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100)화 (100/122)

제100화. 18장. 소원이 꿈이 된 경위에 대하여 (1)

“원래대로?”

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모르는 척은. 이미 어느 정도 예상했으면서.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태도였지만 마냥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아이템의 힘을 빌려 소원을 말하게 되었다 해도 어찌 됐건 그녀는 신이었고 절대적 갑이었으니까.

나는 다시 한번 말했다. 아까보다 구체적인 바람이었다.

“저는 데스티니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길 바라요.”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며 지금까지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중압감이 몰려왔다.

마주한 신도 신이지만 대부분은 옆에 선 레이프로부터 기인한 것들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예전부터 한결같이 말해 왔기에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을 텐데도 그에게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무시하자.’

나는 스스로를 다잡았다.

이유라면 알고 있었다. 레이프는 나를 좋아한다. 그러니 내가 자신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할 테고.

하지만 나는 그 마음에 부응할 수 없었다.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일상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옆에서 생생하게 느껴지는 레이프의 침묵을 무시하며 신의 대답을 기다렸다.

에이브와 함께 어떻게든 나를 아티야의 대리로서 세우려 했던 그녀였다. 당연히 썩 내키지 않을 것이 분명….

“그래, 좋아.”

어라?

예상과 달리 돌아오는 대답은 무척이나 빠르고 가벼웠다.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끔벅이는데 신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그 반응은? 맘에 안 들어?”

“아니…, 놀라서요.”

“아, 내가 거절할 줄 알았는데 허락해서?”

“….”

본인도 알고 있구나.

너무 당당하게 말하니 입안에 고여 있던 물음들이 전부 목구멍 뒤로 넘어갔다.

신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실은 그럴 생각이었어. 네가 아티야를 대신한 뒤로는 많은 것들이 흥미롭게 흘러갔거든. 앞으로 몇 번은 계속 널 그 자리에 둬 보려고도 했고.”

나는 황당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너무 가벼운 투로 말해서 자칫하면 흘려들을 뻔했지만, 그것은 곧 지금까지 에이브를 통해서 들은 말들이 거짓이라는 뜻이었다.

“설마 중간에 관여를 할 수 없다는 것도….”

“아, 그거? 물론 거짓말이지! 사실 너도 어느 정도 의심하고 있었잖아?”

해맑게 돌아오는 대답은 정곡을 찔렀다.

시간을 반복시키는 장본인이 중간에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말한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걸 알기에 일단은 신이 제시한 공략캐와의 엔딩을 보는 것을 목표로 삼은 것이었다.

이 또한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지도 모른다고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너무 순순히 인정하니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허탈감이 몰아쳤다.

그리고 한 번 고개를 쳐든 의심은 또 다른 의심을 낳았다.

“이번에도 거짓말을 하려는 건….”

“거짓말? 설마…! 성스러운 방울을 사용한 상대에게는 그럴 수 없어. 그러기로 되어 있는 약속이니까.”

과연 믿어도 될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 해서 믿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어찌 됐건 내 상황을 되돌릴 수 있는 건 신뿐이었으니까.

생각 끝에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신은 양 볼을 부풀리며 불만을 드러냈다.

“믿지 않는 건 자유지만 그렇게 티를 내면 나도 별로 내키지 않거든?”

아, 그러세요?

그렇다고 하니 장단은 맞춰 드려야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곧장 방긋 웃는 나를 보며 신은 처음으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넌 자존심도 없니?”

“자존심이라뇨, 그게 뭐죠?”

“….”

어쩐지 신이 아까보다 피로하게 보이는 듯한 건 내 착각이겠지.

“이리 와.”

신은 얕은 한숨과 함께 손짓을 했다.

마음을 정한 나는 망설임 없이 레이프의 등을 벗어났다. 그리고 신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뎠다.

“가지 마.”

손을 감싼 온기와 함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이끌리는 힘에 몸을 돌린 나는 줄곧 외면했던 레이프와 마주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과 앙다문 입술에는 일말의 여유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모습에 긴장으로 정신없이 날뛰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지 마, 세이딘.”

다시 한번 이어진 레이프의 부탁은 간절했다.

나는 충동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던 정신을 다잡았다. 다른 부탁이었으면 이미 들어주고도 남았겠지만, 이것만큼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놔, 레이프.”

짧은 대답과 함께 고요히 레이프를 바라보았다.

호박빛 눈동자에 어린 실망이 유성우처럼 스쳐 가더니 나를 잡은 손에 힘이 빠졌다. 

가슴이 욱신거렸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을 외면하고 앞으로 향했다.

마침내 마주한 신이 내게 물었다.

“데스티니를 얻기 전으로 돌아가게 되면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은 전부 기억하지 못할 거야. 그래도 괜찮아?”

마침내 이 거지 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안 괜찮은 게 뭐가 있겠어요?

저만치서 달려오는 해방감과 함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씨 …세요.”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일어나셔야 해요!”

상당히 다급한 목소리였지만 그다지 대답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늘어질 수 있는 게 얼마 만인데 이걸 어떻게 포기해?

