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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103)화 (103/122)

제103화. 18장. 소원이 꿈이 된 경위에 대하여 (4)

“돌아가다니….”

의지를 벗어난 속마음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불안으로 쿵쿵 뛰던 가슴은 철렁거리며 끝을 알 수 없는 밑으로 떨어졌다.

레이프는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나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손은 어느새 내린 지 오래였다.

“설마 아직도 눈치 못 챈 거야?”

“무슨 말이야?”

나는 퍼뜩 놀랐다. 어찌 된 일인지 레이프를 처음 봤음에도 입에서 흘러나온 질문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반말이었다.

레이프는 반사적으로 입을 막는 나를 향해 짙은 미소를 드러냈다. 마치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는 것 같아 다행이야.”

마음이 불안에 떠는 건 여전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본능은 충실해서 얼굴을 힘껏 구겼다.

레이프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것이 가장 거슬렸다.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것도.

나는 알 수 없는 상황과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눈처럼 쌓여 가는 것을 최대한 이해해 보려 했다.

그런 내 속사정을 알 리 없는 레이프는 나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지금까지의 일을 설명해야 하는 게 매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러나 거리는 그 이상으로 줄어들지 않았다.

“그대, 그웨니르 영애에게서 떨어지도록.”

레이프를 막아선 것은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이티엘이었다.

분명 처음 보는 사이일 텐데도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는 줄다리기를 하는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그 광경을 보던 나는 느닷없는 기시감을 느꼈다.

아니, 느닷없지 않았다.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모든 일들은 생소하면서도 익숙했다.

지금 이 순간 또한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상처럼 느꼈다.

조금만 생각하면 이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밀려올 때였다.

“맙소사….”

“저 청년은 누구죠?”

“보아하니 마법사 같던데….”

불안한 탄성과 속삭임에 퍼뜩 놀랐다. 코앞에서 벌어진 일에 급급해서 주변을 잊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힐끗 주위를 둘러보았다. 연회장의 모든 관심이 이쪽으로 집중되었다.

그들은 당사자와 시선이 마주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이 보고 믿는 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지엄하신 황제 폐하께서 저런 수수한 영애를 지키시다니…!”

“그뿐인가요? 대마법사님과 브누아 영식도 가세할 준비를 하는걸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 사람들이 왜?

내 의지와 상관없이 군중의 수군거림은 점점 커졌다. 불길처럼 번져 가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이제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래서야 제대로 된 대화는 어렵겠어, 안 그래?”

샹들리에를 가린 그림자와 함께 그윽하게 가라앉은 시선이 주위의 모든 것을 차단했다.

상대의 눈에 비친 나는 놀란 다람쥐처럼 눈을 휘둥그레 뜬 채였다.

“어떻게….”

“어떻게긴. 마법이지.”

이 시점의 레이프가 마법을 쓸 수 있던가?

의문과 함께 또다시 주위에서 소란이 파도처럼 술렁거렸다.

“대체 어느 틈에…!”

놀라는 이티엘을 뒤로한 레이프는 나와 거리를 좁혔다. 아슬아슬하게 가까워진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래서 말인데 미리 사과하도록 할게, 세이딘.”

사과? 무슨 사과를 한다는 거야?

아니, 그 전에….

“내 이름을 어떻게….”

물음이 이어지기도 전에 느닷없이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으아악!!”

예기치 못한 일에 놀란 나머지 단전부터 올라온 우렁찬 외침이 연회장에 가득 찼다.

곧바로 입을 막긴 했지만 여기저기서 술렁거림이 들려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숨기기엔 그른 모양이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나는 이 일의 원흉인 레이프를 노려보았다. 그는 어떤 설명도 없이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더니 곧 손가락을 튕겼다.

눈부셨던 샹들리에와 음악 소리가 아득히 멀어져 갔다.

*  *  *

질끈 감은 눈을 다시 떴을 때는 완벽하게 주위의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커다란 나무들이 우거진 숲은 화려한 연회장과 무척이나 대조되어 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도 좀 보고 살걸.’

나는 지리 수업을 필사적으로 빼먹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후회를 금치 못했다. 설마 백작 영애가 지도를 필요로 하는 날이 올 줄이야.

엎어진 퍼즐처럼 뒤죽박죽인 머릿속을 정리할 새도 없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나를 이곳에 데려온 장본인은 뭐가 그리 좋은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미소를 지었다.

“여긴 어디죠? 절 어떻게 할 셈이에요?”

소나기처럼 몰아친 상황과 낯선 풍경에 압도된 나머지 상대가 마법의 바이올린에 봉인된 대마법사이자 시크릿 공략캐라는 사실을 잊고 정신없이 질문을 쏟아 냈다.

미소를 흩뿌리던 레이프는 난감하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으음, 놀란 건 이해하지만 일단은 진정하는 게 어떨까?”

“진정? 지금 진정하게 생겼….”

