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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92)화 (92/122)

제92화. 16장. 천계에 흑염룡이 웬 말이요 (2)

이티엘은 가늘게 뜬 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주장을 펼쳤다.

“아무래도 이것 때문이 아닌가 싶어.”

“그건…….”

이티엘이 보여 준 것은 찬란한 검이었다.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게만 하는 줄 알았더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혹시나 해서 시스템창을 열어 보았더니 마지막에 아주 깨알 같은 글씨로 ‘찬란한 검을 소지 시, 신성력의 여파로부터 자유로워진다.’라고 적혀 있었다.

‘저걸 어떻게 알아채라고!’

활화산처럼 터지려는 반발도 잠시, 나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이놈의 시스템이 내 편이 아니라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는 바였다.

“잠깐 들어 볼게요.”

“원래 영애의 소유였어. 그러니 원하는 대로 하도록 해.”

그러게요, 내 건데 뭘 그렇게 예의를 차렸나 몰라.

스스로가 생각해도 우스운 나머지 피식 웃으며 이티엘이 건넨 검을 받았다. 사방에서 날아들던 찌릿거림은 찬란한 검을 쥐는 순간 단번에 사라졌다.

“미…. 세상에나!”

나는 절로 흘러나오려는 욕설을 황급히 감탄사로 바꾸었다. 그만큼 찬란한 검의 효과는 확실했고 신세계였다.

“효과가 있어 보이는군. 다행이야.”

찬란한 검의 효능에 눈을 반짝이고 있노라니 어느새 이티엘이 흐뭇한 미소를 띤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그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에 머쓱해져서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죄송해요, 폐하. 많이 따끔하시죠?”

여전히 계속되는 공방으로 인해 타닥거리는 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이티엘의 대답은 예상과는 달랐다.

“난 괜찮네. 조금 톡톡거리는 수준일 뿐, 그리 거슬리는 건 아냐.”

“정말요?”

“영애는 내가 이런 걸로 거짓말할 사람으로 보이나?”

“아뇨, 안 그런데요.”

“…그렇게 칼같이 답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소신이 중요하다 생각해서요.”

내가 생각해도 참 청산유수가 아닐 수 없었다. 이티엘 또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넘어갔다.

“단테가 효과 조절을 잘 못해서 그래.”

다른 화제로 넘어가려던 순간, 제삼자의 목소리가 서두를 가로챘다. 레이프였다.

눈이 마주친 그는 호박빛 눈동자를 부드럽게 휘었다. 방금 전까지 공방을 벌였던 사람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단정한 모습이었다. 하다못해 머리라도 흐트러질 법도 한데 레이프의 머리는 물 흐르듯 가지런했다.

‘생각해 보면 마법을 사용한 직후에도 머리가 그다지 흐트러지지 않았던 것 같은….’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애초에 공략캐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버프를 히든 공략캐가 갖고 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는 허탈감을 뒤로 밀어둔 채 물음을 던졌다. 이티엘도 궁금했는지 의아한 시선으로 레이프를 바라보았다.

정작 그는 이런 관심 속에서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간단한 이야기야. 약을 만들 적에 복용하는 대상의 기준을 단테 자신으로 잡은 거지. 그래서 그보다 약한 사람이 복용하면 효과가 배로 따라오는 거고.”

나는 이마를 짚고 싶은 충동이 몰아치는 것을 꾹 참았다. 신전에 오기 전까지 약을 만들어야 했으니 시간이 촉박한 건 이해하는 바였지만, 조금만 더 신경 쓰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왜 그래, 세이딘?”

“아냐, 잠깐 생각 좀 하느라고.”

“돌아가면 뭐라고 한마디 해 줄까?”

“됐어.”

그걸 왜 네가 하니? 내가 해야지.

그리고 이미 마셔 버린 상황에 다시 사용할 것도 아닌 이상 뭐라고 한들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고마워요, 폐하. 잘 사용했어요.”

아쉬움을 뒤로하며 이티엘에게 찬란한 검을 다시 건넸다. 이티엘은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괜찮네, 그웨니르 영애. 보아하니 나보다 그대에게 더 유용한 것 같으니 갖고 있도록 해.”

“아니에요, 제가 가지고 있어 봐야 따끔거림을 막아 주는 정도의 용도인걸요. 폐하가 사용하는 게 맞아요.”

“그웨니르 영애….”

그윽한 붉은 시선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이놈의 시스템에 시달린 지도 어언 반년 이상이다. 이티엘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다가오는지 정도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하면 연애 이벤트 각을 세우는 이티엘을 흘려버릴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였다.

“세이딘의 말이 맞아, 황제.”

점점 좁혀 오는 거리 사이를 비집고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들자 목 언저리에 닿은 상대의 보랏빛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뭐 하는 거지, 데스티니?”

레이프의 등 너머로 들려오는 이티엘의 목소리는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슬그머니 분위기를 잡고 있는데 대뜸 차단당했으니 신경질이 날 만도 했다.

그러나 이티엘이 그러건 말건 난 그저 레이프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어느 정도 적응했다 하더라도 갑자기 발생한 연애 이벤트에 대응하기엔 여러모로 힘든 감이 없잖아 있었으니까.

