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18장. 소원이 꿈이 된 경위에 대하여 (5)
나와 레이프 사이로 정적이 지나갔다.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오늘 처음 보지 않았어? 분명 너에겐 아티야가 있을 텐데 어째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건데?
묻고 싶은 말이 차곡차곡 쌓여 갔지만 아무리 입을 벙긋이려 해도 어떤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날 선택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날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네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고해성사라도 하듯 이어지던 고백 뒤에 붙은 말은 다시금 머리를 얼얼하게 만들었다.
“내가… 죽는다고?”
사람은 언젠가 죽지만 레이프의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지금껏 넘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읊어대던 레이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은 살아 있지만 이대로 가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겠지.”
“무슨 말인지 확실하게 말했으면 해.”
“아직도 모르겠어, 세이딘? 여긴 현실이 아니라 꿈이야. 네 이상에 맞춰진 그럴듯한 꿈.”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불시에 찾아든 선언은 이미 까마득히 쌓인 그간의 충격들을 아득히 넘어섰다.
‘꿈…, 이라고?’
어지러이 널브러진 퍼즐 조각들이 하나둘 맞춰지기 시작했다.
오늘만 해도 수많은 기시감을 느꼈다. 그때마다 느낀 의문들은 레이프의 말을 전제로 대입해 보면 놀랄 만큼 쉽게 납득이 갔다.
“거짓말….”
충격으로 흘러나온 중얼거림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까 같았으면 사실이라고 반박했을 레이프였지만, 그는 그저 깊은 바다처럼 고요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짓눌린 충격이 유성우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있을 수 없는 기억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나저나 아가씨는 언제까지 모른 척할 거야? 내가 보이잖아.’
‘마법 효과가 대단하군.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두근거리니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그웨니르 영애, 실수를 만회할 수 있도록 저에게 당신을 대접할 기회를 주지 않겠습니까?’
‘연주에 대해서다. 어떻게 데스티니가 그렇게 형편없는 소리를 낼 수 있지?’
‘이 세계는 반복되고 있어. 아티야가 사랑을 이루는 시점이 끝나면 모든 것이 다 제자리로 돌아와.’
‘실은… 저도 이 세계에 대해 알고 있어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쏟아지는 기억의 끝에서 상냥한 물음을 던진 금발의 소녀가 나를 향해 웃었다.
‘소원이 뭐니, 세이딘 그웨니르?’
태양을 머금은 눈동자가 잘 벼린 검처럼 첨예했다는 걸 떠올리는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망할 놈의 신이….’
가만히 내버려 둬도 모자랄 판에 목숨을 노려?
이제 막 욜로를 향한 시동을 걸어 보던 차였기에 분노는 한층 더 화력을 더했다.
위태롭게 이어지던 균열은 곧 산산조각 난 유리처럼 날카롭게 흩어졌다.
오랫동안 갈망해 온, 데스티니를 잡지 않았던 세계가 무너졌다.
—또로롱!
한동안 듣지 않았던 알림음 소리와 함께 눈앞에 반투명한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히든 이벤트 – 엑스트라의 꿈 클리어!]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맞선 당신! 축하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인생의 주인공으로 도약할 순간뿐이랍니다.
▷보상 : 어디든 찾을 수 있는 나침반 / 운명의 붉은 실
‘어떻게 이게…?’
시스템창은 신의 관할이 아니었나?
가뜩이나 속았다는 것도 화가 나는데 시스템창까지 나타나니 두 배로 놀아난 것 같은 기분이 밀려왔다.
그러던 중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시스템과 신은 관계없습니다.]
“뭐….”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시스템창이 내 생각에 대답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세이딘? 무슨 일이야?”
글쎄? 나도 이게 무슨 일인지 알고 싶다.
시스템창이 띄운 내용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고지가 얼마 안 남은 당신을 위한 마지막 이벤트가 찾아갑니다.]
‘뭐? 이벤트?’
적어도 충분히 놀라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은 줘야 하는 거 아니니?
한번 말을 텄으니 무슨 대답이라도 돌아오겠거니 한 내가 바보였다.
내 생각을 전부 무시한 시스템창은 알림음과 함께 예고한 이벤트를 공지했다.
[마지막 이벤트 – 길 밖으로]
신을 무찌르고 이 세계를 게임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세요!
▷보상 : 시스템 폐지 / 이 세계의 평화 / 시간을 되돌리는 시계
“미친 거 아냐?”
레이프가 있다는 것을 망각한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보상이 빵빵하면 뭐 하니? 해야 할 일이 절망적인데.
놀란 레이프가 뚫어지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것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여기가 꿈속인 걸 이제 막 깨달은 사람한테 뭐요? 신을 해치워? 그걸 왜 내가 해야 하는데?
[TIP: 아이템 창고를 잘 살펴보세요!]
나는 황망한 시선으로 재차 날아온 시스템창을 바라보았다.
