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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88)화 (88/122)

제88화. 15장. 신전에서 천족을 찾아다녔더니 (3)

내 간절한 바람이 닿았는지 우리는 마침내 기도실에 다다랐다.

황제와 그 측근들을 위해서 지어졌다는 기도실은 지방에 있는 작은 성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커다랗고 우아한 자태를 자랑했다.

그린트는 기도실 이곳저곳을 설명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이티엘은 일절 모르는 척을 했다.

그럼에도 못내 아쉬웠던지 그는 레이프와 단테, 그리고 나를 대상으로 잡았다.

“새로 오신 분들은 이쪽으로 오십시오. 기도실로 안내하겠….”

“그린트.”

이티엘의 입에서 흘러나온 부름은 무척이나 딱딱했다.

그린트를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는 그쯤에서 멈추라는 경고가 짙게 드러나 있었다.

그럼에도 이 중년의 사제는 얼마나 능구렁이인지 이티엘의 위협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어쩔 줄 몰라 파랗게 질린 사제와 성기사들과는 확연히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그린트는 한참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인자한 미소를 떠올렸다.

“아, 폐하께서 잘 아시니 안내는 필요 없겠군요. 깜박했습니다.”

깜박할 걸 깜박해라, 이 아저씨야.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가득 보내는 가운데, 그린트는 우리 일행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따 기도가 끝나신 후에는 나눠 드린 통신구를 사용하십시오. 금방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그럼 은혜로운 시간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린트는 사제들과 성기사들을 데리고 기도실을 떠났다.

지나가면서 어쩐지 나를 힐끗 쳐다본 것 같았는데 착각이겠지.

마침내 그린트가 희미하다 못해 점이 되어 보이지도 않게 되었을 때, 나는 후드를 벗는 것과 동시에 땅이 꺼지라 안도의 한숨을 토해 냈다.

“수고했어, 세이딘.”

어느 틈에 다가온 것인지 지척에 선 레이프가 내게 물통을 건넸다. 

안 그래도 입이 바싹바싹 말라서 죽는 줄 알았는데 잘됐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할 새도 없이 수통을 받아 무아지경으로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마법을 걸어 둔 것인지 입안에 퍼지는 냉수는 혼미했던 정신이 번쩍 나게 만들었다.

그제야 조금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지금까지 있었던 일에 대한 소감을 늘어놓았다.

“대체 뭐예요, 저 사람? 사제라면서 왜 저렇게 남의 일에 관심을 보이고 캐내려 하는 거죠?”

중간중간 눈이 마주칠 때마다 빤히 쳐다보던 그린트를 떠올린 나는 끔찍한 마음이 앞선 나머지 몸서리를 쳤다.

처음에는 그저 인상 좋은 순박한 중년 사제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갈수록 질척거리는 꼰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원래 그런 자야. 이미 세속화가 되어 가는 신전이지만, 그 안에서도 굉장한 속물로 유명하지. 뒤를 따르는 자들도 그렇고 말이야.”

이티엘의 설명에 단번에 납득이 가면서도 또 다른 의문이 피어났다.

“그런 것치고는 폐하랑 친해 보이던데요?”

“국가사업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어울려 주는 것일 뿐, 딱히 그렇지 않아.”

아, 그런 거라면 이해한다.

제르아일 제국의 교육 및 자선 사업은 대부분 신전에서 실행하고 있다 보니 이티엘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추진하는 사업이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얻기 위해서라도 신전과 협업을 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했다.

‘이런 거 보면 황제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니까.’

빙의한 게 백작 영애라서 다행이었다.

진심 어린 생각을 하는 가운데, 이티엘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대에게 하는 행동을 보니 앞으로는 좀 고려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제발 거기서 급발진 하지 마!

나는 황급히 이티엘을 말렸다.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대업을 이루셔야죠!”

“아니, 어떤 대업도 영애 앞에선 무의미해. 그러니 돌아가면 신전과의 교류를 끊어야겠어.”

손발이 오그라드는 무책임한 대답에 익숙해진 내가 싫다.

“듣고만 있을 수 없군요, 폐하.”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린든이 비장한 표정으로 이티엘과 마주했다.

공략캐 중 그나마 제일 상식인이 나서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 린든. 한마디 해 줘! 여자 하나 때문에 나라를 말아먹을 짓 좀 하지 말라고.

하지만 이스트처럼 부풀어 오른 내 기대와 달리, 린든의 반박은 내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달려갔다.

“고려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확실하게 신전과 인연을 끊으셔야죠.”

아니, 신전하고 왜 연을 끊어요!

입안에 가득 찬 반박이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래 봐야 저 사랑에 눈먼 놈들은 더욱 자극을 받아 이보다 더한 짓을 할 테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화제를 돌리거나 조용히 침묵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았다.

“나머지 이야기는 안에서 했으면 좋겠군. 만에 하나라도 엿듣는 사람이 있으면 곤란하다.”

단테, 나이스!

눈치가 더럽게 없어 유감스러운 대마법사가 구세주처럼 느껴지는 날이 오다니.

이티엘과 린든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았지만, 그런 거에 신경을 썼으면 단테는 지금과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터였다.

