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16장. 천계에 흑염룡이 웬 말이요 (4)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명확하게 알아들었다.
“어?”
레이프의 말을 따르려던 찰나, 난데없이 나타난 아기 머리만 한 불이 천족을 향해 질주했다.
“으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내 발을 잡으려 손을 뻗던 천족이 저 밑으로 추락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머릿속에 물음표가 줄줄이 떠올랐다.
‘뭐야? 데스티니를 던지라며? 설마 눈속임이었던 건가?’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데스티니를 던지기도 전에 날아간 불덩이를 떠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눈속임은 아니었다.
“나 아니야.”
레이프는 나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칼같이 부정했다. 그리고 말없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여기 너 말고 마법 쓸 수 있는 사람이…. 아.”
레이프의 팔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며 말하던 나는 그 끝이 향한 곳을 보자마자 납득하고 말았다.
내 어깨 근처에서 반짝이는 사파이어 브로치는 지난번 이티엘이 사 준 것이었다. 거기에는 모르는 사람이 가까이 다가올 경우, 파이어볼을 발사하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사제복에 보석이 웬 말이냐 싶었지만 망토를 여미는 용도 정도로는 사용하는 걸 봤기에 달아 두었다. 의심은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지만, 위험은 내가 가진 힘으로는 역부족이었으니까.
‘하도 정신없어서 브로치를 잊고 있었지만….’
어찌 됐건 다행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마냥 안도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세이딘, 밑에서 한 놈이 더 오는데.”
레이프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망설임 없이 데스티니를 집어던졌다. 아슬아슬하게 발밑에 따라붙던 천족은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나가떨어졌다.
‘이 바이올린은 대체 뭐로 만든 걸까…?’
이쯤 되면 바이올린을 나무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그것과 별개로 무언가를 해치웠다는 성취감은 상당해서 입가가 절로 슬금슬금 올라갔다. 왜 진작 이렇게 사용할 생각을 못 했나 몰라.
“잘했어, 세이딘.”
레이프의 칭찬은 데스티니의 새로운 용도에 만족스러워하던 중에 날아들었다.
그는 내가 뿌듯해하는 모습들을 다 지켜본 것인지 애써 웃음을 참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 어떡할 거야?”
괜히 밀려온 부끄러움에 애꿎은 목을 가다듬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한 명 정도는 떨쳐 냈지만 우리 뒤를 추격하는 천족들은 여전히 많았다.
근처에 다가오면 브로치가 발동하거나 또다시 데스티니를 불러내 던질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 근본적인 해결이 되는 건 아니었다.
“이제 슬슬 이쯤에서 멈출 셈이었어.”
레이프는 슬그머니 입가를 끌어 올렸다. 무엇을 꾸밀 생각이냐 묻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쏙 들어가게 만들 정도로 꿍꿍이가 가득한 표정이었다.
하늘 높이 올라가던 레이프는 느닷없이 멈춰 섰다.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나로서는 그저 멀뚱히 흘러가는 상황을 바라볼 뿐이었다.
“세이딘, 몰니르를 빌려줄래?”
“몰니르?”
“응, 챙겨 왔잖아. 아니야?”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한 레이프의 반응에 나는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여튼 눈치 하나만큼은 참 귀신같다니까.
레이프의 말대로 무기들을 챙기지 않았지만, 마법 및 효과가 걸린 무기들은 예외적으로 챙겼다.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마법의 가방을 뒤적였다. 작은 가방 입구에서 드러난 커다란 망치는 금방이라도 번개를 칠 것처럼 스파크를 일으켰다.
“자.”
몰니르를 건네받은 레이프는 이리저리 휘둘러 보았다. 이제 천족들의 추적은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일단은 이 정도로 충분하겠지.”
이런 와중에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레이프는 살짝 호흡을 가다듬었다.
“레이프, 무슨 짓을 할 셈이야?”
도무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가늠할 수 없던 나는 결국 물음을 던졌다.
생각에 잠겼던 레이프는 나를 보더니 매혹적인 미소를 피워 냈다.
“보면 알 거야.”
속 시원한 대답을 주지 않은 레이프는 아래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자리에 멈춰 선 것을 본 천족들은 바람처럼 쫓아오다가도 멈칫거리기를 반복했다.
데스티니의 마법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긴 해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거라는 정도의 사고는 가능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레이프의 행동은 그들이 상황 파악을 마치는 것보다 더 빨랐다.
콰과광!!
허공을 스친 몰니르에서 엄청난 양의 번개가 쏟아졌다.
사방으로 퍼져 나간 번쩍임의 대부분은 우리를 쫓아오던 천족들에게 날아갔다.
“으아아악!”
“안 돼…!”
번개의 여파로 인해 하얀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된 날개가 하나둘 땅으로 떨어졌다.
그로 인해 쫓아오던 천족의 수는 한 손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분명… 기절시킬 정도의 위력이라고 적혀 있지 않았나?’
우수수 떨어지는 천족들을 보며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껏 시스템이 아이템에 대한 설명 오류를 보인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몰니르가 이 정도의 위력을 드러낸 데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어떻게 한 거야?”
