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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89)화 (89/122)

제89화. 15장. 신전에서 천족을 찾아다녔더니 (4)

왜 그 천족이 누군지 짐작이 갈까?

선뜻 물어볼 용기를 내지 못하는 나와 달리 이티엘은 꽉 찬 직구를 던졌다.

“천족이라는 건 에이브라는 자인가?”

레이프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사람을 이 정도로 곤란하게 했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는 치러야지.”

아, 단단히 화났구나.

나만 해도 보면 가만 안 두겠다는 마음을 불태우고 있는데, 아티야를 만나려다 봉변당한 레이프는 오죽할까.

이티엘은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에이브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지만, 제국 내에서 사람이 납치되었다는 점과 나와 여러 가지 악연으로 얽혀 있다는 걸 고려한 결과일 터였다.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는 듯, 레이프는 나머지 설명을 더 이어 갔다.

“그리고 묻어 둔 것 말인데, 가슴 정도까지만 묻어서 조금만 노력하면 충분히 자력으로 나올 수 있어. 세이딘에게 저지른 무례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매우 가벼운 축이라 생각하는데 황제는 어떻게 생각해?”

레이프의 설명을 들으며 어느 정도 납득을 한 이티엘은 내 이름을 듣자마자 곧바로 온순한 양이 되었다.

신전과의 관계를 끊네 마네 했던 만큼 그의 마음은 확고했다.

“훌륭한 대처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미안하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뭘 그런 걸 갖고. 지금이라도 풀렸으면 됐어.”

오해가 풀린 두 사람의 분위기는 훈훈하기 짝이 없었지만, 정작 그 광경을 보는 나는 착잡한 마음뿐이었다.

“제발 날 놓고 일을 키우지 말아 줘….”

난 지금 너희들만으로도 벅찬 사람이란 말이야.

간절함을 담아 쳐다보자, 레이프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볍게 어깨를 두들겼다.

“걱정하지 마, 세이딘. 여기 모인 사람들이 네가 싫어하는 일을 할 리가 없잖아.”

방금 그건 뭐라고 설명할 건데?

레이프는 말없이 노려보는 나를 슬그머니 피했다.

‘그래도 뭐, 숨기지 않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지.’

어이는 없었지만 봉인을 푼답시고 속였던 때를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 후로 우리는 그린트 일행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뒤, 사전에 말해 둔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사제복은 여기 있습니다.”

린든은 말과 함께 여행 가방에서 사제복을 꺼냈다.

마침 그의 상단에서 신전에 사제복의 공급도 맡고 있어서 각자에게 맞는 사이즈를 구할 수 있었다.

마법으로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는 레이프와 단테를 제외하고는 개인 기도실을 이용해 옷을 갈아입기로 했다.

“아! 세이딘, 왔어?”

옷을 다 갈아입고 기도실로 돌아오자 반갑게 반기는 레이프의 목소리가 제일 먼저 들려왔다.

“응, 근데 이거 되게 어색….”

문을 닫는 것과 동시에 몸을 돌린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사제복이 어색하고 이질적으로 보이는 나와 달리, 레이프와 단테는 하나같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완벽하게 잘 어울렸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더니…….’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있는데 뒤에서 바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옷을 갈아입고 온 이티엘과 린든이 서 있었다.

그들 또한 마법사들만큼이나 사제복이 잘 어울렸다.

가뜩이나 눈부신 외모를 자랑하는 사람들이었다. 만약 그들이 사제였다면 신전은 이미 신도로 가득했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 그걸 넘어서….

“사이비 종교가 생길지도.”

나도 모르게 튀어 나간 혼잣말에 이티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웨니르 영애?”

“아, 아니에요! 잠시 뭘 생각하다 그만…. 아하하.”

의문을 담은 시선이 다소 집요했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물어보기만 해라, 닥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늘어놓을 테니까.

“그나저나…….”

다행히도 이티엘은 더 물어볼 생각은 없었는지 화제를 돌렸다.

그는 멀뚱히 눈을 깜박이는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왜 그러지? 뭔가 실수했나?’

처음으로 입어 보는 사제복은 보이는 것과 달리 굉장히 입기 번거로운 디자인으로 되어 있었다.

왜 이렇게 불편하게 되어 있는지를 린든에게 물어보니, 신을 향한 감사함을 하나하나 곱씹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신을 믿지 않는 내 입장에서는 조금도 와닿지 않았으니 그저 입는 데 불편하다 느낄 뿐이었다.

조마조마하는 마음에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을 때였다.

“…는군.”

“네?”

이티엘의 목소리가 너무 작은 나머지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내 물음에 부응하듯 아까보다 큰 목소리로 대답이 돌아왔다.

“잘 어울려, 그웨니르 영애.”

“…….”

잘 어울리다 못해 눈부신 사람에게 그런 소리를 들어 봐야 기쁘기보다 복잡한 마음이 앞섰다.

그것만으로는 성에 안 찼는지 이티엘은 벅찬 표정과 함께 한마디를 덧붙였다.

“마치 천사 같아.”

―또로롱!

‘신종 괴롭힘인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티엘의 반응이나 여기저기서 울리는 알림음을 봤을 때, 진심이라는 것쯤은 알았다.

그렇지만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미친 호감도. 아무리 좋아해도 그렇지 콩깍지가 이렇게까지 씔 수 있는 거야?’

