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16장. 천계에 흑염룡이 웬 말이요 (1)
빙글 도는 시야와 멀리서 들려오는 굉음에 머리가 번뜩였다. 어디선가 공격이 날아온 것이다.
“다친 곳은 없나, 그웨니르 영애?”
“아직은 괜찮아요.”
상황을 파악하느라 머리가 어지럽고 굉음 때문에 귀가 조금 얼얼하긴 했지만, 어느 정도 견딜 만한 수준이었다.
이티엘은 걱정 어린 붉은 눈동자를 휘둥그레 뜨더니 유쾌하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진솔하군.”
“이런 때 내숭을 떨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럴 시간에 하나라도 더 상황 파악을 하는 게 낫지.
이티엘이 입을 달싹이는 것도 잠시, 그의 눈동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날카로운 빛을 띠었다.
“여유 부릴 새도 없는 모양이군.”
“그러게…. 으아악!”
말을 채 잇기도 전, 몸이 붕 뜨는 감각에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티엘과 내가 서 있던 자리로 새하얀 빛들이 떨어지며 폭발음을 토해 냈다. 뿌연 연기가 걷힌 자리는 폭신폭신한 구름 대신 크고 작은 구멍들이 자리했다.
“으아, 큰일 날 뻔했네.”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저렇게 될 수도 있었다는 걸 떠올리니 반사적으로 몸이 떨렸다.
느닷없이 바뀐 풍경과 날아드는 공격.
이 두 가지가 의미하는 바는 너무도 명백했다.
“에이브.”
“설마 했는데 여기까지 쫓아올 줄이야.”
멀지 않은 곳에서 분노 어린 중얼거림이 흘러들었다. 나는 흠칫 놀라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푸르른 하늘에는 분홍빛 머리카락의 청년이 서 있었다. 원래의 모습인 건지 등에는 새하얀 날개가 달려 있었고, 옷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얗기만 했다.
누가 봐도 천족임을 주장하는 모습과 달리, 일그러진 표정과 형형한 눈빛은 마족에 더 가까웠다.
“그렇게 아티야를 괴롭혀야 성이 차겠어?”
“저게 뭐라는 거야?”
나는 짜증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피해자를 만든 놈이 되레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모습을 보니 헛구역질이 올라올 것만 같았다.
“깊게 받아들이지 마, 세이딘. 맨정신으로 저런 말을 하겠어? 미쳐서 저러는 거지.”
내 표정이 어지간히 안 좋았는지 레이프는 어느덧 내 곁에 서서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별것 아닌 행동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불쾌했던 속이 뚫린 것처럼 개운했다.
“데스티니…!”
형형한 황금빛 눈동자가 불처럼 일렁거렸다. 살벌한 에이브의 태도에도 레이프는 아랑곳하지 않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말은 똑바로 해야지. 쫓아온 게 아니라 유인한 거잖아?”
레이프는 노골적인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에이브는 눈가를 찌푸렸다.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봐, 데스티니?”
“그럴 리가, 오히려 네 의기양양한 태도 덕분에 확실히 알게 됐는걸.”
“여기가 어딘지 알면서도 그렇게 건방지게 군다 이 말이지?”
“하하, 아무래도 너와 제법 마음이 잘 맞나 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족족 하는 걸 보면.”
“뭣…!”
발끈한 에이브는 전신에 은은한 빛을 흩뿌렸다.
그는 굉장히 불쾌하다는 얼굴이었지만 나는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애초에 레이프는 에이브가 도발을 걸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누가 너 따위와…!”
역으로 도발당한 에이브는 눈에 불을 품더니 팔을 들었다.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 모여든 빛이 어느새 활이 되어 에이브의 손에 들려 있었다.
레이프를 겨냥한 활이 쏘아지는 데 걸린 시간은 찰나였다. 날카로운 소리를 낸 하얀빛의 활은 목표물에 가까워질수록 황금빛을 띠기 시작했다.
나는 저릿저릿해지는 공기를 느끼는 것과 동시에 레이프를 향해 외쳤다.
“데스티니!”
타닥!
타다다닥!!
신성력을 감지하는 소리는 어김없이 요란했지만 레이프는 조금도 미동하지 않았다.
황금빛을 흩뿌리는 화살이 레이프의 가슴을 파고들려는 순간이었다. 날카로웠던 활 끝이 조금씩 허물어지는가 싶더니 화살 전체로 퍼져 나가 종래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저건….”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혼잣말과 동시에 레이프가 비웃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멍청하긴. 한낱 천족의 신성력으로 날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크윽…!”
에이브는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로 고스란히 분한 마음을 드러냈다.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차마 물어볼 수는 없어 나름대로 생각해 본 결과, 그럴듯한 추측이 떠올랐다.
어느 정도 원래의 힘을 되찾았다고 해도 레이프는 여전히 신의 봉인에 묶여 있는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같은 속성을 띤 에이브의 힘이 통할 리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빠르게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미간을 좁혔다.
“그럼 혼자 신전에 올 수도 있었던 거 아냐?”
“그건 아냐.”
아이고, 깜짝이야!
