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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102)화 (102/122)

제102화. 18장. 소원이 꿈이 된 경위에 대하여 (3)

단테와의 조우로 인해 테라스에 나가기가 꺼려져 아티야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얌전히 연회장 구석에 있는 의자에서 쉬기로 결심했다.

연회는 한창 춤으로 무르익고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면 이성을 만날 기회가 드물다 보니 대부분의 어린 귀족들은 어떻게든 눈에 불을 켜고 괜찮은 사람과 춤을 추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래서인지 더 이상 아까처럼 내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은 없었다.

마침내 평온을 되찾은 나는 턱을 괸 채 홀 중앙을 바라보았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무척이나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좋나?’

몸치와 박치인 나로서는 조금도 공감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조금이라도 춤을 잘 췄으면 연회를 좋아했으려나, 하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연회가 지루하신 모양이로군요.”

산들바람처럼 다정한 물음에 별안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나는 스스로의 반응에 의문을 품으면서 고개를 돌렸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따뜻한 빛을 머금은 갈색 머리카락과 상냥한 빛을 띠는 눈동자가 인상 깊은 남자는 <바이올린과 꽃미남들>의 공략캐 중 하나인 린든 브누아였다.

놀라서 입을 뻐끔거리는 나와 눈이 마주친 린든은 밀크티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 마음에 혼란이 한층 더 가중되었다.

‘대체….’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릿속은 엉킨 실타래처럼 뒤죽박죽이었다.

세이딘에 빙의해 게임 속에 살게 된 지 어언 4년이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여주인공을 비롯한 공략캐는커녕 조연인 사람들조차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만 벌써 공략캐와 관련된 일을 세 번이나 겪었다. 그중 두 번은 공략캐들을 가까이서 봤고.

“영애?”

조심스러운 물음에 생각에서 허우적거리던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걱정 어린 표정의 린든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으니 걱정할 만도 했다.

“그…, 죄송해요! 누군가 말을 걸 줄은 생각도 못 해서요.”

“아닙니다, 오히려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조금이나마 지루한 기분을 덜어 드리고자 말을 건다는 것이 섬세하지 못했습니다.”

“네…?”

당황스러움이 물음으로 바뀌어 튀어 나갔다.

린든은 여주인공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잘 챙기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곤란한 경우일 뿐, 여주인공이 아닌 내게 이렇게까지 관심을 기울일 만한 이유는 무엇도 없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자 린든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한 표정과 함께 정중히 인사했다.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린든 브누아라고 합니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이번 연회 준비를 맡았습니다.”

“아….”

그런 입장이라면 파티의 손님이 지루한 표정으로 있는 것이 상당히 마음에 걸릴 법도 했다.

근심과 의심으로 가득했던 내 얼굴은 곧 활짝 펴졌다.

“여러 가지 일을 겪다 보니 본의 아니게 경계를 하고 말았네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오해가 풀리셨다면 다행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연회에서 어떤 부분을 지루하게 느끼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크으, 이 남자 봐라. 왜 이렇게 정중해?

거기에 산뜻한 미소까지 더해지니 왜 그렇게 사람들이 린든에 열광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눈 녹듯이 사라진 경계심을 뒤로하고 대답했다.

“연회는 훌륭해요. 단지 제가 연회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뿐이죠.”

“그런 건가요?”

“네, 하지만 음식은 맛있었어요. 또 먹고… 아니, 오고 싶을 만큼요.”

먹어 본 것이라고 해 봐야 닭 다리 두 개가 전부였지만.

내 진심이 닿았는지 린든의 표정이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영애의 이름을 모르는군요. 괜찮으시다면….”

“여기 있었군.”

린든의 말을 끊은 목소리는 이쪽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다.

‘설마….’

나는 불현듯 스친 예감을 곧바로 받아들였다. 공략캐를 두 명이나 만났는데 셋을 만나지 말란 법은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공략캐이자 제르아일의 황제인 이티엘 루제로 데미르 오릴리어스가 있었다.

‘뭔데 저렇게 잘생겼냐….’

단테를 봤을 때는 놀라느라 바빠 감탄할 겨를도 없었지만, 연달아 공략캐들과 조우한 지금은 외모를 감상할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한편 린든은 황제에게 깍듯이 예를 취했다. 그 모습에 두 사람을 넋 놓고 쳐다보던 나도 서둘러 인사를 했다.

“인사는 됐네. 그나저나 브누아 영식,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져서 어디에 갔나 했더니….”

말끝을 흐린 이티엘은 엉거주춤하게 선 나를 바라보았다.

언뜻 보기에는 무심한 시선이었지만 그 너머에는 무언가를 저울질하는 듯한 빛이 스쳤다. 아무래도 이티엘은 린든과 내 사이를 의심하는 모양이었다.

‘세상에 무슨 끔찍한 생각을…!’