나는 자연스럽게 레이프를 올려다보았다.
몰니르가 저런 위력을 갖게 된 데는 그의 힘이 한몫했을 터였다.
레이프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몰니르를 매개로 힘을 증폭시킨 것뿐이야. 완전히 봉인이 풀리지 않았으니 되도록이면 힘 소모를 최소화하고 싶어서.”
“그런 것도 가능해?”
“내가 만든 물건인걸. 만약을 대비할 수 있는 건 뭐든 넣어 뒀어.”
나는 얼떨떨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바였다.
느닷없는 번개 공격의 여파는 굉장했다. 데스티니의 연주에 홀려 눈이 돌아갔던 천족들도 곁에 있던 동료들이 하나둘 떨어지는 모습을 봐서 그런지 바싹 긴장한 채로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공격하지 않고 뭐 하는 거야!”
거무스름한 연기 너머로 이 광경을 지켜본 에이브는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남은 천족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보아하니 아래쪽도 이티엘 혼자 무쌍함을 벌여 이곳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차례 상황을 훑은 나는 혀를 끌끌 찼다.
“그렇게 뭐라고 할 거면 본인이 직접 나설 것이지. 무슨….”
애초에 혼자서 당해 낼 재간이 없으니 다른 천족들을 데려왔으면서 저러는 꼴이라니, 매우 같잖았다.
“참 재미있는 천족이야.”
레이프 또한 비슷한 감상을 내뱉었다. 그러나 말과 달리, 에이브를 향한 가늘어진 호박빛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그 먼 곳에서도 시선이 마주친 것인지 눈에 띄게 움찔거리는 에이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둘 쓰러지는 무리를 보니 다시금 제 처지를 상기시킨 모양이었다.
“이제 슬슬 끝내 볼까? 저번처럼 또 사라지면 곤란하니 말이야.”
마치 산책이라도 나갈까, 하는 투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많은 천족들이 쓰러진 건 사실이었지만 그럼에도 남은 천족은 여전히 산처럼 많았다.
완전히 봉인이 풀리지 않은 레이프는 몰니르를 사용해 마나 사용을 최소화했다.
지금까지는 이티엘도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 줬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힘이 부칠 것은 확실했다.
나는 말할 것도 없었다. 가지고 있는 아이템들을 적절히 사용한들 저 많은 수를 상대하는 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꼴이었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세이딘. 날 믿고 지켜보면 돼.”
그럼에도 레이프의 태도는 일말의 그늘 없이 확신으로 가득했다.
딱히 뾰족한 수도 떠오르지 않는 이상, 별수 없었다. 저렇게까지 말하면 원하는 대로 해 줄 수밖에.
“…너무 위험한 짓은 하지 마.”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한 나머지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빈약하기만 했다.
레이프는 그런 나를 향해 활짝 미소 지었다.
“내 아가씨가 원하는 바라면 얼마든지.”
아무렇지도 않게 오글거리는 대답을 내놓는 레이프를 보며 기가 막히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럴 수 있다는 건 확실한 구석이 있어서니까.
나를 향해 매혹적인 눈웃음을 보여 준 레이프는 곧장 몰니르를 들어 올렸다.
푸르렀던 하늘에는 하나둘 구름이 모이기 시작하더니 점점 어두운 색으로 물들었다.
쿠르르릉!!
새카맣게 물든 구름에서 번쩍임과 함께 소리가 들려왔다.
크고 작게 번쩍이는 빛들은 덩치를 키우더니 레이프가 팔을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콰과과과광!!!
세상이 멸망하면 이렇지 않을까?
아까보다 훨씬 규모가 큰 천둥 번개를 보며 머릿속에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이제 하늘에는 더 이상 우리를 쫓는 천족은 없었다. 밑에는 여전히 천족들이 있었지만, 무차별적으로 퍼져 나가는 레이프의 공격에 차례차례 쓰러지고 있었다.
봉인된 사람의 힘이라고 하기엔 기가 막힐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신이 경계할 만도 하네….’
이쯤이면 신이 불안해한 것이 결코 이상하지 않았다.
나는 놀라움과 감탄 속에서 상황을 파악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 취한 방법에 대해서는 조금도 동의할 수 없는 건 별개였지만.
천재지변 뺨치는 번개가 한차례 지나간 뒤, 먹구름과 연기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깊게 팬 구름 바닥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쓰러진 천족들뿐이었다.
아니, 그랬을 터였다.
“천족이… 사라졌어…?”
머릿속에 퍼지는 놀라움과 함께 절로 입이 움직였다.
그 말대로였다. 산처럼 쌓였던 천족들이 하나둘 모습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종래에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연기가 나도록 머리를 굴려도 좀처럼 결론을 내릴 수 없던 차에 귀에 물음이 날아들었다.
“궁금해?”
“당연한 걸 물어?”
놀리는 건가 하는 마음에 물음 끝은 자연스레 가시처럼 뾰족해졌다.
그럼에도 레이프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꿍꿍이 가득한 미소를 피워 냈다.
한참을 뜸을 들이던 그는 천천히 해답을 토로했다.
“전부 거짓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