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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97)화 (97/122)

제97화. 17장. 신과의 만남 (2)

이어지는 생각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기억을 잃고 시간을 반복해도 여주인공이 아닌 엑스트라로 살고 싶었다. 그래야 눈곱만큼의 욜로라도 해 볼 거 아냐.

“에이브.”

내가 다시금 탈주 의지를 다지는 사이, 아티야는 어느새 에이브에게 다가갔다.

“아티야….”

에이브는 애절하게 아티야를 불렀다. 눈동자에 부푼 기대감이 어렸던 것도 잠시, 언제 그랬냐는 듯 광기에 가까운 빛이 번들거렸다.

“제발 다시 생각해, 아티야! 지금을 놓치면 넌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할지도 몰라. 이대로 세이딘 그웨니르를 네 자리에 두는 것이 훨씬…!”

“정말 자유가 있기는 해?”

고요하게 떨어지는 아티야의 물음이 서늘하게 귓가를 스쳤다.

갈대처럼 떨리는 황금빛 눈동자와 마주친 아티야가 담담히 말을 이어 갔다.

“세이딘 덕에 지긋지긋한 상황에서 벗어난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렇다 해서 완전한 자유인 것도 아니지.”

“아티야? 그게 무슨….”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어, 에이브?”

에이브는 이제 온몸을 떨고 있었다. 그는 앞으로 돌아올 말을 두려워했다.

그렇다 해서 아티야가 에이브의 형편을 헤아린 것은 아니었다.

“레이프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이상, 시간은 계속 반복될 거야.”

“아티야!”

절망으로 가득한 에이브의 외침이 퍼졌다.

그 기분이 어떠한지와 별개로 나는 복잡한 마음이었다.

‘아니, 그건 당연한 거잖아…?’

애초에 레이프를 봉인하기 위해 멈춘 시간이었다. 그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 이상, 여주인공 자리에 누가 있든 시간이 도는 건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걸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숨긴 것처럼 구는 에이브를 보고 있노라니 한심함이 암반수처럼 솟아났다.

‘사실 천족은 뇌가 청순해야 되는 게 아닐까?’

에이브만 보고 천족을 판단하면 안 됐지만 지금까지의 행적 하나하나가 너무도 강렬했기 때문에 다른 천족을 보게 된다 해도 그다지 마음이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미안, 에이브. 날 생각해 주는 건 고맙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딱 잘라 의사를 전한 아티야는 에이브에게서 몸을 돌렸다.

충격으로 물든 황금빛 눈동자가 끈질기게 따라붙었지만, 그녀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 대신 아티야는 나를 향해 깊이 사죄했다.

“미안해요, 세이딘. 너무 늦었을지 모르지만…. 이것밖에 할 말이 없네요.”

솔직하게 괜찮다고 할 수는 없었다. 아티야의 모호한 태도로 인해 실망한 건 변함없었으니까.

그러나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내가 그녀였어도 입장을 확실히 하긴 어려웠을 것이라는 걸 알기에.

생각을 정리한 나는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부탁 좀 할게요.”

짙은 미안함을 드러내던 아티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뭐든 말해 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할게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답니다.

나는 곧장 작은 방울을 꺼냈다. 흠 없이 맑은 은빛 방울은 살짝 흔들린 것만으로도 맑은 소리를 냈다.

“이걸 좀 흔들어 줘야겠어요, 아티야.”

“그건…!”

무엇이든 해 줄 거라는 의지를 태우던 아티야는 방울을 보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나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떨떠름하면서도 물음을 던졌다.

“이게 뭔지 알아요?”

아티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갑고도 다행인 대답이었다. 안 그래도 이걸 어떻게 설명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레이프와 이티엘이었다. 일이 이렇게 순조롭게 흘러가리라곤 생각하지 못했기에 성스러운 방울에 대해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이딘, 네가 어떻게 그걸 갖고 있어?”

어라?

나는 놀란 다람쥐처럼 눈을 깜박였다.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성스러운 방울은 오래전에 사라진 걸로 알고 있었는데….”

백번 양보해서 레이프가 아는 것은 그렇다 치자. 이티엘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

너무 놀라 말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아티야의 설명이 이어졌다.

“성스러운 방울은 원래 신의 계시와 신탁을 받을 때 사용하던 것이에요. 하지만 레이프를 봉인할 때 자취를 감추었어요.”

궁금증이 해소된 건 좋은데 이제 네 차례라는 듯 조용히 바라보는 시선들이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있는 그대로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던지라 나는 한껏 진지한 투로 대답했다.

“비밀이에요.”

“…….”

“…….”

“…….”

바라보는 세 명의 시선이 착 가라앉았다. 역시 이것만으로는 역부족인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네.’

어차피 말로 해서 통할 건 아니었으니 이럴 바에는 말없이 파격적인 행동으로 입을 다물게 하는 수밖에.

나는 부끄러움이 밀려오는 것을 참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쩐지 조금 떨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착각이라 생각하며 힘차게 한쪽 눈을 깜박였다.

