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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95)화 (95/122)

제95화. 16장. 천계에 흑염룡이 웬 말이요 (5)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말할 거면 좀 더 명확하게 말할 것이지 덕분에 더 아리송해졌다.

내 심기가 썩 좋지 않음을 깨달은 레이프는 곧장 설명을 덧붙였다.

“에이브가 대동한 건 천족의 모습을 한 정령이야.”

“정령? 저 천족들이?”

“그래, 자세한 건 나도 들어 봐야 알 것 같지만 말이야.”

귓가에 쏙쏙 박히는 정중한 대답과 달리,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내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더 공격하려 드는 자가 없음을 확인한 레이프는 천천히 땅에 착지했다.

허리를 감쌌던 온기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구름 특유의 폭신한 감촉이 발을 감쌌다.

“그래서, 정확히는 뭐야?”

레이프의 물음에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던 에이브는 구겨진 종이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내가 그걸 말할 것 같아?”

“유감스럽네, 싫어도 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걸 말해 줘야 알아듣나?”

레이프의 눈동자가 사냥감의 목을 죄는 맹수처럼 첨예하게 번뜩였다. 에이브의 어깨가 눈에 띄게 바르르 떨렸다. 허다하게 많았던 그의 편은 이제 서너 명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에이브는 정신없이 굴러가는 눈동자만큼이나 머리를 굴렸다. 레이프는 일말의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몰니르를 휘둘렀다.

콰과광!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뇌성과 함께 몰니르에서 흘러나온 전기가 에이브의 주위를 둘러쌌다.

“크윽…!”

더 이상 주위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한 에이브는 이제 하얗게 질려 버렸다.

“이제야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겠네.”

레이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투였지만 에이브를 향한 시선은 여전히 날카롭기 짝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면 그대로 베어 버리겠다.”

어느새 다가온 이티엘이 에이브를 향해 찬란한 검을 겨누었다.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마나는 고요했지만, 닿는 순간 모든 것을 얼려 버릴 것처럼 날카로웠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짜던 에이브는 결국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방금 전 천족인 척하던 것들은 뭐지? 정령?” 

“…맞아.”

“빛의 정령인가?”

“…….”

침묵을 가장한 긍정에 레이프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저렇게 불쾌한 표정을 짓는지 의문이었던 것도 잠시, 이어진 설명을 통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빛의 정령은 정령왕이 없는 대신 천족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정령이야. 방금 전 이 자리를 메웠던 정령들의 상태를 봐서는 조만간 천족이 될 예정이었을 거야. 이놈의 명령을 따른 탓에 그 기회는 날아간 것 같지만 말이야.”

신랄한 설명 속에서도 에이브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뻔뻔하게 대꾸했다.

“그게 뭐가 어때서? 어차피 그 아이들은 천족이 될 거야. 조금 늦어진다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뭐 이런 뻔뻔한….”

“…천족이 맞나?”

황당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이티엘 또한 한마디를 거들었다.

갈수록 밑바닥을 찍는 에이브의 행동에 좀처럼 불쾌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공략캐들과 엮이는 것이 지긋지긋하다 여겼지만, 지금은 그 이상으로 저놈과 마주하는 것이 끔찍하게 싫을 따름이었다.

좀처럼 얼굴을 펴지 못하는 가운데, 레이프가 에이브를 향해 몰니르를 겨눴다.

“궁금한 건 해소했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아티야를 어디에 숨겼지?”

“…하! 내가 그걸 말할 것 같아?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해 너희들을 천계로 유인한 마당에?”

이질적인 빛으로 번뜩이는 황금빛 눈동자를 앞에 두고도 레이프는 조금도 위축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단지 입가를 길게 늘어뜨릴 뿐이었다.

“그렇다는 건 여기에 있는 건 확실하다는 거네?”

나른하고 서늘한 질문에 에이브는 움찔거렸다.

레이프가 짐작한 것이 무엇인진 모르지만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저놈이 이상한 곳에서 정직하다는 점이었다.

원하는 대답을 전부 끌어낸 레이프는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그를 보며 가뜩이나 새하얀 에이브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려 버렸다.

“머, 멈춰…!”

인제 와서 그렇게 말해 봐야 레이프는 멈출 위인이 아니었다.

“움직이지 마라, 천족.”

이티엘은 서둘러 그를 따라가려는 에이브에게 더욱 바싹 검을 들이댔다. 허둥거리던 움직임은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한편 레이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말은 천계라고 했지만 푸른 하늘과 구름이 끝도 없이 펼쳐진 곳이었다.

에이브 외의 천족도 보지 못한 마당에 여기서 아티야를 찾기란 사막에서 바늘 찾기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레이프는 주위를 살피는 걸 멈추지 않았다.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레이프는 짙은 미소를 드러냈다.

찾다니, 뭘?

자연스럽게 의문이 고개를 쳐드는 것과 동시에 레이프가 근처에 뜬 구름을 톡톡 건드렸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곧장 몰니르를 휘둘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에이브의 외침이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안 돼!”

커다란 전격이 구름을 갈랐다.

그리고 이벤트의 달성을 알리는 알림음이 이어졌다.