“내 말이 안 들리나?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물었다.”

서늘한 태도를 보이는 이티엘과 달리, 레이프는 가볍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언뜻 들을 땐 가볍게 느껴졌지만 그 안에는 미미하게나마 날카로움이 섞여 있었다.

그 순간, 빛처럼 확신이 스쳤다.

아, 이 자식은 내가 걱정돼서 그런 게 아니라 이티엘을 견제하려고 한 거구나!

조금씩 차올랐던 뭉클한 마음이 서서히 잠잠해졌다. 그럼 그렇지, 저놈에게 뭘 바라겠어. 잠시나마 고맙게 생각한 내가 바보지.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이티엘과 레이프는 그들만의 눈치게임을 할 뿐이었다.

한참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던 것도 잠시, 레이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말지? 난 나름대로 충고를 한 건데.”

“그웨니르 영애의 앞을 막아서는 게 말인가?”

“부수적인 것을 신경 쓰느라 내 말은 듣지도 못했나 보네. 뭐, 좋아.”

대수롭지 않은 대꾸에 이티엘의 깊은 짜증이 여기까지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수많은 타이틀을 가진 황제도 전설의 대마법사 앞에서는 바람 앞의 종이 인형이구나.

평소에는 단 한 번도 느낄 수 없던 안쓰러움이 마음에 서서히 퍼져 나갔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레이프는 일말의 틈을 주지 않고 설명을 이어 갔다.

“그 검이 세이딘의 소유이긴 해도 마나를 사용할 수 없는 이상, 거추장스럽기만 할 뿐이야. 그러니 그건 네가 쓰는 게 맞아.”

“신성력 반응을 차단해 주는데도 말인가?”

“그거야 다른 걸로 대체하면 그만이고.”

“그런 게 가능해?”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음을 던졌다. 미동 없던 뒤통수가 서서히 움직이며 마침내 얼굴을 드러냈다.

커다란 아몬드 같은 눈동자가 달을 그렸다. 나를 비춘 호박빛 눈동자는 애정으로 넘쳐났다.

“그럼 당연하지. 이거라면 말이야.”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사방에 퍼졌다. 은은한 황금빛과 함께 허공에 드러난 것은 익숙하다 못해 지긋지긋한 것이었다.

슬쩍 고개를 쳐들었던 기대감이 단번에 바닥으로 처박혔다.

“저게 왜 여기 있어?”

“왜라니, 선택받은 자가 있는 곳엔 언제나 내가 함께하는 게 당연하잖아?”

뭐라는 거야, 진짜.

레이프의 말에 나는 찌푸린 미간을 한층 더 구겼다. 혹시 몰라 일부러 데스티니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레이프는 자신이 바이올린에 봉인된 대마법사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저렇게 종종 데스티니가 자신인 것처럼 말할 때마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슨 꿍꿍이로 저러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슬금슬금 올라오는 의심에 가늘게 뜬 시선을 보내는데, 눈이 마주친 레이프가 미세하게 입꼬리를 바들거렸다.

‘왜 저러는 거지?’

머릿속을 스친 의문은 곧 해결됐다.

“세이딘, 무슨 생각 하는지 얼굴에 다 드러나.”

나는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애써 아무 일도 아닌 척했다.

“그래? 그럼 확실하게 말할게. 그 바이올린 좀 집어넣을래?”

“하지만 이게 있으면 신성력 때문에 따끔거릴 일은 없을 텐데?”

단호하게 거절한 것이 민망하리만치 솔깃한 말이었다.

안 그래도 한풀 잠잠해진 정전기 소리가 다시금 들리기 시작해서 긴장하던 차였다.

“이, 이…! 정신 나간 마법사…!”

이와 동시에 저 멀리서 모든 신성력의 원흉인 놈의 외침이 들렸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네.

레이프의 여유로운 태도 때문에 공기만큼이나 존재감 없던 에이브는 이쪽을 노려본 채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무식한 짓을…! 목숨이 아깝지도 않아?!”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저런 말을 들어?

레이프는 유감스러움을 여실히 드러내는 나를 보곤 웃음을 흘리더니 곧 에이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따사한 봄날 같았던 분위기가 단숨에 냉랭한 겨울로 치달았다.

“내 목숨을 걱정해 주다니 놀라운걸? 이제라도 지고하신 신께서 말하는 자비를 실천하려 하는 건가?”

“레이프 유클리드!”

“하긴, 그럴 리 없겠지. 그랬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야. 그러니 이런 경우는 역시….”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늘어놓은 레이프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드리웠다.

“머릿수로 밀어붙이기 위한 시간 끌기지, 안 그래?”

레이프의 물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발을 딛고 있는 구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흡사 지진이라도 난 것 같은 상황에 좀처럼 균형을 잡지 못했다.

“이건….”

“그웨니르 영애, 하늘을 봐!”

경악 어린 이티엘의 외침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아까는 시리도록 푸르게 맑았던 하늘이 저 멀리서부터 거무스름하게 무언가가 몰려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먹구름인 줄 알았다. 바닥, 아니 구름까지 흔들리고 있으니 지진을 동반한 태풍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예상은 전부 빗나갔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것들은 구름이 아니라 떼 지어 날아오는 천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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