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18장. 소원이 꿈이 된 경위에 대하여 (2)
거기까지 말한 나는 흠칫 놀랐다.
대체 왜 뜬금없이 이런 말을 한 거지?
스스로가 생각해도 영문을 알 수 없어 머릿속에 의문이 버섯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아가씨?”
놀란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옮기자 나만큼이나 당황스러워하는 앤이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그녀뿐만 아니었다. 치장을 도왔던 하녀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데스티니요?”
“어디서 들어 본 거 같은데….”
“왜 갑자기 그 이름을 부른 거예요?”
그러게요, 그걸 나도 알고 싶은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처럼 답답했지만, 어찌 됐건 저렇게 쳐다보는 시선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으니 대충 떠오르는 대로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아하하, 미안. 잠이 아직 덜 깨서 잠꼬대를 한 모양이야.”
다행이라 해야 할지 유감스럽다 해야 할지 아무도 내 말에 의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정말 왜 그런 말이 나온 거지?’
허무하리만치 자연스럽게 상황이 마무리되고, 마차를 타고 황성에 도착할 때까지도 그 의문은 좀처럼 떨쳐지지 않았다.
결국 내린 결론은 한 가지였다.
‘너무 들떴나 봐.’
줄곧 2D로만 즐기던 게임 이벤트를 3D도 아닌 현실로 직관을 하게 됐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럴 수 있지, 여주인공과 공략캐들의 첫 만남은 가슴이 웅장해지는걸. 다는 무리여도 이티엘과의 첫 만남은 꼭 두 눈으로 보겠어!’
납득과 함께 의욕을 불태운 나는 그제야 여유롭게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화려한 분위기와 하하호호 웃으며 등에 칼을 꽂는 것이 당연한 사교 문화에 쥐약인 내가 <바이올린과 꽃미남들>의 메인 인물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집중할 수 있는 것은 정해져 있었다.
“세상에…!”
음식이 준비된 테이블을 보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황실에서 준비한 연회 음식은 마지막으로 왔을 때보다 호화롭고 다양한 가짓수를 자랑했다.
‘스콘을 양껏 먹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랬다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산해진미가 그저 그림의 떡이었을 테니 말이다.
나는 속으로 흥얼거리며 접시를 들었다. 마음 같아선 산처럼 수북하게 쌓고 싶었지만 주위의 시선이 쏠릴 것을 생각하면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뭐, 음식이야 또 가져오면 되지.’
모두가 연회에 정신이 팔려 있는 마당에 누가 몇 번 갖다 먹었는지 어떻게 알겠어?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연회 음식을 즐기려던 나는 곧 얼마나 안일하게 생각했는지 깨닫고 말았다.
“하, 더러운 사교계 같으니라고.”
맘에도 없는 웃음을 흩뿌리며 테라스로 나와서는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신경질적으로 구두를 벗어 던지고 바닥에 그대로 앉았다.
드레스 자락의 여기저기가 구김이 지는 것이 보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구겨지는 거야 멋으로 대충 퉁칠 수 있었지만 기분은 그렇게 넘길 수 없었다.
“밥 먹는 거 빤히 알면서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씩씩거리며 테라스의 커튼 너머로 새어 나오는 화려한 빛을 노려보았다.
음식을 즐기려고 포크를 들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이름 모를 영애와 영식들은 마치 야생의 주머니 괴물을 연상시켰다.
처음에는 아버지와의 인맥을 얻고 싶어 하는 부모들이 닦달해서 어쩔 수 없이 온 것을 알아서 받아 줬지만, 그 수가 점점 불어나 10명에 달하게 되면서 더는 견딜 수가 없어 도망쳤다.
그 결과, 나는 결국 신나서 가져온 첫 접시조차도 먹지 못했다.
한참을 쌓인 불만을 랩처럼 늘어놓던 나는 다짐을 다졌다.
“내년부터 무조건 안 와야지.”
애초에 <바이올린과 꽃미남들>의 인물들과 이벤트가 아니었다면 생각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
한차례 쏟아내고 결론까지 내리니 기분은 어느 정도 나아졌다.
그렇다고 곧장 연회장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황제가 올 때까지는 테라스에 있으려 했다.
“어…?”
밤이 내려앉은 정원을 구경하던 나는 눈을 의심했다.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눈앞에 잘 구운 닭 다리 두 개가 둥둥 떠다녔다.
“이건….”
연회 음식 중에 있던 닭이잖아?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헛것까지 다 본담?”
“헛것? 뭐가 보이는 건가?”
“아, 눈앞에 닭 다리가 보여…. 응?”
무심코 대답을 하다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상대를 본 순간 너무 놀란 나머지 숨이 턱 막혀 버렸다.
“헉…!”
맞은편 테라스에 한 남자가 있었다.
달빛을 머금은 은발은 새카만 어둠 속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냈고,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푸른 눈동자는 고요한 호수 같았다.
세상과 동떨어진 미모는 절로 감탄이 나올 만했지만 나는 다른 이유로 놀랐다.
“다, 단테 에레즈…?”
<바이올린과 꽃미남들>의 공략캐 중 하나인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있어?
