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93)화 (93/122)

제93화. 16장. 천계에 흑염룡이 웬 말이요 (3)

[공통 이벤트 – 흑염룡의 봉인을 풀지 못한 천족]

검은 것들의 정체를 깨달은 것과 동시에 머릿속에 이벤트의 이름이 스쳐 갔다.

“저…, 저…!”

하도 기가 막히다 보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안 그래도 제정신이 아닌 놈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스케일 크게 본격적으로 미쳤을 줄이야.

“미치려면 곱게 미칠 것이지.”

귓가에 스며든 웃음기 어린 감상이 내 심정과 똑 닮아 있었다.

자각 없이 혼잣말이라도 한 걸까 싶어 반사적으로 흠칫 놀랐지만, 옆에서 느껴지는 흉흉한 기운에 안심했다. 내가 아니었다.

레이프는 서늘한 미소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에이브를 향한 시선은 깨진 유리 조각처럼 날카로워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힐 만큼 살벌했다.

이런 시선을 받고도 에이브는 입가를 끌어 올렸다. 믿을 구석이 생겨서 그런지 자신감이 넘쳤다.

“무슨 소리, 나는 지극히 제정신이야. 이상한 건 너희들이지. 아티야를 건들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어.”

“뭐라는 거야, 진짜.”

풍년인 개소리에 절로 비아냥이 흘러나왔다. 게임 루트를 따라가려고 해도 들쑤시고 다닌 놈이 누군데?

마음 같아서는 당장 에이브에게 다가가 헤드록을 걸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현실은 헤드록은커녕 다가가는 순간 인질이 될 것이 뻔했다. 야박한 세상 같으니라고!

‘마법의 바이올린을 켤 줄 알면 뭐 하나. 시비 터는 놈 하나도 제대로 쥐어팰 수도 없는데.’

속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는데 마침내 천족들이 에이브의 주위에 늘어섰다. 그 덕에 푸르렀던 하늘이 거짓말처럼 어둑해졌다.

우후죽순 모인 천족들은 우리를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레이프를 향해서였다.

“설마 했는데 정말이잖아?”

“봉인된 마법사….”

“저자가 어떻게 여기에…?”

“에이브 님, 어떻게 할까요?”

공손한 물음이 오가는 걸 보면 에이브는 천족 사이에서 제법 지위가 있는 모양이었다.

천천히 이쪽을 살피는 눈동자에 이질적인 빛이 번들거렸다.

“여기서 내쫓도록 해.”

“뭐야, 달랑 그것뿐?”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는지 이티엘도 노골적으로 어이없다는 표정을 드러냈다.

“어쩔 수 없어, 저놈도 나랑 비슷한 입장이거든.”

은근한 시선을 던지는 레이프와 마주한 에이브는 입가를 꿈틀거렸다. 아무래도 정곡을 찔린 모양이다.

“…신께서 자비로운 걸 감사히 여기도록 해.”

안쓰러울 정도로 빈약한 변명이 아닐 수 없었다.

‘허세를 부릴 만한 데서 부려야지….’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에이브는 애써 부끄러움을 외면하며 말을 돌렸다.

“뭣들 하는 거지? 저자를 얼른 내쫓도록 해.”

딱딱한 명령에 천족들이 슬금슬금 움직였다. 저마다 무기를 든 그들은 어쩐지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힐끗거리는 시선이 한곳으로 쏠리는 것을 보아 이유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보나 마나 레이프가 원인이었다.

“고매한 천족이 이렇게나 많은데, 봉인된 마법사 한 명을 상대하는 게 많이 꺼려지나 봐?”

기민하게 흐름을 파악한 레이프는 가소로움이 가득한 비웃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한 도발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천족들은 하나같이 걸려들었다.

망설임을 떨친 움직임이 바람처럼 빨라지더니 그들은 순식간에 우리 주위를 에워쌌다.

천족들은 창과 검, 활, 그 외에도 다양한 무기들을 겨누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압박하기 시작했다.

‘아니, 왜 도발을 하는 거야! 나는 어떡하라고?!’

무기를 사용할 줄 모르는 유일한 일반인인 나로서는 이 상황이 그저 울고 싶을 뿐이었다. 원망 가득한 시선을 보내 봤지만, 그런들 레이프는 조금도 꼼짝하지 않았다.

“어디 보자, 쓸 만한 게….”

원망을 해 봐야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안 이상, 내가 할 일은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었다.

아이템 창고를 꼼꼼히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세이딘, 어서 날 잡아.”

뜬금없는 말에 나는 눈을 깜박였다.

흉흉한 표정인 천족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레이프는 무척이나 태연자약했다.

내키지는 않지만 지켜 주려 하는 거겠거니 싶어 냉큼 다가가 팔을 꽉 잡았다. 그러자 레이프의 시선에 당황스러움과 깨달음이 스쳤다.

“내가 아니야, 세이딘.”

뭐가 아니야? 잡으라고 해서 잡았는…,

‘아…!’

마침내 정확한 의미를 알아차린 나는 미간을 구겼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농담이 나와?”

“농담이 아냐.”

그래. 그래 보여서 불안해.

