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17장. 신과의 만남 (3)
왜 이걸 이제야 깨달았을까?
레이프는 내 윙크가 보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이티엘과 비슷한 이유로 인형 탈을 썼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 윙크로 인해 동요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난….’
거하게 헛다리를 짚은 방금 전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그러자 당장 앞에 보이는 구름에 얼굴을 처박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대체 시스템은 뭘 하는 거야?!’
하늘까지 치솟는 민망함에 화살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갔다.
꼭 탓을 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이럴 때면 칼같이 오던 알림이 오지 않는 건 의아한 일이었기에 시스템창을 열었다.
‘헉…!’
호감도를 확인한 나는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레이프 유클리드: 500]
‘대체 어느 틈에….’
머리가 어질거리면서도 단번에 납득했다. 더 이상 오를 호감도가 없으니 알림음이 울리지 않은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티엘의 호감도도 확인했다.
[이티엘 루제로 데미르 오릴리어스: 480]
이티엘의 호감도는 아직 다 차진 않았지만 그렇다 해서 마냥 안도할 수는 없는 수치였다.
정 안 되면 공략캐들 중 누군가와 엔딩을 맞이하려 했지만, 이렇게 확인사살을 당하니 여러모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 미안. 내가 생각이 짧았어.”
머릿속이 멍한 와중에도 입은 부지런히 제 본분에 충실했다.
놀란 것과 별개로 눈치가 없어 상대를 배려하지 못한 것은 온전히 내 잘못이었으니까.
“사과하지 마, 세이딘.”
감정을 추스른 것인지 레이프의 얼굴은 더 이상 붉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꿈이라도 꾼 건가 싶을 정도로 완벽하게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는 옅은 미소를 피워 냈다.
“아무리 예기치 못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나 또한 미숙했는걸. 그러니 사과하지 말았으면 해. 그리고…,”
말끝을 흐린 레이프는 망설이는가 싶더니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황제의 말대로 그 표정은 아무한테나 보여 주지 말았으면 해. 심각하게 치명적이거든.”
그 말에 되레 얼굴이 붉어진 것은 나였다.
아무래도 레이프는 그깟 윙크보다 숨 쉬듯 플러팅을 하는 자신이 더 치명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싶었다.
민망해진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 고작 윙크 하나로 이게 뭐람….’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했던 게 이런 식으로 발목을 잡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와 동시에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을 아티야를 떠올리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와 눈이 마주친 아티야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표정들을 담은 채였다.
“아하하하….”
침묵을 참을 수 없던 나는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제발 어떤 식으로든 오해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다.
다행히 아티야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세이딘이 바라는 건 제가 성스러운 방울을 흔드는 거라는 거죠?”
“네, 맞아요.”
나는 속으로 무한 감사를 외치며 대답했다.
아티야까지 이 상황에 대한 궁금증이나 질투를 드러냈으면 굉장히 힘들었을 테니까.
혼란스러운 표정을 정리한 아티야는 조심스럽게 성스러운 방울을 건네받았다.
말없이 방울을 살핀 아티야는 물음을 던졌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세이딘은…. 이 방울이 울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나요?”
“네, 그래서 부탁하는 거예요.”
갠 하늘처럼 맑은 아티야의 눈동자가 탁한 빛으로 흔들렸다.
그녀는 몇 번이고 입을 달싹였지만, 그때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무슨 걱정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당신에게 피해가 가지는 않을 거예요. 방울과 관련된 책임은 전부 제가 질 테니까.”
나야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하는 도전이었다.
아티야가 방울을 흔들어도 신이 응답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설령 신이 나타나도 그다음이 문제였으니 결국은 내가 어떻게 하는지에 달린 일이었다.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지만 아티야의 표정은 복잡해졌다.
그녀는 깊게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 작게 숨을 내뱉었다.
“…세이딘은 눈치가 빠르면서도 둔하군요.”
“네? 그게 무슨….”
느닷없는 말에 대답을 하기도 전에 아티야의 행동이 빨랐다.
어쩐지 후련한 미소와 함께 그녀는 방울을 흔들었다.
딸랑!
내가 흔들었을 때와 달리, 아티야의 손을 거친 성스러운 방울은 하늘 전체를 가득 메울 정도로 크고 청량한 소리를 퍼뜨렸다.
‘이럴 때마저도 여주인공의 버프는 남다르구나.’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접하니 상당히 느낌이 달랐다.
아티야는 그 후로도 성스러운 방울을 다섯 번 정도 더 흔들었다. 경쾌한 박자감이 있는 걸 보면 신을 불러내기 위한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침내 마지막 방울 소리가 하늘 끝까지 퍼졌다.
긴장한 채로 주위를 살폈지만 여운 같은 소리의 잔상이 사라질 때까지도 눈곱만큼도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 일도…. 없잖아?”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신을 만나고 싶다는 바람이 더 컸기에 실망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역시 믿을 만한 건 공략캐 중 하나를 데리고 엔딩을 보는 것뿐인가….’
