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96)화 (96/122)

제96화. 17장. 신과의 만남 (1)

내 예상이 맞았는지 아티야는 어깨를 움찔거렸다. 맞잡은 두 손이 바르르 떨렸다.

누군가에게는 안쓰러울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지 않았다.

“…레이프와 같은 말을 하시네요.”

한참 뒤에 돌아온 아티야의 대답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레이프의 이름도 거슬렸지만, 그보다도 신경이 쓰이는 건 그 뒷말이었다.

슬그머니 레이프를 쳐다보자, 그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사실이야. 네가 아니었으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게 무슨….”

“…네가 힘들어했잖아.”

조금 고민하는 듯 대답하는 레이프를 보며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걸 생각했냐고 쏘아주고 싶었지만 입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아득히 멀어지는 정신과 달리, 가슴은 들쑥날쑥 제멋대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묘하게 안도 같은 것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왜 이러지?’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생소한 반응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 일이 일단락되는 대로 무조건 의원부터 찾아가야겠어.’

속으로 굳은 다짐을 다지며 레이프의 말을 적당히 얼버무렸다.

“뭐, 그건 그렇다 치자.”

“너무해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나는 살짝 레이프를 쏘아본 뒤, 아티야를 바라보았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에이브를 풀어 달라는 말은 들어줄 수 없어요.”

사실 그 외의 말도 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일단 가장 중요한 건 이것이기에 선을 딱 그었다.

다행히 아티야도 별다른 불만이 없는 모양이었다.

“제가 무슨 염치로 그런 부탁을 하겠어요. 세이딘이 원하는 대로 하세요.”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라도 말해 주니 참 다행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가운데, 당사자인 에이브만큼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티야, 어떻게…!”

자신이 그렇게 아끼고 지키려 하던 아티야에게 외면당했으니 충격이 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제 그만하자, 에이브.”

조용히 울려 퍼지는 아티야의 말에 에이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얼굴은 충격과 실망,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감정으로 뒤범벅이었다.

아티야는 수심 가득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나 때문에 관계없는 사람이 고통받는 건 볼 수 없어.”

나는 눈을 크게 뜬 채로 아티야를 보았다. 의외였다. 내게 취한 행동과는 별개로 그녀가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길 원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의외인가요?”

내 생각을 읽었는지 아티야는 옅은 미소를 띠었다.

하하, 씁쓸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게 다 개떡같이 표정 관리를 못 하는 내 탓인걸.

나는 이 모든 일이 끝나는 대로 연극이라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생각을 덜 읽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잘 생각해, 아티야!”

아티야의 설명이 더 이어지려 할 때였다.

나는 얼굴을 구겼다. 전의를 상실했던 에이브는 언제 그랬냐는 듯 열을 올리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입을 막아?’

“시끄러운데 조용히 시킬까?”

정확히 내 생각과 일치한 레이프의 물음에 무조건 연극을 배우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나는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달싹였다.

“기다려, 레이프!”

하지만 아티야가 한발 빨랐다.

내가 놀라서 눈을 깜박이는 사이, 그녀는 서둘러 말을 이어 갔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에이브와 대화할 수 있게 해 줘. 부탁해!”

‘아, 또다.’

알 수 없는 술렁임이 가슴속을 헤집었다. 불안한 듯하면서도 불쾌한 감각이었다.

나는 급격하게 가라앉는 기분을 기민하게 붙들었다. 중요한 순간을 감정에 휘둘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귓가에 스며든 목소리는 꽉 막힌 듯 답답했던 내 속을 청량하게 뚫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당황스러움이 역력한 아티야의 표정이 들어왔다. 그녀를 한 번 담은 시선은 자연스레 레이프에게로 움직였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물어본 건 세이딘이지 네가 아니야.”

1절만 해도 충분한 것을 온 맘 다해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 레이프는 곧장 나를 보았다. 냉랭한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막 피어난 꽃처럼 달큼한 미소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세이딘?”

고작 의견을 묻는 한마디였다. 그런데도 늪처럼 가라앉았던 마음이 감쪽같이 원래의 상태를 되찾았다.

‘정말 이상하단 말이야….’

지금껏 괜찮다가 갑자기 이런 반응이 나타나게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깊이 생각하지 않기 위해 가볍게 머리를 젓자, 봄날처럼 따뜻했던 레이프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굳어 버렸다.

“세이딘? 설마 또 어디가 안 좋은 건….”

