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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87)화 (87/122)

제87화. 15장. 신전에서 천족을 찾아다녔더니 (2)

단테의 레이프 찬양이 한차례 이어지고 난 뒤, 우리는 마법약에 대한 몇 가지 주의사항을 들을 수 있었다.

지속 시간은 약을 복용한 기점으로 하루의 반나절가량이라고 한다.

신성력을 막아내는 약의 경우, 너무 효과를 믿고 신성력이 있는 곳만 골라 다니다간 지속 시간이 단축될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다.

몇 가지 사항을 안내받은 뒤 우리는 단테에게 약을 건네받았고, 신전 입구가 보일 때쯤 먹기로 결정했다.

그 외에 자잘한 이야기들이 오간 뒤, 마침내 마무리가 다가왔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던 나는 마법의 가방에서 손가락 한 마디만 한 크기의 나무통을 꺼내 하나씩 나눠 주었다.

“그웨니르 영애, 이건 무엇입니까?”

이리저리 살펴본 린든이 제일 먼저 궁금증을 드러냈다.

반짝이는 눈동자는 상인으로서의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린든뿐만 아니라 다른 공략캐들도 내가 준 나무통이 무엇인지 상당히 궁금한 모양이었다.

시선을 한데 받은 나는 그들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다.

“위치 표시용 폭죽이에요.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한해서만 불빛과 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돌아다니다가 에이브를 발견하면 곧장 이걸 사용하세요. 거기로 갈게요.”

설명을 들은 두 대마법사는 린든만큼이나 폭죽에 관심을 드러냈다.

“흐음, 신기한데? 요즘 마탑에서는 이런 것도 만드나 봐?”

“아뇨, 마탑에 저런 물건은 없습니다. 제국이 아닌 곳에서 만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지금껏 타 지역에 있는 상단 지부들을 돌면서 저런 물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진지하게 폭죽을 놓고 토론을 벌이는 그들을 보며 나는 헛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못 구하는 게 당연했다. 애초에 이건 이벤트 달성을 통해 받은 보상이었으니까.

그들은 어떻게 내가 이런 걸 갖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어색하게 웃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제 도착했다.”

한편 줄곧 바깥을 살피던 이티엘이 말했다.

폭죽에 대한 의문을 가졌던 대마법사 둘과 상단주의 시선은 자연스레 한 곳으로 밀려들었다.

이티엘의 말대로 바깥에는 새하얀 대리석으로 둘러싸인 신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도에서 가장 큰 신전으로 알려진 아델 신전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인 위압감을 자랑했다.

마침내 신전 앞에 다다르자 입구를 지키던 성기사가 마차를 세운 뒤, 물음을 던졌다.

“어떤 목적으로 방문하셨습니까?”

이티엘은 대답 대신 창문을 열었다. 그의 마차는 창문이 밖에서 볼 수 없게 특수 제작되어 있었다.

마침내 이티엘의 얼굴을 확인한 성기사는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서둘러 제국의 예를 갖추기 시작했다.

“제, 제국의 존귀한 분을 뵙습니다.”

“그리 호들갑 떨 것 없네. 그나저나 방문 목적을 밝혀야 하나?”

느긋한 이티엘의 어조에는 ‘설마 황제가 방문하는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지?’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한 성기사는 살짝 하얗게 질린 얼굴로 펄쩍 뛰었다.

“그럴 리가요! 성전은 언제나 폐하를 환영합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 앞으로도 자주 찾도록 하지.”

“화, 황송합니다!”

이티엘의 부드러운 미소와 대답에 성기사는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표정이 되어선 서둘러 문을 열었다.

‘홀렸네, 홀렸어.’

신을 섬기는 성기사가 저래도 되나 싶으면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티엘은 황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소드마스터였다.

이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실력자인 만큼 검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면 소속이 어디건 간에 이티엘을 우러러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증거로 성기사는 우리가 들어가는 내내 깊게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저럴 거면 차라리 성기사가 아니라 황실 기사단에 들어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신전에 들어선 것을 확인한 우리는 서둘러 단테에게 받은 마법약을 마셨다. 정원을 산책할 적에 단테가 열변을 토한 대로, 마법약의 맛은 조금도 역하거나 쓰지 않았다. 오히려 상큼한 과일 주스 맛이어서 더 먹고 싶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모두가 단테의 마법약에 소소하게 감탄하는 것도 잠시, 마침내 마차가 멈췄다.

이티엘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마차 밖에는 10명 남짓 되는 성기사와 사제들이 가지런히 줄을 선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황제 폐하. 반년만이로군요. 잘 지내셨습니까?”

사제들 중 가장 앞에 선 남자가 마차에서 내리는 우리를 반겼다.

연배가 있는 것을 보아 고위 사제인 듯싶었다.

“오랜만이군, 그린트. 덕분에 잘 지냈다. 이번에도 잘 부탁하네.”

“물론입니다. 그럼 절 따라오시죠.”

이티엘을 필두로 자연스럽게 안내역을 자처하는 그린트를 따라나섰다.

그들은 제법 알고 지낸 사이인지 그동안의 근황을 자연스럽게 주고받았다.

“그나저나 이번에 동행하신 분들은 브누아 님을 제외하고는 처음 뵙는군요.”