처음으로 돌아온 것뿐,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라며 스스로를 다독일 때였다.
“아니야, 세이딘.”
단호한 목소리가 귓가에 박혔다.
고개를 돌리자,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늘을 노려보는 레이프가 보였다.
“내게서 떨어지지 말도록, 그웨니르 영애. 세르비아스 영애, 그대도.”
이티엘 또한 무언가를 느꼈는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아티야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안전이 제일이기에 시키는 대로 했다.
우리를 감싸듯 선 이티엘은 레이프와 짧은 시선을 주고받았다. 신나게 견제할 때는 언제고 죽이 척척 맞는 걸 보니 새삼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온다.”
짧고 날카로운 레이프의 경고를 시작으로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다.
처음에는 그다지 강하지 않았지만, 단숨에 더해진 세기는 태풍을 방불케 했다.
“갑자기 이게 뭐…. 으아아!”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만으로도 정신없는데 별안간 발이 지면에서 떠올랐다.
“그웨니르 영애!”
이티엘이 서둘러 잡아 줬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대로 날아갈 뻔했다.
나는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에 이끌려 다시 구름에 발을 디뎠다.
“고, 고마워요!”
“또다시 날아가면 안 되니 내 허리를 붙잡도록 해, 영애! 그리고 세르비아스 영애, 그대도 이쪽으로….”
무슨 생각인지 아티야는 이티엘이 내민 손을 잡지 않았다. 그리고 바람이 부는 방향을 향해서 걸음을 내디뎠다.
“아티야, 뭐 하는 거예요? 당장 이쪽으로 와요!”
“제 걱정은 마세요. 전 괜찮으니까요.”
“그게 무슨….”
이 정도 바람에 휩쓸리면 어떻게 될지 몰라서 저러나?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구름의 모양마저 바꿔 버리는 거센 바람 속에서도 그녀는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다.
하, 여주인공에게만 상냥한 더러운 세상 같으니라고.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성스러운 방울에 대한 설명에는 이런 자연재해가 일어난다는 것과 여주인공이 저렇게 막 나간다는 내용은 일절 적혀 있지 않았다.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든 납득해 보려 했지만 곧 포기했다. 이미 알고 있던 내용과 많은 부분이 달라진 이상,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그럴 바에는 이 바람이 지나간 뒤의 일을 생각하고 대비하는 것이 훨씬 건설적이었다.
“그웨니르 영애, 무사하십니까!”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는 바람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이티엘을 붙드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힘차게 고개를 돌렸다. 외침이 들려온 곳에는 린든과 단테가 서 있었다.
“브누아 영식! 단테!”
분위기가 참 무섭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지난 게 아닌데도 10년 만에 본 것처럼 반갑게 느껴지는 걸 보면.
마법 결계를 친 것인지 단테와 린든 주위에는 바람이 하나도 닿지 않았다.
우리 쪽을 향해 걸어오는 단테는 무척이나 여유로워서 K민족으로 살던 시절의 피가 끓어올랐다.
“도와주러 왔으면 좀 빨리빨리 움직이는 게 어때요?”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아직 버틸 만한 모양이군.”
저 인간이 진짜!
나는 있는 힘껏 눈에 힘을 줬다.
가뜩이나 팔 힘이 없어 버티는 게 고작인 사람한테 뭐 하는 거야? 싸우자는 거야?
잠시나마 아는 얼굴을 봤다고 안도한 내가 바보 같았다. 왜 그렇게 어르신들께서 ‘모두 도둑놈이여!’라고 했는지 구구절절 이해가 갔다.
아무리 호감도가 차고 넘쳐도 세상엔 믿을 놈은 없는 법이었다.
한편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던 단테는 무표정한 얼굴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흘리더니 곧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사방에서 불어닥치던 바람이 고요해졌다.
이리저리 나부끼던 머리카락은 찰나의 자유가 좋았던지 가르마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헝클어진 채 내려앉았다.
하, 거지 같긴.
“왜 이렇게 늦게 와요?”
나는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물었다. 모발이 너무 가늘어 정리하는 데도 한세월이다.
“추적 결과에 대한 연락을 받느라고 늦었다.”
추적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부모님의 정원에 있던 흉흉한 식물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일주일 정도 걸릴 거라고 하더니 딱 그 정도 걸린 셈이었다.
어차피 금방 바람이 잠잠해질 것 같지도 않으니 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그래서 범인은 누구예요?”
단단히 벼르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단테는 불쑥 손을 내놨다.
‘뭐지, 잡으라는 건가?’
혼란이 온 것도 잠시, 단테의 손바닥에서 하얀 구체가 떠올랐다. 밀려오던 민망한 마음은 그 안에 비친 인물을 보는 순간 짜증으로 바뀌었다.
구체에 비친 것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분홍빛 머리카락의 천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