눈부신 빛에 눈을 찌푸린 것도 잠시, 점차 사그라드는 빛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건….”

모든 구름이 사라진 그곳에는 사람의 방처럼 꾸며진 새장이 있었다. 그 안에는 황금빛 철창을 붙든 채로 눈을 커다랗게 뜬 아티야가 서 있었다.

“…레이, 프?”

너무 놀란 것인지 아티야는 원래라면 몰라야 할 레이프의 이름을 읊조렸다.

푸른 눈동자 위로 수많은 감정들이 파문을 일으켰다.

“오랜만이네, 아티야.”

레이프의 입에서 담담한 인사가 흘러나왔다. 아티야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 또한 알 수 없는 빛으로 일렁였다.

‘뭐지…?’

그렇게 고대하던 여주인공과 공략캐의 조우였다. 이티엘과 달리, 레이프는 어느 정도 지난날들을 기억하는 눈치였으니 그때의 마음들을 떠올리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데스티니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에 누군가 묵직한 돌을 얹어 놓은 것처럼 무거운 마음이었다.

‘대체 왜…?’

머릿속에 팝콘처럼 물음표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혼란스러움이 터진 댐처럼 밀려들어 와 시야가 어지러웠다.

“그웨니르 영애!”

단단한 손이 내 어깨를 감쌌다. 이티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세이딘…!”

레이프의 외침 또한 들었지만 나는 애써 모른 척했다. 이유를 모르는 이상, 쳐다봐서 괜히 긁어 부스럼을 내고 싶지 않았다.

“전 괜찮아요. 우선 이놈부터 어떻게 하도록 하죠.”

일시적인 문제였는지 어지러움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어깨를 잡은 손을 가볍게 톡톡 두들겼다. 이티엘은 내키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손을 뗐다.

뒤통수로 느껴지는 짙은 아쉬움을 뒤로하며 마법의 가방을 뒤졌다. 이런 상황이 있을지 몰라 챙긴 것이 있었다.

“…대체 그건 왜 준비한 건가?”

나를 향한 걱정을 드러내면서도 조용히 지켜보던 이티엘이 황당함을 드러냈다.

마법의 가방에서 꺼낸 것은 로프였다. 이벤트를 통해 얻게 된 랜덤 마도구 중 하나로 무려 미스릴을 녹여서 만든 것이었다.

드래곤을 생포하는 용도로 만들어졌다고 쓰여 있었으니 이거라면 에이브도 신성력을 쓰기는 어려울 터였다.

“다 이런 때를 대비해서 준비한 거죠. 폐하, 이놈이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조금만 더 압박을 가해 주시겠어요?”

이티엘은 떨떠름해하면서도 순순히 내 말을 따랐다.

검날이 바싹 목에 닿는 것을 느낀 에이브는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린 채 전의를 상실했다.

나는 그 틈을 타서 재빨리 그를 묶었다. 혹시라도 꼼지락거려 로프가 풀리지 않도록 꼼꼼하게 묶었다.

“휴, 다 했다!”

누군가를 묶는 건 처음이어서 다소 서툰 감은 있었지만 그래도 썩 나쁘지 않은 모양새였다.

“세이딘, 괜찮아?”

어느새 이쪽을 향해 다가온 레이프는 아티야와 함께였다.

뭐라고 대답할 틈도 없이 바싹 다가온 그는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 덕에 이티엘이 매섭게 노려봐 뒤통수가 뻥뻥 뚫릴 것 같았다.

사실 그보다 아티야가 버젓이 있는데도 나한테 쏠리는 관심이 부담스러웠다. 특히 레이프에게는 더욱이.

“레이프, 괜찮으니까 이쯤에서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아니, 난 안 괜찮아.”

이놈이 뭐라는 거야?

“내가 괜찮다니까?”

“네가 휘청거리는 모습 직접 봤어?”

“…뭐?”

예상도 못 한 질문에 갑자기 말문이 턱 막혔다.

레이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지. 보지 못했으면 아무 말도 하지 마. 심각했으니까.”

“…….”

이게 무슨 거지 같은 말이야?

기적의 논리를 펼친 레이프는 내가 황당해서 말이 없어진 틈을 타 이곳저곳 살폈다.

“이상 없네. 다행이야.”

아까부터 그렇게 말했잖아??

나는 짙은 안도를 내비치는 레이프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사실 이놈은 날 걱정하는 척하면서 거하게 엿을 먹이려는 것이 아닐까?

슬그머니 고개를 쳐든 의심이 확신으로 변해 가려고 할 때였다.

“저기, 세이딘….”

망설임이 가득한 목소리에 치솟던 혈압이 단숨에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래, 혈압이 이렇게 오락가락하는데 어지럽지 않은 게 이상한 거지.

스스로의 몸 상태를 누구보다 빠르게 받아들인 나는 작은 심호흡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햇살처럼 밝았을 아티야는 한없이 위축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내 눈치를 보며 잘게 떨리는 푸른 눈동자를 보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대충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이 갔다.

결론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빠르게 입이 움직였다.

“고맙다는 인사는 필요 없어요. 구해 준 건 데스티니니까요. 그러니 정 고마우면 데스티니에게 하도록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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