하지만 혼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입을 벙긋이는 이티엘을 향해 린든이 불만을 토로했다.

“저도 같은 말을 하려 했는데 먼저 선수를 치시다니 너무하십니다, 폐하.”

“날 탓할 게 아니라 먼저 말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지 그래, 린든?”

“말하지 못한 게 아니라 말할 수 없던 겁니다. 그웨니르 영애가 너무 아름다워서요.”

나는 맑게 웃는 얼굴이 너무 눈이 부신 나머지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리고 말았다.

“음, 이번만큼은 부정할 수 없군. 귀엽다, 세이딘.”

“맞아, 잘 어울려.”

이티엘과 린든만으로도 충분한 칭찬은 단테와 레이프에게서도 이어졌다.

이대로라면 누가 더 나를 좋아하는지에 대한 주제로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것까지 듣고 싶지 않은 나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보다도 크게 외쳤다.

“그만!!!”

어떻게든 제압하겠다는 일념이 담겨서 그런지 귓가가 여전히 얼얼했다.

목이 아팠지만 여기저기서 말하는 소리가 단번에 멈춘 걸 보면 효과는 확실했다.

‘유치원 교사도 아니고 이게 뭐야.’

아이들과 씨름하는 선생님들, 존경합니다.

부디 이 마음이 온 세계에 전해지기를 바라며 속사포처럼 할 말들을 쏟아 냈다.

“우선 다들 칭찬해 줘서 고마워요. 그다지 와닿는 건 아니지만 어찌 됐건 마음은 고맙게 받을게요. 그런데 이러려고 사제복을 입은 건 아니잖아요? 이 정도면 잡담은 충분한 거 같은데 얼른 고위 사제들의 기도실로 가 보도록 할까요?”

말을 마치고 공략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안이 벙벙했다.

나는 대답도 듣기 전에 마법의 가방을 둘러메고 기도실을 나왔다.

에이브에 대한 원한이 한층 더 깊어졌다.

*  *  *

고위 사제 전용 기도실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외관은 황제의 기도실보다는 검소한 반면, 기도실의 개수는 족히 100개는 될 것같이 많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음…. 고위 사제들이 이렇게 많나?”

혼잣말에 가까운 의문에 대답한 것은 린든이었다.

“아델 신전에 속한 고위 사제는 약 50명가량입니다. 그럼에도 기도실이 많은 건 타 지역에서 방문하는 고위 사제들을 위해섭니다. 1년에 두 번 정도 아델 신전에서 큰 예배를 드리는데 이때가 되면 이마저도 부족한 실정이라 내년에는 증축을 할 예정이라 합니다.”

“그보다 아래인 사제들의 기도실을 사용하면 될 텐데 증축을 한다고요?”

“저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만…, 사제들의 말로는 기도실마다 신성력의 밀도가 달라 신이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다르다고 하더군요.”

“아…….”

철저한 그들만의 리그에 절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도무지 납득이 가진 않았지만 그들이 그렇다는데 내가 더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하염없이 늘어선 기도실을 따라 걷던 나는 마침내 가장 중간이 되는 기도실 앞에 멈췄다.

“그럼 시작할까요?”

신전에 오기 전, 우리는 무리를 나누어 기도실을 둘러보기로 했다.

인원이 짝수가 아닌지라 짝을 나누기가 쉽지 않았지만 한쪽은 둘, 한쪽은 셋으로 나누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나와 같은 조가 되기 위한 실랑이가 한차례 벌어졌고, 결국엔 내가 직접 제비를 만들어 뽑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그럼 다녀오지.”

“무슨 일이 있으면 폭죽을 쏘도록 하겠습니다.”

같은 조가 된 단테와 린든은 곧장 왼쪽 기도실의 문을 열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나는 양옆에 선 남자들을 향해 말했다.

“그럼 우리도 가도록 하죠.”

“좋아.”

“그래.”

동시에 들려온 대답과 함께 우리는 오른쪽 기도실 문을 열었다.

황제의 기도실과 달리, 고위 사제들의 기도실은 정말로 사람 하나가 들어가면 꽉 찰 정도로 작은 규모였다.

처음에는 셋이 들어가서 살폈지만 움직일 공간이 협소한 데다 자꾸 동선이 꼬여 툭하면 넘어질 뻔한 일이 벌어지는 바람에 각자 방 하나씩 살피기로 했다.

멀리서 보니 단테 쪽도 우리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럴 거면 각자 살펴보자고 할걸.’

이쪽에 대한 정보가 없다 보니 어쩔 수 없던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온갖 난리를 피우며 제비뽑기를 만들었던 지난날이 허탈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조금씩 요령이 생겨 빠르게 기도실을 살필 수 있게 되었을 때였다.

“어?”

손끝을 스친 찌릿한 감각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전기가 아닐까 생각한 것도 잠시, 주위가 다소 건조하기는 해도 사제복은 정전기가 생길 만한 소재가 아니었다.

“왜 그래, 세이딘?”

기도실에 선 채로 가만히 있는 날 의아하게 생각한 레이프가 물음을 던졌다.

“별거 아냐. 갑자기 손끝이 찌릿해서.”

“손끝이?”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던 나와 달리, 레이프의 얼굴에는 진지함이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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