레이프는 말을 이어 갈 틈을 주지 않고 허공에 손짓을 했다. 그러자 지금껏 허공에 떠 있던 몸이 드디어 지면에 닿았다.

신기하게도 파도처럼 굽이치던 불안이 많이 누그러졌다.

나는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것을 확인한 뒤, 천천히 심호흡을 내뱉었다. 비록 영문을 알 수 없는 일투성이였지만 계속해서 휩쓸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제야 좀 낫네.”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레이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드리웠다.

아무리 넋을 놓을 정도로 훌륭한 외모라도 한 번 겪은 바가 있어서 그런지 별 감흥을 일으키지 못했다.

“무슨 목적으로 이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사람 잘못 찾으셨어요.”

“아니. 네가 맞아, 세이딘 그웨니르.”

레이프는 성까지 빼먹지 않고 내 이름을 불렀다. 이러면 빼도 박도 못하고 내가 목적이라는 게 되잖아!

‘대체 왜?’

대놓고 너에겐 여주인공이 있지 않냐고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의심 사기 딱 좋은 상황으로 흘러갈 것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가뜩이나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일만으로도 버거운데 그런 일까지 겪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을 제하다 보니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왜 이러세요?’ 정도뿐이었다.

나는 답답함이 차오른 나머지 마른침을 삼켰다.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건 이해해. 네가 바라던 일이 이뤄진 세계니까. 하지만 여긴 진짜가 아냐.”

공감을 서두로 이야기를 시작한 레이프는 알 수 없는 말들만 늘어놓았다.

마치 오랫동안 아는 사람을 상대하는 듯한 말과 태도에 혼란이 온 것도 잠시, 짜증이 치솟았다.

“제정신이야?”

무심코 입 밖으로 튀어 나간 내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마법의 바이올린에게 선택받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공략캐들도 없는 조용한 일상은 힘껏 구르고 굴러 얻어 낸 쾌거였다.

‘그런데 그걸 다시 깨 버리겠다고?’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게임 속에 빙의한 것을 제외하면 무엇 하나 겪은 적 없는 상황들이었다.

그런데도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것들을 떠올리고 분노하고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확신이 머릿속에 스쳐 갔다.

나와 시선을 마주한 레이프는 입가를 끌어 올렸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만이 드러낼 수 있는 여유로운 미소였다.

“…당신 뭐야?”

“세이딘, 그런 뻔한 질문은 문제 해결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아. 그리고 넌 이미 내가 누군지 알고 있어, 안 그래?”

“…….”

하나부터 열까지 옳은 말이었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어떻게 아는 건진 모르겠지만, 레이프는 내가 자신을 아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또한 날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고.

‘나야 그렇다 치지만 레이프는 나에 대해서 어떻게 아는 거지?’

피어난 의문은 버섯처럼 순식간에 머릿속을 꽉 채웠다. 그렇게 생각해도 짐작이 가는 것은 엉망진창인 오늘 하루와 연관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잊혀진다는 건 생각 이상으로 고독하구나.”

줄곧 말없이 지켜보던 레이프가 한마디를 던졌다.

한결같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인데도 이번만큼은 유독 마음에 큰 파문을 남겼다.

살짝 아랫입술을 깨문 레이프는 나를 바라보았다.

속마음을 꿰뚫어 볼 것 같던 시선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아름답게 달을 그려 나갔다.

어둠이 내려앉은 숲에 작은 한숨이 흩어졌다.

“좋아해, 세이딘.”

비밀스러운 속삭임이 밤에 스며들었다.

주위를 둘러쌌던 이름 모를 밤벌레의 울음소리가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어둠을 걷어 낸 환한 달도, 밤 특유의 습기를 머금은 공기도, 모든 것이 선연하게 내게 닿았다.

멈춘 듯한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은 그 중심에 선 레이프였다.

그는 숨이 멎은 듯 움직이지 못하는 날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달싹였다.

“놀라면서도 날 똑바로 보는 시선이 좋아.”

멀미라도 난 것처럼 가슴이 크게 울렁거렸다.

그러나 레이프의 고백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도 포기 않고 나아가려는 노력이 좋아. 마법에 현혹되지 않고 본질을 보려 하는 올곧음이 좋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에 마음을 두지 않는 굳건함이 좋아. 그리고….”

레이프는 얼마나 더 정신을 아득하게 할 생각인지 지금까지 꺼낸 말들만으로는 모자란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숨을 제대로 쉬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와중에도 앞으로 달려올 끝맺음에 의연할 수 있도록 필사적으로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이를 비웃듯 레이프의 마지막 한마디가 종말처럼 다가왔다.

“이유가 없어도 그냥 너라는 존재가 마음에 겨워. 그래서 네게 잊혀지고 싶지 않아.”

레이프의 얼굴에는 더 이상 조금의 웃음기도 남지 않았다.

한없이 진지한 눈빛을 오롯이 바라보는 순간 깨달았다. 모든 것이 멀어진 순간에도 귓가를 쿵쿵 때리던 것이 심장 소리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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