가 빤히 보이는 행동에 절로 기가 찼지만 뭐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 있을 중대사를 두고 기운을 빼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자, 주목!”

서로를 견제하며 신경전을 벌이던 시선들이 전부 내게 모였다.

예전이면 불편해 어쩔 줄 몰랐을 상황이지만, 최근 들어 겪은 일들이 하나같이 강렬해서인지 부담은 전혀 없었다.

“여기 나가는 대로 곧바로 신과 대치할 거예요. 그 전에 여러분들은 할 일이 있어요.”

공략캐들의 얼굴에 의문이 드러났다. 이에 대해 들은 바가 없는 건 레이프도 마찬가지였던지라 그 또한 눈을 깜박이며 궁금증을 보였다.

나는 아이템 창고에서 아이템을 꺼냈다. 줄곧 어떻게 하면 신을 쓰러뜨릴 수 있을까 고심하던 중 떠오른 것이었다.

“그건….”

아무래도 레이프는 이게 무엇인지 아는 모양이었다.

나는 입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말했다.

“이걸 몸에 뿌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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