잠결에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던 나는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내가 힘든 일이 있었나?’

지난 일주일간 있던 일들을 떠올렸다. 곰곰이 생각해 봐도 떠오르는 것은 느긋하다 못해 늘어지는 일상뿐이었다.

‘으음, 그런데 왜 오랜만에 쉬는 것처럼 생각한 거지?’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 나는 곧바로 납득했다.

게임 속 엑스트라 백작 영애에 빙의한 지 어언 4년, 놀고먹는 욜로의 일상은 누리고 누려도 부족한 법이었다.

나는 스스로가 내린 결론에 흡족하며 다시 잠으로 빠져들려 했다.

다음 재촉을 듣기 전까지는.

“지금 일어나지 않으시면 방금 구운 스콘이 다 식어 버릴 거예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뭐, 스콘이라고?’

다른 건 몰라도 갓 구운 스콘은 못 참지!

나는 곧장 눈을 떴다. 아까까지만 해도 천근만근 무거웠던 눈꺼풀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안녕, 앤. 좋은 아침이야.”

나는 눈이 마주친 상대를 향해 살갑게 인사를 했다.

스콘이라는 단어에 미라처럼 반응해서 일어난 것이 민망해서 이어진 행동이었건만, 앤은 이마저도 익숙하다는 듯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가씨. 무사히 일어나셔서 다행이에요. 다른 날이면 몰라도 오늘은 늦잠을 주무시면 안 되는 거 알고 계시죠?”

응? 오늘은 늦잠을 자면 안 된다고?

청천벽력같은 앤의 말에 아직까지도 몽롱했던 정신이 드디어 번쩍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스콘 먹으라고 깨운 거 아니었어?”

능숙하게 침대 위에 아침 식사를 준비하던 앤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잊으신 건 아니죠?’라는 무언의 시선이 괜스레 마음을 무겁게 했다.

우리 둘 사이로 한차례 무거운 공기가 지나갔다.

내가 계속 눈만 끔벅이고 눈치를 살피고 있자, 앤은 그제야 내 머릿속이 백지라는 것을 깨닫고는 곧바로 기대를 접고 설명을 해 나갔다.

“오늘 황성에서 연회가 있잖아요. 추수제 기념 연회요.”

“아, 맞다!”

그제야 안개처럼 희끄무레했던 기억이 또렷해졌다.

한 해의 수확을 기념하는 것과 동시에 겨울을 준비하는 추수제는 무척이나 큰 행사 중 하나로 매년 축제와 함께 황궁에서는 귀족들을 위한 연회가 열렸다.

평소라면 연회에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겠지만 올해는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바이올린과 꽃미남들>의 시작을 알리는 연애 이벤트가 전부 황성의 연회에서 열리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왜 잊고 있었지?”

추수제가 막 시작되던 며칠 전, 봉인된 바이올린을 들고 연주하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우리 저택까지 흘러들어 왔다.

두 눈으로 직접 게임의 이야기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 달력에 체크까지 했었는데 어떻게 그걸 까먹을 수 있어?

스스로가 생각해도 참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런 속사정을 모르는 앤은 억울함으로 가득한 나를 힐끗 보더니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아가씨가 깜박하시는 데 이유가 있었어요? 지나간 건 흘려버리고 앞일을 생각하도록 해요.”

슬그머니 뼈를 때린 앤은 어느새 아침 식사 세팅을 마쳤다.

가는 눈으로 앤을 째려보던 내 시선은 어느새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스콘에 향해 있었다.

나는 앤에게 한마디 하려던 것을 이후로 기약하며 스콘에 딸기잼을 올려 한입 베어 물었다.

새콤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풍미가 어우러져 입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즐거워졌다.

“시간이 좀 빠듯하니 머리부터 먼저 준비할게요.”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앤은 한쪽에 준비해 둔 머리 장식용 트레이를 끌고 와 머리를 빗었다.

앤의 손에서 이렇게 저렇게 만져진 머리는 내가 식사를 마치는 것과 동시에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본격적인 준비는 이제부터였다.

다 먹은 식사를 치운 앤은 나를 화장대로 이끌었다.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은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비장한 표정으로 나를 치장하기 시작했다.

‘이건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단 말이야….’

한 번은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으로 치장을 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우리 아가씨가 어디 가서 꿀리는 모습은 절대 못 봐요!’였다.

애초에 이런 걸로 기죽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어쩌겠는가, 어떻게든 내 기를 세워 주겠다고 저러는 거니 즐길 수밖에.

“자, 이제 눈 뜨세요.”

화장까지 마친 나는 앤의 말을 따라 눈을 떴다.

거울 속에는 부스스한 잠옷 차림의 소녀 대신 봄처럼 화사하게 피어난 소녀가 비치고 있었다.

기대로 가득한 하녀들의 시선이 몰렸다.

“어떠세요?”

솔직한 심정으로는 평소보다 과해서 부담스러웠다.

이렇게 말하면 상심할 것이 뻔했기에 어떡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어떤 거 같아, 데스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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