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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106)화 (106/122)

제106화. 18장. 소원이 꿈이 된 경위에 대하여 (6)

툭!

허무한 소리와 함께 레이프와 나를 잇던 붉은 실이 끊어졌다.

“세이딘, 대체….”

아무리 매사에 의연한 그여도 이번만큼은 당황한 모양이었다.

사실 나도 놀랐다.

아이템 이름과 설명이 그렇다 해서 정말 이렇게 단번에 잘릴 줄은 몰랐으니까.

나는 미간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붉은 실이 가짜였나?”

“그럴 리가, 빛이 났잖아. 죽어 가던 나를 너와 이어 줬고.”

“그건 그래.”

빠른 납득과 함께 그제야 무엇이든 자를 수 있는 단검이 운명의 붉은 실을 끊어 냈다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기쁨과 감탄, 그리고 경악이 이리저리 뒤섞이는 것과 동시에 등 뒤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세상에, 완전 치트키 아냐…!?’

난 이렇게 좋은 걸 지금까지 쓰지 않고 뭘 한 거지?

번뜩인 깨달음은 단검을 사용하면 좋았을 수많은 과거들을 떠오르게 했다.

지금보다 훨씬 나았을지도 모르는 상황들이라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따랐지만, 그렇다 해서 지난 일을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부터라도 잘 쓰면 되지, 뭐.’

이제라도 용도를 확실하게 알았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레이프와 이대로 평생 함께했을지도 몰랐다.

‘신을 쓰러뜨리면 얻는 보상으로 해결할 수도 있었으니 딱히 그런 건 아닌가?’

뭐, 어찌 됐건 나한테 좋은 쪽으로만 작용했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후회를 훌훌 떨치고 사고의 주제를 돌렸다. 무엇이든 자를 수 있는 단검을 쓸 일은 아직도 산더미처럼 널려 있었다.

그러니 그 전에 고려해야 할 것은 단검의 사용 범위였다.

‘무엇이든’이라고는 했지만, 운명의 붉은 실을 자른 것만 보고 판단하기엔 아직 섣부른 감이 없잖아 있었다.

“한 번 더 실험해 보려는 거지?”

하여간 눈치는 빨라요.

내 의향이라도 읽은 듯한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모르잖아?”

“그래, 세이딘은 신중하니까.”

레이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욕인지 칭찬인지 알 수 없는 말에 눈을 찌푸리는 것도 잠시, 나는 실험할 거리를 떠올렸다.

기왕이면 단단하고 견고한 것이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여러 가지를 떠올려 보던 중, 시도해 보고 싶은 대상이 머리를 스쳤다.

‘가능…하지 않을까?’

‘무엇이든’ 자를 수 있다면 비단 물리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을 터였다.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을까 싶어 아이템 설명을 확인해 보니 자르고 싶은 대상을 정해 둔다면 주변에 영향 없이 그것만 벨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나는 머리가 맑게 개는 것을 느끼며 곧장 레이프를 바라보았다.

의아한 빛으로 물든 호박색 눈동자가 단검과 나를 번갈아 가며 보더니 얼굴을 굳혔다.

“아니지, 세이딘?”

“응? 뭐가?”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 말이야.”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알아?”

그림자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대화의 연속에 레이프는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

항복하듯 두 손을 든 레이프가 말했다. 그는 어쩐지 피로해 보이면서도 상쾌해 보였다.

나는 단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애초에 말하지 않아도 그러려고 했거든?

그러나 다짐과 별개로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팔에서 시작된 작은 떨림은 물에 떨어진 잉크처럼 곧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으으, 우선 진정하자.’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목표는 레이프의 봉인을 끊어 내는 것이지 레이프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었다.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되뇌자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각오가 다져졌다.

“준비됐지?”

“난 언제든 괜찮아.”

레이프는 상큼하게 대답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보란 듯이 내게 두 팔을 벌렸다.

그 덕에 단단히 굳어 있던 입가가 느슨해지며 웃음이 흘러나왔다.

유쾌해서가 아니었다. 어이가 없어서였지.

그나마 다행은 아까보다는 훨씬 마음이 가벼워졌다는 점이었다.

나는 레이프를 향해 성큼 걸어갔다. 단숨에 좁혀 온 거리가 생소했는지 주춤거리는 기색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걱정 마, 찌르지는 않을 거니까.”

“베기는 할 거란 말이네?”

“당연한 거 아냐?”

물론 베는 시늉만 할 거지만.

뒷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레이프의 손을 잡았다. 예고 없는 스킨십에 놀랐는지 레이프의 움찔거림과 뚫어지라 보는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레이프가 눈치챘을지 모르겠지만 거리를 좁히고 손을 잡은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거리를 좁힌 것은 무엇이든 자를 수 있는 단검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를 가늠할 수 없어서였고, 손을 잡은 것은 손목에 쇠사슬로 봉인이 되어 있다 가정하고 베기 위한 일종의 이미지 트레이닝이었다.

다소 1차원적이고 중2병스러운 감이 있었지만 별수 없었다. 설명이 부족하니 몸으로 부딪쳐서 알아내는 수밖에.

“한다?”

