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17장. 신과의 만남 (4)
저 미친놈이 이젠 우리 집까지 해코지를 하려고 해?
순간 온몸의 피가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것과 동시에 한 가지 생각이 번뜩였다.
‘패자!’
지금껏 당한 게 얼만데 한 번 정도는 정당방위를 내세워도 되지 않을까?
어지러운 머리로 자기 합리화를 마치고서 데스티니를 불러냈다.
아무리 지긋지긋한 바이올린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이보다 더 든든하게 여겨지는 것도 없었다.
‘각오해라, 네 이놈!’
데스티니를 꼭 쥐고는 지긋지긋한 분홍 머리의 천족을 향해 눈을 번뜩였다.
시선이 마주친 에이브는 흠칫거리더니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눈치가 없는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그렇지도 않은 듯했다.
뭐, 이젠 그마저도 내 알 바는 아니었지만.
“잠깐, 세이딘.”
에이브를 향해 한 발짝 걸음을 내디딜 때였다. 고개를 돌리자 줄곧 경계를 늦추지 않던 레이프가 어느새 지척에 서 있었다.
대체 어느 틈에 다가온 건지 물어볼 새도 없이 성큼 다가온 레이프는 자신의 손을 데스티니를 쥔 내 손 위에 포갰다.
“심정은 이해하지만 지금은 잠시 미뤄 두도록 해.”
“뭐? 그걸 말이라고….”
“그럴 때가 아니야.”
장난기라고는 일절 찾아볼 수 없는 담백한 목소리에 머릿속에 마치 찬물이 끼얹어진 것 같았다.
사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범인이 누군지만 들으려 했지 그에 대한 처벌은 이후로 미뤄 두려 했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다 해서 마음까지 그런 건 아니었다.
레이프는 머리와 마음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나를 애잔하게 바라보더니 탄식 섞인 투로 말했다.
“저길 봐.”
레이프가 손으로 가리킨 곳은 내 등 뒤였다.
나는 얼마나 대단한 이유이기에 말렸는지 확인하기 위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건 대체….”
레이프의 손끝이 향하는 곳을 본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은 자연재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규모의 태풍이었다. 주변에 부는 바람이 우습게 느껴질 만큼 커다란 바람기둥은 주변 구름을 집어삼키며 계속해서 몸집을 키워 나갔다.
비현실적인 광경에 마음속에서 일렁거리던 분노는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신이야.”
어버버거리는 와중에 들려온 대답에 나는 귀를 의심했다.
“신? 저게?”
“일종의 허세야. 그자는 화려한 걸 좋아하거든.”
“화려…?”
바람기둥을 보는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그래, 비록 살벌하고 흉흉하고 위압적이긴 해도 어떤 의미에서는 저 또한 화려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걸 허세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건가? 저런 걸?
지금껏 알고 있던 지식에 대한 혼동이 밀려오는 것도 잠시, 시야에 포착된 한 인물에 절로 헛웃음이 피어났다. 아티야였다.
여주인공이어서인지, 아니면 성녀라 그런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호언장담한 대로 바람과 중력의 영향 따위는 조금도 받지 않는 것처럼 멀쩡했다.
심해처럼 잠잠하고 고요한 눈동자로 바람기둥을 바라보던 아티야는 천천히 입을 달싹였다.
“부디 진정하시고 모습을 드러내 주세요, 데이터스.”
그 말이 불쾌하다는 듯 성난 황소처럼 휘몰아친 바람기둥은 아티야를 지나쳐 나를 비롯한 공략캐들을 집어삼킬 듯이 다가왔다.
“세이딘!”
긴장감으로 가득한 부름에 나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레이프의 뒤로 숨었다. 내가 원하는 건 욜로지 개죽음이 아니었으니까.
아슬아슬한 거리를 두고 태풍이 멈췄다.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어.”
바람기둥 속에서 서릿발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그래도 이제 한계였거든.”
터질 듯 부피를 부풀리던 태풍은 순식간에 줄어들더니 마침내 사람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바닥에 널브러질 정도로 긴 금발을 늘어뜨린 어린 여자아이였다.
모든 바람을 멎게 한 아이는 아티야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무슨 짓일까, 아티야?”
“…….”
“뭐, 그래. 너는 여리고 착한 아이니 여러 가지로 마음이 좋지 않았겠지. 충분히 이해해. 그러니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새처럼 끊임없이 조잘대던 여자아이는 아티야로부터 관심을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황금빛 눈동자가 서늘할 정도로 투명했다.
“건방진 건 여전하네, 레이프 유클리드.”
“하하, 없는 말을 지어낸다고 하지 않는 걸 보면 찔리긴 했나 봐?”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레이프 덕분에 주위의 공기가 살얼음판처럼 변했다.
‘저 미친놈….’
신에게 원한이 있는 건 알지만 봉인된 상태면 몸이라도 사려야 하는 거 아냐? 무슨 목숨이 10개라도 돼?
아무리 생각해도 머리와 가슴에 의문과 답답함이 쌓여 갈 뿐이었기에 더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됐어, 지금 볼일이 있는 건 네가 아니니까.”
오랜 세월 쌓인 앙금을 드러내던 중, 먼저 뒤로 물러난 것은 신이었다.
