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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105)화 (105/122)

제105화. 18장. 소원이 꿈이 된 경위에 대하여 (5)

“한계에 다다랐다니, 그게 무슨 말….”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순간에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서 레이프의 몸을 좀먹듯 갉아먹었다.

자신의 몸이 사라져 가는 상황에서도 레이프는 무척이나 의연했다.

“널 되찾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조금 더 시간이 있다면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레이프는 아직 남아 있는 오른팔로 허공을 휘저었다. 그러자 사람 머리만 한 크기의 하얀 빛 덩어리가 나타났다.

밤이 무색하리만치 눈부신 빛을 가리키며 레이프가 말했다.

“여기에 손을 대면 현실로 돌아갈 수 있어.”

“너는?”

불안한 내 물음에 레이프는 말없이 웃었다.

너도 알고 있지 않냐는 표정이었다.

충격과 혼란, 그리고 알 수 없는 감정이 뒤섞여 온몸이 떨렸다.

“현실…에 돌아가면 볼 수 있는 거지?”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물음을 던졌지만 레이프의 대답은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미안, 세이딘. 지금이 마지막이야.”

“….”

“그런 표정 짓지 마. 줄곧 나와 연이 끊기기를 바랐었잖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야!”

격양된 감정으로 터져 나온 외침과 함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데스티니를 만지지 않았던 때를 바랐다. 레이프를 비롯한 다른 공략캐들과 엮이지 않았던 시절이 그리웠고, 조용한 일상과 욜로를 바랐다.

하지만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이뤄지길 바란 적은 없었다.

나는 뜨거워진 눈가를 짜증스럽게 비비고는 레이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몸은 이제 상체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세이딘, 서둘러야 해! 지금 가지 않으면….”

“조용히 해, 레이프. 지금 생각 중이니까.”

단호한 내 말에 레이프가 주춤거렸다.

나를 보는 시선이 어쩐지 묘한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떻게 하면 레이프를 살릴 수 있는지 고민을 하는 데 집중하다 보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내게 이 상황을 해결할 만한 힘과 능력은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껏 열심히 굴러 얻은 이벤트 보상과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이것저것 쟁여 둔 아이템은 있었다.

결단을 내리자마자 바로 아이템 창고를 열었다. 그동안 모아 둔 아이템들이 10페이지가 넘어갈 정도로 많았다.

상황이 상황이라 그런지 아이템을 훑는 속도가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점점 확인할 아이템이 줄어들면서 초조함과 불안이 점차적으로 덩치를 불려 나가고 있을 때였다.

“어…?”

한 아이템의 설명을 읽은 나는 서서히 눈이 커졌다.

[운명의 붉은 실]

이 실을 묶으면 상대와 운명으로 엮인다.

단단하게 얽힌 운명은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다.

공략캐들과 어떤 식으로든 엮여 온 경험이 있다 보니 온몸으로 거부감이 드는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설명의 마지막은 지금까지 본 아이템 중 현 상황을 타파할 유일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저울이 좌우로 부산하게 휘청거렸다.

신이 날 꿈으로 보낸 시점에서 평탄한 일상은 물 건너갔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 상황에서 레이프와 엮이는 것은 이후에도….

생각을 이어 가던 나는 스스로에 대한 분노를 금치 못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가는데 지금 그게 문제야?!’

이제 레이프는 어깨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이 이상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확고한 결심을 내린 나는 운명의 붉은 실을 꺼냈다.

“제발 세이딘! 나는 괜찮으니까 얼른 너라도…. 어?”

내게 끊임없이 애원하던 레이프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느닷없이 다가온 내가 자신의 목에 붉은 실을 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휴, 내가 어쩌다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네.”

답답하지 않도록 여분을 둔 뒤, 단단하게 매듭을 엮고 나서 실 끝을 검지손가락에 맸다.

매듭이 완성되는 것과 동시에 붉은 실에 은은한 빛이 어렸다. 줄을 따라 서서히 퍼진 빛은 마침내 레이프의 목까지 닿더니 폭발하듯 부풀어 올랐다.

찬연한 빛이 찰나에 어둠이 내려앉은 밤을 녹여 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금이라도 빨리 시력을 되찾기 위해 부지런히 눈을 깜박였다.

하얗고 새카맣기를 반복하던 시야는 마침내 주위를 비췄다.

“레이프?”

잔상처럼 뿌연 인영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몸의 윤곽이 보이는 것을 보아 레이프의 몸은 돌아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돌아온 몸보다도 레이프의 명확한 생사 여부였다.

“레이프, 살아 있으면 대답해.”

이놈의 눈은 언제쯤 괜찮아질는지.

답답한 마음이 앞서 던진 물음에 돌아온 것은 대답 대신 짙고 깊은 한숨이었다.

“으아아, 다행이다…….”

혹시라도 예상이 빗나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나는 밀려오는 안도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다리가 풀려 버렸다.

자리에 주저앉을 뻔한 나를 잡은 것은 레이프였다.

완전히 돌아온 시야 속에 비친 그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지?”