순간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린든은 기본적으로 친절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공략캐였다. 얼마 남지 않은 미래에 만날 여주인공을 위해 마음을 지키고 있는 그가 내게 호감을 가질 가능성은 개미 발자국만큼이나 비현실적이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보기 좋고 맛도 좋아 보여도 못 먹는 감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 탈도 없고 편했다.

“폐하, 영애가 놀라지 않습니까. 장난은 그 정도로만 해 두십시오.”

린든은 상황 수습에 나섰다. 당황한 데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는 나와 달리, 그는 무척이나 차분했다.

그럼에도 이티엘은 가늘게 늘어뜨린 눈을 되돌릴 생각은 일절 하지 않았다.

“정말 별일 없었나?”

“네, 그저 잠깐 대화 상대라도 되어 드릴까 한 것뿐, 영애와는 오늘 처음 만난 사이입니다.”

이티엘은 조금 생각하는가 싶더니 짙은 유감을 표했다.

“아쉽군, 이러면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일 줄 알았는데 말이야.”

“폐하….”

탄식 섞인 린든을 뒤로한 이티엘이 다시 내게 눈을 돌렸다.

“어찌 됐건 짐의 사심에 말려들게 해서 미안하네, 세이딘 그웨니르 영애.”

“저를…. 아세요?”

어떻게 황제가 엑스트라의 얼굴을 기억하는 거지?

머릿속이 뒤죽박죽인 가운데, 이티엘은 바로 의문을 풀어 주었다.

“그야 짐의 사람들과 관련된 일인데 기억하지 않을 리가 있나. 그대에 대해서는 그웨니르 백작에게 많이 들었네.”

“아, 아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뭘 해도 그저 ‘우리 딸 잘한다!’라는 반응을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하, 진짜 오늘 왜 이러냐.’

게임 속 이벤트 좀 구경하려 했을 뿐인데 벌어지는 일마다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마라도 낀 건가 싶은 마음에 저택에 돌아가는 길에 신전에 들러 성수를 좀 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소문의 ‘선택받은 자’는 언제쯤 볼 수 있는 거지?”

오늘 처음 들은, 그렇지만 익숙해진 목소리가 대화를 비집고 들어왔다.

이쪽으로 걸어오던 대마법사는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넌….”

“마탑주도 그웨니르 영애를 아나?”

작은 눈덩이가 크기를 부풀리듯 우연이 하나둘 쌓여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줄곧 깊은 곳에서 몸을 숨겼던 불안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순식간에 마음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 순간 머릿속에 든 생각은 단 한 가지였다.

‘이 이상 엮이면 안 돼!’

마침 이티엘의 물음을 들은 단테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때다 싶어 필사적으로 눈에 힘을 가득 줬다. 전하고자 하는 바는 매우 심플했다.

‘우린 처음 보는 사이! 모르는 사이!’

부디 내 마음을 알아줘! 내가 욜로 하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절대 안 돼!!

나는 눈앞의 상황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조마조마한 마음 때문인지 순간이었을 시간은 영원처럼 길었다.

심장 소리가 귓가를 울리고 연회장 주변의 모든 것들이 아득하면서도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흘러갔다.

느릿하게 깜박이던 푸른 눈동자를 기점으로 단테의 입이 달싹였다.

“아까 테라스에서 닭 다….”

“여기 있었네.”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와 함께 한 그림자가 나를 드리웠다.

또다시 대화를 자른 누군가의 등장에 바쁜 토끼처럼 총총 뛰던 가슴이 덜컹거리며 밑으로 추락했다.

‘설마 이번에도 또?’

마지막 남은 공략캐를 떠올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었다. 시크릿 공략캐인 레이프 유클리드가 모습을 드러내는 데는 지금보다도 한참 더 시간이 흐른 뒤였으니까.

“이런 데서 뭐 하고 있어?”

그러나 이번에도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쯤 되면 감이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처참한 적중률이었다.

몸을 돌린 곳에는 제비꽃을 연상시키는 보랏빛 머리카락과 호박빛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있었다. 나와 눈을 맞춘 그는 안도로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성큼 거리를 좁혀 왔다.

‘얘, 얘가 여기서 왜 나와?’

아직 나올 시기가 아니잖아? 그런데 왜?

그보다도 놀라운 것은 레이프가 마치 나를 아는 것처럼 말을 거는 것이었다.

머릿속에 차오르는 의문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느새 레이프는 지척에 서 있었다.

말없이 바라보는 시선에 순간 목이 턱 막히는 것과 동시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엑스트라인 내가 무엇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련한 표정이어서.

‘대체 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화면으로는 수없이 많이 본 얼굴들이지만 게임 속에 들어와서는 처음 보는 공략캐들이었다.

가까이서 보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상황에 레이프는 내게 다가오는 것도 모자라 친밀하게 말을 걸기까지 했다.

그보다도 난감하게 하는 것은 내 자신이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게 다가온 레이프가 반갑다고 생각했다.

‘이상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흩날리는 벚꽃처럼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런 가운데 레이프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어지는 목소리가 한여름 밤의 꿈처럼 귓가에 스며들었다.

“돌아가자, 세이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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