처음 오는 곳인데도 훌쩍 앞장서서 기도실로 가는 그를 보며 나는 냉큼 그 뒤를 따랐다.

저 사이에 껴 있어 봐야 등이 터지는 건 언제나 나였다.

황제 전용 기도실은 예배당같이 큰 기도실이 하나, 10명 정도가 모일 수 있는 기도실이 넷, 그리고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개인 기도실이 서른 개가 있었다.

그 외에도 며칠 묵을 수 있는 방이 수없이 많이 있었고, 식당과 부엌 또한 구비되어 있었다.

게다가 기도실의 중심에는 작은 정원과 분수로 꾸며져 있어서 신전보다는 별장 같은 느낌이 물씬 났다.

그중에서도 단테가 발길이 닿는 대로 들어간 곳은 10인 정도가 모일 수 있는 기도실이었다.

“경들은 바깥을 살피도록.”

이티엘은 함께 온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린 뒤, 기도실의 문을 닫았다.

“여기까진 꽤 수월하네.”

가벼운 레이프의 한마디에 나는 목에서 우두둑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아까 그 사제가 껄끄러워, 세이딘?”

참 유익한 질문을 하고 있다.

“당연한 거 아냐? 그런 사람과는 되도록이면 안 마주치고 싶어.”

“왜?”

이미 말했는데 이 이상 어떤 이유를 대란 말이니?

대답할 가치가 없어 그저 눈에 힘을 주고 있자 레이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마음은 잘 알았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신전을 떠날 때까지 네가 그자와 마주칠 일은 없을 거야.”

“무슨 소리야? 설마….”

순간적으로 예상되는 상황에 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정신 나간 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선은 지킨다 생각했는데!

충격과 배신감에 물들어 가고 있을 때였다.

“우리 아가씨는 참 상상력이 풍부하단 말이야. 네가 생각하는 일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정말로?”

의심을 거두지 못한 물음에 레이프는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이야. 예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봉인 때문에 살생은 할 수 없다고.”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건 왜일까?

더 깊이 생각했다간 정신적으로 해로워질 것 같아 깊이 파고드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차단했다.

일단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에 큰 의의를 두고 다시 물음을 던졌다.

“그럼 뭘 한 거야?”

“별거 아냐. 기절시킨 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묻어 뒀어.”

상큼한 대답에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마른세수를 했다.

한편 대화를 듣고 있던 이티엘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물음을 던졌다.

“대체 어느 틈에 그런 일을 벌인 거지?”

“으음, 글쎄 언제일까?”

“자칫하다가 큰 문제로 번질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확실하게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모순되지 않아? 방금 전에는 신전과 연을 끊겠다고 했으면서 말이야.”

“그건 이 일이 마무리된 후의 이야기다. 지금부터 일을 키울 필요는 없어.”

“흐음, 머리가 좋은 줄 알았더니 딱히 그렇지도 않네.”

노골적인 비아냥거림에 이티엘은 미간을 좁혔다.

“한낱 바이올린 주제에 못 하는 말이 없군.”

“하하, 순진하긴. 설마 지금도 날 바이올린이라 생각하는 건가?”

해사한 미소와 달리, 호박색 눈동자에 어린 빛은 이질적인 날카로움을 띠고 있었다.

‘이젠 아주 숨길 마음이 전혀 없구나.’

이미 단테가 레이프의 정체를 드러낸 시점에서 그런 거 같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저렇게 당당하게 ‘난 봉인된 대마법사요~’ 하는 모습을 보면 게임에서 내가 본 것은 대체 무엇인지 의문이 들었다.

게임 속 레이프는 정체를 좀 눈치챈 듯하면 곧바로 배드엔딩으로 노선을 틀어 버렸다.

‘결국 알아 버렸네. 모처럼 마음에 들었는데 유감스럽지만 비밀을 지켜 줘야겠어.’

오랜만에 배드엔딩 마지막 대사를 떠올린 나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저렇게 개구리가 됐지. 아티야는 그 덕에 집을 떠나 연못에서 살아가는 신세가 되고.’

새삼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여주인공으로 살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이후의 삶이 극과 극으로 달라지니 말이다.

덕분에 인생으로 배팅하면 안 된다는 절절한 교훈을 얻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전까지는 언제나 배팅 인생이지만….’

밀려오는 씁쓸함에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얼굴을 왈칵 구겼다.

지금쯤이면 정리가 됐을 거라 생각한 것과 달리, 레이프와 이티엘은 서로를 노려본 채였다. 참 어지간하다, 정말.

그 후로도 팽팽하게 맞서던 중, 먼저 물러선 것은 의외로 레이프였다.

매서운 눈동자로 이티엘을 압박했던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여느 때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진지하긴. 그렇게까지 알고 싶다면 답해 줄게. 기도실로 오던 길에 그들에게 마법을 걸어 뒀어. 그리고 기도실을 떠난 후에 발동되도록 설정했지. 우리가 이곳을 떠날 때쯤이면 정신을 되찾을 거야. 그리고 범인에 대해서도.”

“기억 조작인가…?”

“뭐, 어쩔 수 없잖아? 유력한 용의자로 찍히는 것보다 낫다고 보는데.”

“그래서 그 범인은?”

이티엘의 물음에 레이프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맺혔다.

“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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