굉장히 작게 중얼거린 말이었기에 날아든 레이프의 대답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놀란 나와 달리, 레이프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고작 이걸로 놀라다니.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어, 세이딘?”
“누가 안 익숙하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불만스러운 투로 토로하자 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그건 그렇지. 여하튼 원래 이야기로 돌아오면 에이브의 공격을 막은 것은 공격이기 때문이야. 신의 봉인은 나를 억압하는 동시에 보호를 하거든. 선택받은 자만이 만질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고.”
“그러면서 왜 신전은 못 들어가는데?”
“봉인의 보호가 작용하는 건 외부에서 의도를 가진 힘이 날아들 때로만 한정되어 있거든.”
그러니까 결국 에이브가 악의를 보였기 때문에 방어가 가능했다는 뜻이었다.
납득한 나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신의 능력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천족이 저러고 있으니 멍청하다는 소리나 듣지, 쯧쯧.
“이것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모여드는 측은한 시선이 싫었던 에이브는 쉴 새 없이 빛의 화살을 쏘았다. 이티엘 덕에 공격을 전부 피했지만 신성력 감지 약으로 인한 정전기는 피할 수 없었다.
‘미친 마법사 같으니라고.’
나는 짜증스럽게 팔을 벅벅 긁으며 속으로 단테를 신나게 깠다.
기도실에서 신성력을 감지했을 때만 해도 조금 거슬릴 뿐이었다. 하지만 응집된 신성력이 동시다발적으로 날아드니 거슬림이 모여 따갑다 못해 아릴 지경이었다.
‘다른 방법도 많았을 텐데 진짜 왜…. 하…!’
나는 밀물처럼 밀려오는 짜증을 꾸역꾸역 억눌렀다. 당사자도 없는 상황에서 씩씩거려 봐야 의미 없이 힘만 빼는 꼴이었다.
비처럼 쏟아지던 공격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한 것은 생각이 정리될 때쯤과 맞물렸다.
활을 거둔 에이브는 창백한 얼굴로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 그렇게 기계처럼 쏴댔는데 멀쩡할 리가 없지.
어찌 됐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전기로 고생하던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끝이야?”
저 눈치 없는 놈 봐라?
나는 레이프를 죽어라 노려보았다. 그는 같은 약을 먹은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쌩쌩했다.
“시끄러워!”
어김없이 도발당한 에이브는 무리한 공격들을 다시 감행했다. 이제는 좀 불쌍하게 느껴질 지경…은 무슨! 아프잖아!
또다시 시작된 정전기 퍼레이드에 가라앉았던 짜증이 고개를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까보다 공격의 규모가 크지 않아 이티엘과 나까지 공격을 피해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티엘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네?’
나는 힐끗 눈을 들었다. 혹시 모를 상황 때문인지 이티엘은 여전히 나를 한 팔로 든 채로 에이브와 레이프의 공방을 보고 있었다.
그는 신성력 감지 효과로 인해 요란한 소리가 서라운드로 울려 퍼지는데도 조금도 따끔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왜 그렇게 쳐다보지, 그웨니르 영애?”
너무 뚫어지게 쳐다본 탓인지 어느덧 이티엘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폭발음이 들리는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의 시선은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자연스레 고개를 쳐든 의문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폐하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무엇이?”
“계속 절 들고 다니는 거나 신성력 감지 때문에 따끔거리는 것 같은 것들이요.”
이티엘은 무슨 말인지 고민하는가 싶더니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내가 불편하게 만들었나 보군.”
“네?”
“미안하네, 그웨니르 영애. 방어와 공격이 양립하는 걸 생각하다 보니 그대가 불편할 걸 염두에 두지 못했어.”
아무래도 이티엘은 내가 불평을 하는 줄 착각한 모양이었다.
모양새가 다소 짐짝처럼 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력이 되지 못하는 날 챙겨 줬으니 고맙게 여겼지.
그럼에도 이티엘은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아무래도 제대로 짚어 줘야 할 듯싶었다.
나는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입을 열었다.
“오해예요, 폐하! 불편해서 그런 게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 절 안고 다니셨으니까 무겁고 힘들 것 같아서 걱정한 거예요.”
그제야 이해한 이티엘은 살짝 눈가를 찌푸리는가 싶더니 곧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가 맺혔다.
“날 과소평가하는군, 그웨니르 영애. 평소 수련에 비하면야 가녀린 영애 한 명 안고 있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야. 이대로 서너 시간은 충분히 움직일 수 있어.”
“그…러시구나.”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는 게 딱 이런 느낌이겠네.
뒤늦은 깨달음에 민망함이 하늘을 찌를 듯이 차올랐다. 하긴 내 코가 석 잔데 누굴 걱정하는지, 원.
이티엘은 그런 내가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애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민망함은 한층 더 부풀어 오르고, 이를 따라 당장이라도 접싯물에 코를 박고 싶은 충동이 아슬아슬하게 줄다리기를 했다.
“그리고 신성력 감지로 인한 정전기라면…. 느껴지지 않는군.”
“정말요?”
제일 궁금했던 질문에 대한 답이 돌아오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설마 나 빼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안 따가운 건가?
레이프에 이어 이티엘까지 별 반응이 없으니 이쯤 되면 합리적인 의심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