주고받을 화제가 고갈됐는지 그린트의 관심은 자연스레 우리에게 넘어왔다.

아니, 정확히는 레이프와 나를 두고 한 물음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나는 유명세를 탈 만큼 알려지지도 않았고 특출난 것이 없었다.

레이프 또한 출중하기는 해도 알려진 바가 없었으니 누군지 궁금하게 여기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분명 그랬을 텐데.

“여전히 소문이 느리군, 그린트. 내가 지금껏 묘령의 여인과 함께 다닌 적이 있던가?”

“설마…. 이분이 세이딘 그웨니르 영애이신 겁니까?”

‘고작 그런 말로 내가 누군지 안다고?’

내가 당황하는 사이, 이티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나를 보는 그린트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흡사 스타를 만난 일반인 같은 반응에 나는 괜히 머쓱해졌다.

천천히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 머리로 생각해 본 결과, 그가 날 아는 건 데스티니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아니나 다를까 선한 미소를 지은 그린트는 내 예상이 맞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웨니르 영애. 저는 신을 섬기는 그린트라고 합니다. 이렇게 유명한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가… 유명한가요?”

“물론입니다. 오랜 세월 미동도 없던 데스티니를 처음으로 거머쥐신 분인걸요.”

“아하하….”

너무 거창하게 설명을 하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린트의 설명 때문인지 다른 사제들과 성기사들은 저마다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기 바빴다.

그들의 눈동자에 떠오른 감정은 감탄과 의심이었다.

‘으, 부담스러워.’

관심은 여기 있는 공략캐들만으로도 충분했기에 나는 그저 한시라도 빨리 기도실에 도착하길 바랐다.

하지만 신전이 넓은 탓에 한참을 걸었음에도 목적지는 보이지 않았다.

“잠깐 서 보세요, 그웨니르 영애.”

마인드컨트롤을 하며 최대한 힐끗거리는 시선들을 무시하고 있을 때였다.

이티엘과 그린트의 뒤를 따라 걷던 린든은 천천히 속도를 줄여 내 걸음에 맞추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의 요청이었기에 나는 자리에 멈춰 섰다. 멀뚱히 바라보는 나와 마주한 린든은 말없이 자신의 망토를 벗어 내게 두르고 후드를 씌워 주었다.

“브, 브누아 영식?”

행동 하나하나에 담긴 정중함에 넋을 놓고 있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놀란 나를 본 린든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햇빛이 강합니다. 그러니 이편이 훨씬 편하실 거예요.”

아리송하게 여겼던 것도 잠시,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린든은 내가 사제들과 성기사들의 시선을 껄끄러워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한 말이었다.

‘아, 이놈의 표정.’

나름대로 표정 관리를 잘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속내를 들켰다는 것에 부끄러움이 앞서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내가 불편해하는 걸 눈치채지 못하게 신경 써 준 것이 무척 고마웠다.

“하하하, 사이가 좋으시군요.”

그 대신 다른 의미로 주목을 받게 되었지만.

그린트의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한 가운데, 린든은 온화한 미소로 대처했다.

“후원자로서 해 드릴 수 있는 걸 한 것뿐입니다.”

“허허, 그렇군요. 이렇게 든든한 후원자가 있으시니 그웨니르 영애는 행복하시겠습니다.”

어느 누구도 민망하지 않을 답을 내리는 린든에게 감탄하면서도 묘하게 집요한 질문을 던지는 그린트가 이제는 부담스러움을 넘어 짜증스러웠다.

‘사제라는 사람이 왜 저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아?’

선택받은 자라는 타이틀로 인해 관심을 보이는 건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는데 그린트는 그런 것을 조금도 구별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린트, 잡담은 그 정도로 했으면 좋겠군. 시간이 촉박해서 말이야.”

한편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티엘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는 단테만큼은 아니지만 표정을 그리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고요하면서도 위압적인 분위기를 뿜어내는 가운데, 그린트는 결국 고개를 깊이 숙여 사과하기에 나섰다.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너무 주책을 부렸군요. 외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하나같이 신기하고 흥미롭다 보니 그만.”

“변명은 듣고 싶지 않네. 그러니 앞으로는 사담을 금하고 안내에 집중하길 바라.”

“…네, 알겠습니다.”

그린트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아빠뻘이나 되는 아저씨가 시무룩한 모습은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한없이 불편한 행동만 보였던 것을 떠올리면 차라리 이게 나았다.

린든의 망토와 이티엘의 한마디 덕에 그 후로 기도실에 가는 여정은 눈에 띄게 편안해졌다.

더는 나를 향해 호기심을 드러내는 사람들은 없었고, 불편한 대화나 질문도 일절 없었다.

‘역시 세상사는 인맥과 권력이구나.’

깨달음과 동시에 짜릿함이 전신에 퍼졌다.

평소엔 느낄 새도 없었던 인덕과 권력의 힘을 확실하게 체감해서인지 새삼 린든과 이티엘이 다시 보였다.

특히 이티엘에겐 큰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인지 더욱 인상 깊게 다가왔다.

‘엔딩을 봐야 한다면 저 둘 사이에서 고민해야겠어.’

원래는 린든을 점찍어 놨지만 눈에 띄게 개선된 이티엘을 보니 마음이 좀 달라졌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도 중요한 건 그 전에….

‘기도실에나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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