레이프가 진지할수록 내 미간에는 짙은 주름이 파여 갔다. 정신보다 훨씬 어린 몸이라고 좋아했는데 이대로 가다간 20살을 넘기기도 전에 팍 삭아 버릴 것 같은 기분이 전신을 덮었다.

“그럼 계속 그렇게 따끔거리는 채로 있을 거야?”

불쾌함을 동반한 고민 속에서 귀신같이 내 속을 파악한 레이프가 대꾸했다.

안 그래도 모여든 천족들로 인해 신성력 감지 반응이 한층 더 강렬해진 터였다. 게다가 아까부터 닿지 않는 등 쪽이 따끔거리니 신경 쓰이고 긁고 싶어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결국 따끔거림에 패배한 나는 허공에 팔을 뻗었다. 항상 생각하지만 민망하기 짝이 없는 소환 방법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떠 있던 데스티니가 내게로 곧장 날아왔다. 손바닥에 착 감기는 나무의 감촉과 동시에 온몸을 괴롭히던 정전기의 여파가 찬란한 검을 쥐었을 때처럼 감쪽같이 사라졌다.

정말이네…?

“내 말이 맞지?”

레이프는 눈을 휘둥그레 뜬 내게 물음을 던졌다.

분하게도 하나도 틀린 말이 없었던지라 불만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과 별개로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에워싼 천족들이 신기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레이프가 뜬금없는 말을 덧붙였다.

“자, 그럼 연주해.”

“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상황에서 연주를 하라고?

어이를 상실한 나와 달리, 다른 천족들은 그렇지 않았는지 얼굴 위로 경악과 두려움이 스쳐 갔다.

혹시나 해서 바라보자, 레이프는 내 생각을 안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하나부터 열까지 밑져야 본전인 상황이었기에 나는 바이올린을 어깨에 얹었다. 그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끼기기기기기긱!!

현을 타고 흘러나온 음색이 귓가를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오랜만에 듣는 소음에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한동안 안 들어서 굉장히 행복했는데 이렇게 다시 듣게 되니 혈압이 쑥쑥 올라가는구나.

새삼 내 스트레스의 원인이 바이올린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 연주가 굉장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맙소사….”

“이런 소리가 난다고…?”

“우리가 연주할 때도 이런 음색은….”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두려움과 긴장으로 가득했던 천족들의 표정이 햇빛이 닿은 눈처럼 녹아내리더니 어느덧 감동스러움과 행복한 감정으로 바뀌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천족들에게도 데스티니의 위력은 효과적인 모양이었다.

‘이제 어떡하지?’

문제는 이다음이었다.

어찌어찌 천족들이 얌전해진 건 좋았다. 그들에게 이 마법이 먹힌다는 것은 단테보다 약하거나 혹은 이티엘처럼 마법에 관한 저항력이 현저히 떨어진단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뿐이었다. 데스티니의 연주를 들은 이상, 저들은 전부 내게 관심을 보일 것이었다. 여느 다른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끔찍한 상황에 긴장을 하던 중, 누군가가 내 앞으로 나섰다. 밤으로 달려가는 하늘을 연상시키는 짙은 남색 머리카락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머릿속으로 물음표가 혜성처럼 떨어졌다.

“폐하…?”

“그웨니르 영애를 부탁하지, 데스티니.”

검을 쥔 이티엘은 이쪽을 바라보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비장함에 한마디를 하기 위해 입을 달싹였더니 레이프는 나보다 한발 더 빠르게 그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부탁은 필요 없어, 황제. 챙기는 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까.”

레이프는 말을 끝맺자마자 내 허리를 강하게 안았다. 이 또한 무슨 말을 할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데스티니, 이게 무슨…. 으아악!!!”

물음에 대한 답 대신 몸이 허공을 날았다. 이를 시발점으로 발밑에는 각양각색의 빛이 번쩍였고 크고 작은 폭발음과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수라장을 연상시키는 광경에 이티엘과 레이프의 행동을 단번에 납득했다. 그들은 데스티니에 홀린 천족들이 달려들 걸 예상하고 나를 보호한 것이었다.

“…이런 건 좀 빨리 말해 주지?”

“한시가 급해서 어쩔 수가 없었어.”

내 따가운 시선을 받고도 태연한 레이프는 아래쪽을 향해 턱짓을 했다.

그것을 따라 고개를 내리자 연기 속에서 몇몇 천족들이 하얀 날개를 드러냈다. 그들은 아름다운 외모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무섭게 황금빛 눈동자를 번뜩이며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기다려!!”

“아름다운 인간, 부디 다시 한번 연주를…!”

“레이프 유클리드, 여자를 내놔!”

흡사 미라나 좀비를 연상시키는 모습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무슨 일을 저질러도 단단히 저지를 것만 같았다.

‘조금이라도 다가오면 확 밟아 버리겠어.’

나는 데스티니를 꼭 쥐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불쑥 다가올 수도 있으니 여차하면 이걸로 후려칠 생각이었다. 마법의 바이올린의 내구성은 의자를 부술 만큼 단단하니 천족들을 떨치기엔 충분할 터였다.

마음을 다진 채로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세이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나직한 목소리가 일순 현실 감각을 마비시켰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고개를 들자, 레이프가 올곧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주한 그의 얼굴 위로 장난기 다분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던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