“조금 두통이 있는 정도야. 일단은 뭐, 괜찮지 않을까?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조용히 시켜도 되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 봤는데 먹힐지 모르겠네.

더 파고들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던 중, 다행히도 레이프는 더 묻지 않았다. 아니면 더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을 거라는 걸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내 아가씨가 그렇다니 원하는 대로 해 보도록 해.”

레이프의 허락에 반응한 것은 아티야가 아니었다.

“흘려들을 수 없군. 어째서 그웨니르 영애가 네 아가씨라는 거지, 데스티니?”

‘또 시작이네.’

머리가 지끈거린 것도 잠시, 이티엘의 집착 모드였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런 경험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번이면 족했다.

“자자자, 진정합시다!”

결론을 내렸을 때는 나는 이미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든 후였다. 세상에 얼마나 싫으면 몸이 먼저 반응할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영애는 어떻게 생각하나?”

왜 갑자기 나한테 화살이 날아오는데요?

아니, 적어도 무슨 내용인지는 알려 줘야 대답을 하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나의 아가씨’라는 호칭에 대해서 말이야.”

“…….”

어쩌지, 듣고 나니 대답하기가 더 어려워졌네?

물론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나의 아가씨라니, 땅속으로 숨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오글거리고 부끄럽다.

그러나 이티엘은 싫어할 거란 확신에 찬 시선을, 레이프는 기대로 가득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여기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 주는 건 집착 모드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생각할수록 화나네?’

머리를 굴리면 굴릴수록 난감한 마음보다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저놈들이 공략캐들 중 호감도 1, 2위를 다투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나와 관련된 신경전쯤은 얼마든지 벌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내가 눈치를 봐야 해?’

나야 엮이고 싶지 않아서라고 하지만 그들은 잘 보여도 시원찮은 입장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코앞에 중요한 기회가 있었다.

잘될지에 대한 여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시도는 고사하고 말조차 꺼내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건 안 돼!’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흘러가자, 입이 절로 움직였다.

“생각이야 있죠.”

언뜻 듣기엔 오후 햇살처럼 밝은 물음 속에는 가시가 가득 돋쳐 있었다.

“근데 그런 게 지금 중요한가요?”

나와 얼굴을 마주한 이티엘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럴 만도 했다. 내가 생각해도 상당히 살벌한 미소 같거든.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심정으로 뚫어지라 쳐다봤더니 이티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쩐지 조금 시무룩해진 것 같기도 하지만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또로롱

[이티엘의 호감도가 떨어졌습니다!]

[데스티니의 호감도가 올라갔습니다!]

이제는 그리 놀랍지도 않은 알림음과 함께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정보들이 눈앞에 주르륵 늘어섰다.

아니나 다를까 레이프는 무척이나 기쁜 표정이었다. 먼저 이티엘에게 일침을 가했으니 그렇게 보였을 법도 했다.

하지만 레이프는 몰랐다.

다음 차례는 자신이라는 것을.

“뭘 좋다고 웃고 있어? 너도 똑같아, 데스티니.”

가차 없이 날아간 비난에 승리에 찬 미소를 감추지 않던 레이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는 왜?”

“몰라서 물어?”

나는 눈을 부릅떴다.

어떤 의미에선 내 계획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네가 더 나빠!

지금껏 여러 가지 이유로 눈치를 봐 온 탓인지 한번 터져 버린 깊은 짜증과 분노는 두려울 것이 없게 만들었다.

레이프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부리부리한 내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잠잠해졌다.

‘진작 이렇게 할걸.’

아니, 그 전에 알아서 조용히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답답함을 깊은 한숨으로 털어 버린 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아티야에게 몸을 돌렸다.

“자, 이제 좀 조용해졌으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세….”

아티야와 시선을 마주한 나는 하던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그녀는 영 시원찮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긴 또 왜 이래?’

실수라도 한 건가 싶어 흘러간 말들을 다시금 곱씹어 봤지만 마땅히 문제가 될 만한 것들은 없었다.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하는 걸까 고민하는 사이,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아티야였다.

“많은 것이…. 달라졌군요.”

“네…?”

“아니에요.”

아티야는 짧은 대답과 함께 자조 어린 미소를 떠올렸다.

‘참 어렵다, 이 인간들….’

여주인공까지 이러는 걸 보면 하도 시간을 되돌린 탓에 단체로 주어와 설명이 부족한 사람들이 되어 버린 것이 분명했다.

‘얼른 도망가야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