찡긋!

침묵으로 가득한 공기에 차가움이 더해졌다.

본디 윙크는 날 쳐다보고 있는 저 사람들만큼이나 아름답고 예쁘거나 혹은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사람이 아니면 생리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후, 제대로 먹혔네!’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저렇게 굳어 있는 모습을 보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한 보람이 있었다.

‘혹시 모르니 한 번 더 해야겠다.’

나는 이 기세를 몰아 한 번 더 윙크를 했다.

아티야를 비롯한 공략캐들의 표정은 한층 더 굳어 버렸다.

완벽하게 입도 막았겠다, 이제 남은 것은 거두절미하고 아티야에게 방울을 건네는 것뿐이었다.

“그웨니르 영애.”

서슬 퍼런 음성에 등 뒤로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삐거덕거리며 고개를 돌리자 이티엘이 안광을 번뜩이며 나를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너, 너무 과했나?’

오랜만에 보는 이티엘의 압박에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그렇다고 인제 와서 수습하기엔 여러 방면으로 생각해도 분위기만 더 악화시킬 뿐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호감도가 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무조건 미안하다고 해야지.’

그렇게 지긋지긋했던 호감도가 이렇게 고마워질 줄이야.

마음을 정한 것과 동시에 이티엘의 입이 천천히 움직였다.

지금이야!

“그런 유혹은 어디서 배운 거지?” 

“죄송합니다, 폐하!”

필사적인 사과와 동시에 날아든 물음은 절로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네?”

“방금 전, 영애가 한 눈 깜박임 말이다.”

내 귀가 잘못된 건 아니었는지 이어지는 설명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설마 자각이 없는 건가?”

“…….”

어떤 자각인진 몰라도 불쾌감을 조성했다는 자각 정도는 있는데요.

마음이 짜게 식어 가는 것도 잠시, 이티엘의 콩깍지가 극심해서 다행으로 여겼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을 느낄지언정 어이없고 황당한 게 훨씬 나았으니까.

아무 데서나 윙크를 하지 말라는 이티엘의 당부를 한 귀로 흘리며 레이프를 살폈다.

두 번째로 호감도가 높은 이티엘이 저러는데 가장 높은 호감도를 가진 그라고 해서 별반 다르진 않을 터였다.

…그랬을 텐데.

“레이프?”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나온 물음을 따라 눈이 깜박였다. 레이프는 커다란 곰돌이 인형 탈을 쓰고 있었다.

‘대체 왜?’

내 윙크가 보기 힘들었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렇게 노골적으로 시선을 차단하려는 모습은 미안해지기보다는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싫었으면 차라리 정색하고 화를 내지?’

참을 수 없는 건 이다음이었다.

“왜 그래, 세이딘?”

인형 탈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했다. 그 덕에 머릿속을 떠다니던 물음표는 팝콘처럼 수를 늘렸다.

‘몰라서 묻는 건가? 진짜로?’

자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아니라는 결론이었다.

나는 애써 입가를 끌어 올렸다. 이래서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질문만 오가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니 행동을 하는 수밖에.

곧장 레이프에게 다가가 양손으로 인형 탈을 우악스럽게 잡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레이프의 외침이 먹먹하게 울려 퍼졌다.

“세, 세이딘!?”

“됐고, 이거부터 벗고 보자.”

“진정해, 세이딘! 일단 놓고 대화를……!”

“대화? 좋아, 그러니까 이거부터 벗어! 누가 이런 걸 쓰고 대화를 해?!”

“세이딘, 제발…!”

세상에, 레이프에게 ‘제발’이라는 말을 들을 줄이야.

평소라면 여유가 넘쳐흐르다 못해 능글맞았던 인간이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구는 건 처음이다 보니 한편으로는 신기하면서도 오기가 생겼다.

한참 동안 이어지던 실랑이 끝에 나는 결국 인형 탈을 벗겨 내는 데 성공했다.

“됐다!”

전리품을 얻은 장군이라도 되는 것처럼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것도 잠시, 짙은 회의감이 등 뒤를 덮쳤다.

이게 뭐라고 좋아하고 있는 거람?

나는 민망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괜히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그, 뭐야.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 원래 대화는 상대의 얼굴을 보고 하는 게 기본이잖….”

의기양양하게 한마디를 늘어놓던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살짝 고개를 돌린 레이프의 귓가가 빨갰다. 그것도 타 버린 것처럼 검게.

문득 원래 세계에서 인형 탈 알바를 하던 시절이 떠올라 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나야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랬다고 하지만 레이프는 아니었다.

또다시 밀려오는 짜증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말을 이었다.

“차라리 불쾌하면 불쾌하다고 말을 해. 그런 걸 뒤집어쓰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하아, 세이딘….”

레이프의 탄식은 지하수를 터뜨릴 수 있을 정도로 깊었다.

어떻게든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던 호박빛 눈동자가 힐끗 나를 향했다. 아까는 몰랐는데 귀만큼은 아니더라도 얼굴 또한 옅게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 X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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