단테는 혼란에 빠져 있는 내게 물음을 던졌다.
“날 아나?”
물론이다.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니라 조금 있으면 여주인공과 만날 예정인 것부터 시작해서 사랑에 허우적대다가 한층 더 뛰어난 대마법사가 된다는 것까지 빠삭하게 꿰고 있는걸.
하지만 이건 플레이어일 때의 이야기일 뿐, 게임 속 엑스트라에게는 엑스트라에게 걸맞은 대답이 있었다.
“…제, 제국에 사는 사람들 중에 마탑의 대마법사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 리가요.”
너무 떨었나? 어색하게 굴진 않았고?
어떻게든 침착해 보이려 했지만 확신이 서지 않다 보니 스스로를 향한 검열이 줄줄이 이어졌다.
한참을 눈을 굴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단테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건 그렇군.”
의심 없이 받아들여 줘서 천만다행이야.
단테는 내가 이렇게 속으로 안도를 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었다.
한차례 고비를 넘기고 나니 자연스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단테가 물음을 던지기 전까지는.
“그나저나 안 잡을 건가?”
“잡다니, 뭘요?”
영문을 몰라 눈을 끔벅거리자, 단테는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닭 다리 말이야. 먹고 싶었던 것 아니었나?”
세상에, 이게 환상이 아니었다고?
까마득히 정신이 멀어지는 것도 잠시, 생각이 바삐 움직였다.
단테가 닭 다리를 내게 줬다는 건 곧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전부 들었다는 뜻이었다.
‘으아아악!’
저만치서 달려온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무도 없을 거라 굳게 믿고 의식의 흐름대로 마음껏 감정을 뱉어대던 방금 전의 내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안 먹을 건가?”
설상가상으로 단테는 자신이 준 닭 다리를 먹을지 말지에 대한 재촉을 보내고 있었다.
“아, 아뇨. 먹어요!”
머리가 혼미한 와중에 입 밖으로 튀어나온 대답은 본능에 충실했다.
그럼 먹으라는 단테의 고갯짓에 얼결에 허공에 뜬 닭 다리를 잡았다.
“잘…. 먹을게요.”
“훌륭한 맛이었다. 그러니 실망하지 않을 거야.”
쓸데없이 친절한 후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떨떠름하게 한입 베어 물었다.
닭 다리는 예상보다도 훨씬 더 맛있고 깊은 풍미를 자랑했다.
‘이게 뭐지?’
닭 다리를 먹는 데 여념이 없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연회장 테라스에서 푸념하던 중에 만난 공략캐. 그리고 그 공략캐가 나눠 준 연회 음식을 먹고 있는 엑스트라.
“맛있나?”
게다가 공략캐는 음식의 맛이 어떤지까지 묻고 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상당히 이상한 상황이었다.
‘우선, 진정하자.’
남은 닭 다리를 마저 뜯으면서 스스로를 도닥였다.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잖아? 이보다 더 당황스러운 일도 많이 겪어 봤는걸. 얼마 전만 해도…. 어?’
심호흡을 가다듬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했다. 세이딘 그웨니르에 빙의해서 4년이나 살았지만, 지금만큼 당황스러웠던 것은 빙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와 이 세계에 적응할 때 외에는 없었다.
그런데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며칠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을 겪은 것처럼 말했다.
‘생각해 보면 아까도 그랬어.’
의지와 관계없이 흘러나온 데스티니의 이름은 몇 번이고 불러 본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혼자만의 생각으로는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아 단테에게 물음을 던졌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혹시…. 우리 어디서 본 적이 있던가요?”
“아니, 지금 처음 본다.”
“그렇죠?”
하, 그럼 내가 이상한 거네.
나는 속으로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게임 캐릭터들에게 상당한 내적 친밀감을 갖고 있던 모양이다. 그런 게 아닌 이상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했겠어?
“하지만 이상하군.”
생각을 정리하며 납득하고 있을 때, 불현듯 단테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처음 보는데도 이상하게 굉장히 익숙해.”
단테는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응시했다. 깊어진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기를 잠시, 마음속을 스친 불안이 날카로웠다.
“저, 저는 이만 가 봐야 할 거 같아요!”
생각이 더 이어지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뚫어지라 바라보는 시선에 의문이 어리는 것이 또렷하게 느껴졌지만, 불안하게 덜컹거리는 심장과 본능이 이 상황을 피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기에 애써 모른 척했다.
“이봐….”
“닭 다리 맛있게 먹었어요. 감사합니다!”
나는 단테에게 말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않고 그대로 테라스를 빠져나왔다.
다행히도 그는 날 붙잡거나 하지는 않았다.
“살았다….”
딱히 죽이겠단 협박을 들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조마조마한 건지.
안도의 한숨을 터뜨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반짝이는 조명과 화사한 음악과 웃음이 여기저기서 끊이지 않는 연회장은 테라스에 들어갈 때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이 광경이 반갑게 느껴질 줄이야….”
아까까지만 해도 굉장히 싫었는데.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사람의 앞날이라는 생각과 함께 지나가는 시종에게 다 먹은 닭 뼈를 건넸다.
이 연회에서 조우한 가장 큰 변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