그녀는 레이프의 의심스러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개의치 않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무언가를 찾는 듯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황금빛 눈동자가 사르르 휘었다.
“세이딘 그웨니르.”
고작 이름이 불렸을 뿐인데 등 뒤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은 해맑은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어 나갔다.
“설마 이렇게 만나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참 여러모로 대단한 아이야.”
얼핏 듣기에는 칭찬 같지만, 음성 곳곳에 어린 감정은 불쾌함이었다.
그 감정들은 고스란히 공기에 스며들어서 금방이라도 끊어질 실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정신 차리자.’
숨이 턱턱 막히는 압박 속에서 나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만약 신이 나타난다면 어느 정도 저런 반응을 보일 거라는 것쯤은 짐작했다. 주어진 상황에서 얌전히 움직여야 할 내가 어떻게든 거스르고 빠져나가려고 하니 달갑게 여겨지지 않겠지.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수는 없었다.
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에게는 다시 올 수 없는 기회였고, 무슨 일이 있어도 손에 쥐어야 했다.
“거기까지. 그 이상 다가오지 마.”
어떻게든 정신을 바짝 차리고 버티고 있으려 할 때였다.
날카로운 경고를 내뱉은 레이프는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거침없이 다가오던 신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내게 명령하는 거야? 완전히 봉인을 풀지도 못한 주제에?”
“설마 전능한 신에게 그럴까. 난 단지 우선순위를 바로잡으려 했을 뿐이야. 저 방울이 가진 의미가 뭔지 알고 있잖아?”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짓는 레이프와 달리 신은 만면하던 미소를 거두고 정색했다.
한층 더 첨예해진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왜 거기서 바톤 터치를 해요…?’
의지와 상관없이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지만, 앞으로 할 말과 밝은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어떻게든 정신만큼은 놓지 않으려 노력했다.
한참을 뚫어지라 바라보던 신은 마침내 작은 한숨을 뱉어 냈다.
“그래, 약속은 약속이니 이야기 정도는 들어 봐야겠지.”
떨어진 허락에 안도하는 것도 잠시, 짓궂은 미소와 함께 신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전에 청소 좀 해야겠어.”
작은 손가락의 마찰음이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이건….”
뭐라고 할 새도 없었다. 짧은 탄성과 함께 이티엘의 몸에 빛이 휩싸이는가 싶더니 모래성처럼 부서져 내렸다.
“폐하! 큭…!?”
이티엘을 보고 놀란 린든이 목소리를 높인 것도 잠시, 그 또한 빛이 되어 사라져 갔다.
단테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세이딘, 레이프 님! 조심하십시오. 함정일….”
레이프를 제외한 모든 공략캐들이 전부 빛과 함께 사라진 것을 확인한 신은 앓던 이라도 빼 버린 듯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네.”
“그들을 어떻게 한 거죠?”
나는 애써 태연한 척을 했지만 물음 끝에 어린 미세한 떨림은 감출 수 없었다.
이를 놓치지 않은 신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진심으로 즐거운 듯한 모습이었다.
“왜? 내가 그 아이들에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얌전히 배역에 충실한 말들에게는 자비롭거든.”
“말….”
순간 가슴에 돌이라도 얹힌 것처럼 답답해졌다.
신앙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막연하게 신은 자신의 피조물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눈앞에 둔 신은 그런 모습은커녕, 오히려 사람을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고르는 것처럼 가볍게 여겼다.
“아하하, 놀라는 것 좀 봐!”
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나를 보며 그렇게 유쾌한 것이 없다는 듯 웃었다.
배를 잡고 웃은 그녀는 짙은 한숨을 터뜨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쩔 수 없네, 이해력이 부족한 걸 누굴 탓하겠어. 쉽게 설명하는 수밖에. 그 아이들은 이 세계의 진실을 듣기만 했을 뿐, 직접 깨닫진 않았잖아? 그러니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 여기에 계속 두면 레이프나 너처럼 귀찮아질 게 뻔하니까.”
말은 저렇게 했지만 신은 결국 이티엘을 비롯한 공략캐들이 위협 요소가 될 가능성이 있다 판단해 그들을 배제한 것이었다.
이상할 건 없었다. 호감도에 미쳐 여기까지 쫓아온 놈들인데 경계할 만도 하지.
어찌 됐건 결론은 공략캐들은 무사하다는 것이었기에 걱정을 한시름 덜었다.
“궁금증이 풀렸으면 이제 한번 물어볼까?”
신의 물음은 무척이나 상냥했다.
“소원이 뭐니, 세이딘 그웨니르?”
끌어 올린 입꼬리는 외관만큼이나 깜찍하고 사랑스러웠지만, 태양을 닮은 눈동자는 웃음기라곤 전혀 없이 나를 집어삼킬 듯 타올랐다.
대답 여부에 따라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드디어….’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고대해 마지않던 상황이었다. 아까부터 긴장감에 휩싸였던 심장은 이젠 입 밖으로 튀어나올 기세로 펄떡였다.
지긋지긋하고 긴 여정 속에서 내가 바란 건 처음부터 단 한 가지뿐이었다.
“저는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길 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