넘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잠시, 저도 모르게 슬금슬금 미소가 흘러나왔다.

꿈꾸던 미래가 없어진 것은 아쉬웠지만 그보다도 누군가를 구했다는 기쁨이 훨씬 컸다.

“저기, 뭐라고 말 좀 해.”

한참을 피식피식 웃던 나는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며 민망함을 토로했다.

레이프의 눈동자가 떨리는 것도 잠시, 몇 번이고 달싹이던 입술이 그제야 떨어졌다.

방금 전 목숨을 잃을 뻔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물음이었다.

“내 이름… 불렀지?”

“뭐?”

“불렀잖아, 맞지?”

내가 놀라건 말건 레이프는 대답을 재촉했다.

나는 아득히 멀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고 얼굴을 구겼다.

“아니, 사람을 구해 줬으면 고맙다는 인사가 먼저 아냐? 그리고 내가 네 이름을 부르지 않은 적이 어디 있다….”

지난날의 기억을 더듬으며 대꾸하던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하기 위해 꿋꿋하게 레이프를 ‘데스티니’라고 불러 왔다.

하지만 방금 전 다급한 나머지 튀어 나간 이름은 ‘데스티니’가 아닌 ‘레이프’였다.

한발 늦은 깨달음과 함께 탄성이 흩어졌다.

“아.”

“맞구나.”

고작 이름 하나 불린 게 뭐 그리 좋은지 레이프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어떤 의도도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미소에 가슴이 덜그럭거렸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양 뺨을 힘껏 쳤다. 아무리 심신이 쇠약해졌다 해도 아직 상황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으니 정신을 더욱 바짝 차려야 했다.

“…세이딘, 갑자기 왜 뺨을 치는 거야?”

“판단력을 흐리지 않으려고.”

미소 대신 의아한 표정이었던 레이프는 가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내 행동의 의도를 알아내려는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나는 얼굴이 따끔거리는 것을 무시하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역시 이벤트를 달성해야겠지?’

가늘고 길게 사는 게 꿈이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참 모를 일이었다.

까마득한 존재와 맞서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막중했지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는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나머지 살펴볼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진정하고 다시 살펴보니 정말로 마지막이구나 싶은 보상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목을 끄는 것은 ‘시간을 되돌리는 시계’였다.

자세한 설명을 보지 못해 단정할 수 없었지만, 이 아이템이 있으면 데스티니를 얻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뭐,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보다는 훨씬 낫겠지. 적어도 신과 싸우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

속으로 마른 웃음을 터뜨리다 문득 레이프의 의심 어린 시선이 더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렸다.

다른 사람이면 지쳐 나가떨어졌겠거니 생각했겠지만 레이프였기에 마냥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고마워, 세이딘.”

갑자기 들려온 말에 고개를 들었다.

양반이 되지 못할 상이 분명한 레이프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엎드려 절 받은 것 같은 기분에 날 선 대답이 튀어 나갔다.

“됐어.”

“그나저나 놀랐어.”

“뭐가?”

레이프는 내 물음을 듣자마자 입가를 바르르 떨었다.

금방이라도 터져 나오려는 미소를 참는 모습을 보며 나는 바싹 긴장했다. 헛소리를 들은 직후여서 그런지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해 버렸다.

이런 예감은 여느 때처럼 정확했다.

감정을 겨우 추스른 레이프가 진지한 개소리를 던졌다.

“네가 이렇게까지 날 강렬하게 원할 줄이야.”

얼마나 놀랐는지 얼굴에 있는 근육들이 전부 돌처럼 굳어 버렸다.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말은 모든 사고를 정지시킬 만큼 강렬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찰나일 뿐이었다.

“후, 후후… 후후후후…!”

“세이딘…?”

느닷없이 음산한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한 나를 보는 레이프의 시선이 불안했다.

이 빌어먹을 세상은 쓸데없이 한결같다니까?

그렇게 한참 웃은 나는 레이프를 바라보며 곧바로 정색했다.

“웃기지 마. 그럴 리 없잖아.”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상대는 레이프였다.

세상 달달한 표정으로 걱정하던 그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나. 조금은 마음이 생긴 게 아닐까 기대했는데 아쉽네.”

나는 능청스러운 레이프를 보며 헛웃음을 머금었다.

찰나였지만 설렘을 느낀 것을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놈의 얼굴만 아니어도….’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개연성은 얼굴이라는 명언을 떠올리며 혼미한 정신을 가다듬었다.

신을 쓰러뜨리러 가기 전, 한 가지 실험해 볼 것이 있었다.

나는 아이템 창고에서 무엇이든 자를 수 있는 단검을 꺼냈다.

단검을 본 레이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세이딘, 연회에 오면서 그런 걸 챙겨?”

“설명하자면 길어.”

그러려면 시스템창에 대해 말해야 하는데 언제 그걸 설명하고 있어?

신기해하면서도 의문 섞인 시선을 뒤로하고 붉은 실을 잡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무엇이든 자를 수 있는 단검을 곧장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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