바이올린을 잡는 법 이후로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는 팁이 적혀 있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이 이벤트를 클리어하길 바라는 모양이었다.
“세이딘.”
부드럽게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따스한 온기가 어깨에 스며들었다.
웃음기로 가득했을 레이프의 표정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상했다. 분명 머리끝까지 화가 차올랐는데 레이프를 보니 차가운 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부글거림이 사그라들었다.
한결 마음이 차분해지자 직면한 현실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아….”
시스템에 정신이 팔려 지금 같은 일이 닥쳤을 때의 대비를 조금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뒤늦은 후회를 몰고 왔다.
“말하지 않아도 돼.”
레이프의 말은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사고가 둔해지자 자유를 찾은 입이 신나서 움직였다.
“너 뭐 잘못 먹었어? 그것도 아니면 어디 아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는데 난 지극히 정상이야, 세이딘.”
“그런데 어떻게 아무것도 안 물어볼 수 있어? 너 그런 노… 성격 아니잖아.”
“놈….”
정정한 말을 귀신같이 알아챈 레이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내가 필요한 건 대답이지 감성팔이가 아니었다.
레이프는 그런 나를 향해 옅은 미소를 그렸다.
“아주 간단해, 세이딘. 내가 아무리 궁금해도 좋아하는 사람이 내키지 않는다면 하지 않을 뿐이야.”
“….”
“못 믿는다는 표정이네.”
너한테 속은 게 한두 번이어야 말이지.
내가 보내는 의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레이프는 설명을 이어 갔다.
“믿는 건 네 자유지만 그 안에 담긴 내 마음까지는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널뛰기를 하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더 이상 생각을 읽지 못할 텐데도 레이프는 내 심리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 사실이 부끄러웠고,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정 찜찜하면 언젠가 마음이 정리되면….”
“신을 쓰러뜨릴 거야.”
“뭐…?”
이번만큼은 레이프도 허를 찔렸는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곳이 게임 속이고 시스템이 있다는 것에 대한 서두를 꺼내 봐야 미친 사람이 될 것이 뻔했다.
결국 나는 그 모든 설명을 잘라 내고 지금 상황만 짧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신을 없애면 더 이상 시간은 반복되지 않을 거야.”
“알고 있어, 하지만 무슨 수로?”
“그걸 지금부터 생각해 볼 생각이야.”
황당무계하다고 여기겠지.
희대의 대마법사라 여겨진 레이프조차도 봉인당한 마당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그랬을 텐데.
“그래, 좋아.”
“뭐?”
놀란 나머지 물음이 반사적으로 튀어 나갔다.
아까와는 정반대의 입장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당황스러웠다.
레이프는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게 놀랄 것 없어, 세이딘. 그자를 없애는 건 내 오랜 염원이기도 했는걸. 신중한 네가 그런 말을 한 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지, 아냐?”
지난날의 내가 과연 신중했는지에 대한 의문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프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거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듯한 시선에 가슴께가 괜히 간지러웠다.
나는 그 감각을 외면하고 직면한 현실을 우선했다.
“그 전에 확실히 짚고 가야 할 게 있어, 데스티니.”
“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봐.”
* * *
“성스러운 방울을 사용한 상대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하더니….”
레이프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니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무슨 놈의 신이 밥 먹듯이 거짓말을 해?
“결과적으로는 거짓말은 아냐. 너는 데스티니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까지만 말했으니까.”
“상식적으로 누가 저런 소원을 꿈에서 보길 바라면서 빌어? 현실이었으면 해서 비는 거지.”
나는 가뜩이나 좋지 않은 표정을 더욱 왈칵 구겼다.
불쾌한 건 그뿐이 아니었다. 레이프가 풀어낸 이야기에 따르면 신은 나를 데스티니를 쥐기 이전처럼 꾸며진 꿈을 꾸게 만든 뒤, 다른 세계로 데려가려고 했다고 한다.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린가 했지만, 레이프도 이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했다.
“짚이는 바가 있긴 해.”
“뭔데?”
“내게 금기를 어겼다 뒤집어씌운 것과 관계가 있을 거야.”
여기서 갑자기 금기가 왜 튀어나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은 나머지 조심스럽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인력이 필요해서 인간을 만들려 했다던 일 말이지?”
“단테가 말했구나?”
이미 다 아는 마당에 숨길 필요가 뭐가 있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뻣뻣한 내 반응이 웃겼는지 레이프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조심스러워할 필요 없어. 조금만 찾아보면 알 수 있는 이야기야. 사실 그게 봉인된 이유는 아니지만.”
“뭐라고?”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려 할 때였다.
“이런….”
탄식 섞인 중얼거림과 함께 레이프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의아한 시선으로 움직임을 따라가다가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아무래도 한계에 다다랐나 봐.”
있어야 할 레이프의 손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