레이프는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칼에 베일 예정인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태도였다.

‘내가 자를 건 손목이 아니라 봉인이다. 손목이 아니라 봉인이야. 손목이 아니라 봉인….’

무조건 한 번에 끝내야 한다는 다짐과 함께 나는 자기세뇌에 맞춰 단검을 휘둘렀다.

‘으아아! 해, 했다! 했어!’

마침내 저지른 일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서둘러 레이프의 팔을 확인했다. 무언가를 벤 듯한 감각이 적나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걱정이 무색하게 레이프의 손목은 멀쩡했다. 흐르는 피도, 날붙이가 지나간 흔적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괜찮아, 레이프?”

걱정 어린 물음에 레이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안도와 함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치? 안 아프지?”

“아프다는 의미였는데.”

나는 돌아오는 레이프의 대답에 펄쩍 뛰었다.

“뭐!? 어디가?!”

아이고! 뭐든지 벨 수 있다고 하더니 아니었나 봐!!

서둘러 레이프의 팔을 잡고 꼼꼼히 살폈다. 칼에 베인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검상은커녕 빨갛게 일어난 자국조차 없었다.

어떻게 해야 팔의 통증이 나아질지를 고민하며 아이템 창고를 뒤지고 있었다.

“푸흡!”

제법 오랫동안 참은 듯한 웃음소리가 레이프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소리를 따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얼굴을 찌푸렸다.

“설마… 거짓말이야?”

“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기에, 어쩌다 보니…. 크흡!”

레이프의 얼굴에 가득했던 웃음기는 내가 단검을 번쩍 들기가 무섭게 자취를 감췄다.

만에 하나라도 잘못됐을까 걱정하는 사람한테 장난치고 싶나? 그리고 이게 남의 일이야? 자기 일이면서?

씩씩거리며 바라보자 레이프는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화제를 돌렸다.

“화내지 마, 세이딘. 그보다도 결과가 어떤지 궁금하지 않아?”

그야 당연히 궁금했다.

감각이 생생했는데도 손목이 전혀 베이지 않은 것을 보면 어찌 됐건 무언가를 베긴 했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순순히 넘어가기엔 어쩐지 억울했다.

“…됐어, 다시 실험할 거니까.”

“눈앞에 완벽한 실험 결과가 있는데도?”

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십중팔구 성공한 것이 분명했다.

짙은 미소를 머금은 레이프의 입에서 예상하던 대답이 흘러나왔다.

“결과만 말하자면 봉인은 풀렸어.”

“그걸 어떻게 믿어?”

“그러게, 어떻게 하면 믿으려나?”

“레이프, 장난할 기분 아냐.”

밀려오는 짜증을 꾸역꾸역 억누른 대꾸에 레이프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주위를 둘러싼 나무들이 유연하게 휘어지며 보이지 않던 풍경이 드러났다. 탁 트인 경치 끝에는 황성이 보였다.

‘꼭 무슨 애니메이션 오프닝을 보는 것 같네.’

동화가 걸어 나온 듯한 광경에 절로 감탄을 터뜨리는데 귓가에 부드러운 물음이 녹아들었다.

“이거면 증명이 됐을까?”

레이프는 어느새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로 서 있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본 채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퍼뜩 방금 전 하던 대화들을 떠올렸다.

아, 맞다. 봉인이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

“잊고 있었구나?”

“응, 완전히.”

“…이상하게 솔직하네?”

레이프가 너무 노골적으로 뼈를 때리는 바람에 욱하는 마음이 솟았지만 꾹 참았다.

틀린 말도 아닌 데다가 잠깐 사이에 앞서 한 대화를 까먹었다는 것이 찔렸으니까.

“잘못한 건 빨리 인정하고 털어 버리는 게 좋잖아? 그뿐이야.”

“흐응….”

나는 실처럼 가느다란 눈동자가 집요하게 쫓는 것을 무시하고 화제를 돌렸다.

“봉인이 풀린 건 확실하지?”

“내 아가씨는 의심이 많다니까. 얼마나 대단한 걸 시키려고 이렇게 물어보실까?”

하여튼 눈치 빠른 놈 같으니라고.

다른 때 같으면 재수 없게 느끼겠지만 이 순간만큼은 저 눈치가 감사할 따름이었다.

운명의 붉은 실. 레이프의 봉인.

이 두 가지를 통해 무엇이든 자르는 단검의 효과는 확실하게 증명됐다.

막연하기만 했던 상황이 조금씩 변해 가는 것을 보니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아이템을 잘 살피라는 시스템의 충고가 사실이라면 신을 쓰러뜨리는 것 또한 충분히 가능할 터였다.

어떤 식으로 아이템을 조합해서 사용해야 맞설 만한지 고민해 나가던 중, 아까부터 줄곧 마음에 걸리던 부분이 있었다.

이곳이 내 바람으로 이루어진 꿈이라면 ‘그것들’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닐까?

“그 전에 궁금한 게 있어.”

“뭔데?”

한없이 다정한 물음과 시선에 어쩐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술렁거리는 마음을 휘휘 흩어 버리며 느릿하게 입을 움직였다.

“이 꿈에 우리 둘 이외의 사람들도 들어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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