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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86)화 (86/122)

제86화. 15장. 신전에서 천족을 찾아다녔더니 (1)

이티엘의 마차에는 마법이 걸려 있어서 소박한 겉모습과는 달리, 내부는 우리가 다 타고도 여유 있을 정도로 컸다.

덕분에 나는 무엇이든 겉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귀중한 경험을 했다.

그 외에도 누가 내 옆에 탈 것인지를 놓고 논쟁이 오갔지만, 그런 것쯤은 가볍게 가위바위보로 평정했다.

처음으로 가위바위보를 접한 공략캐들은 이제까지 볼 수 없던 혁신이라며 나를 향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고 몇 번이고 말하려 했지만 그럴 틈은 조금도 주어지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결국 시도를 포기했다.

어차피 이 세계에서 가위바위보를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테니 트집 잡힐 일은 없을 터였다.

어찌 됐건 그 결과로 내 양옆에 앉게 된 것은 린든과 단테였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레이프와 이티엘이 각각 부루퉁한 표정으로 앉았다.

‘굉장히 불편한 조합이네.’

백번 양보해서 제국과 마탑 조합으로 나뉘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숨통이 트였을 텐데.

“안색이 좋지 않군요, 그웨니르 영애. 너무 힘들다면 마차를 세울까요?”

속으로 아쉬움을 흘리고 있는 가운데, 내 표정을 살핀 린든이 걱정스럽게 물음을 던졌다.

단테는 기다렸다는 듯 주위에 흔들림을 가라앉히는 마법을 사용했다.

“이제 더 흔들리지 않을 테니 안심해라. 불편하면 회복 마법을 걸도록…….”

“말은 고맙지만 괜찮아요.”

흔들림이 적으니 편해진 건 사실이지만 애초에 멀미가 문제인 게 아니라서.

내 대답이 그리 미덥지 않았던 모양인지 두 사람은 한참을 걱정스러운 표정을 거두지 못하다가 결국 한발 물러났다.

이제 조금 조용해지나 싶을 때였다.

“레이프 님, 지금이라면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단테는 그웨니르 저택에서 멀어진 것을 확인한 뒤 물음을 던졌다.

레이프가 적당히 입을 맞춰 말한 것에 대해 여전히 궁금증을 품고 있던 모양이었다.

머리가 나쁜 게 아님에도 지금까지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단테를 바라보는 가운데, 레이프만큼은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마탑에 이런 마법사가 한둘이 아니다 보니 익숙한 모양이었다.

“오해를 살 만한 일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취한 선택이야. 마법의 영향을 제쳐 두더라도 세이딘의 저택 사람들은 세이딘을 끔찍하게 아끼거든. 이 정도 언질도 안 해 놨으면 출발하는 데 한참 걸렸을 거야.”

어찌나 우리 저택을 잘 파악하고 있던지 저택의 하나부터 열까지 구구절절 맞는 소리뿐이었다.

그럼에도 단테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이었다. 그가 살아온 환경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대마법사 겸 마탑주라는 특성상 언제나 자유로이 돌아다닌 데다 남의 눈치라곤 눈곱만큼도 보지 않는 성격까지 더해지니 누군가가 붙들고 귀찮게 군다는 것 자체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것이었다.

“그렇게까지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돼.”

이를 아는 레이프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단테는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어쩐 일이래?’

레이프 신봉자라 해도 과언이 아닌 단테가 처음으로 레이프의 말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이어진 말은 여러 의미에서 이마를 짚게 했다.

“세이딘과 관련된 일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순간 마차 안의 온도가 영하로 내려간 것처럼 냉기가 풀풀 날렸다.

공략캐들의 시선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단테에게 쏠려 있었다.

‘아주 눈으로 사람 죽이겠네, 죽이겠어.’

단테의 직구는 들을 때마다 놀랍긴 했지만, 그와 별개로 너무도 노골적인 공략캐들의 태도가 난감함을 넘어서 두렵게 느껴졌다.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저대로 내버려 두면 집착 모드가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어떻게든 린든과 이티엘을 달래느라 쩔쩔맸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두 번은 없어.’

나는 비장하게 다짐을 다지며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단테와 그를 노려보던 공략캐들의 관심이 전부 내게로 쏠렸다.

그다지 내키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분위기 전환을 위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그 정도면 설명은 충분한 거 같으니 슬슬 신전에 도착하면 어떻게 할지 샌드위치라도 먹으면서 상의해 볼까요?”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로 넘실거렸다.

안다, 잘 나가다 갑자기 샌드위치를 언급했으니 당황스러울 만하다는 거.

그렇지만 별수 없었다. 꼭두새벽부터 짐을 싸느라 정신없던 탓에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데다 언제쯤 돌아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체력 보충은 필수 불가결이었다.

“그러자.”

“그러도록 하지.”

대답은 동시에 들려왔다. 내가 배고프면 힘들어하는 걸 아는 레이프와 단테였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럴 땐 좀 든든하네.

이를 모르는 이티엘과 린든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이, 레이프와 단테는 나를 도와 바구니에서 음식을 하나둘 꺼내기 시작했다.

“굉장히….”

“많군요.”

마차에 비치된 테이블에 빼곡히 찬 음식들을 바라보며 이티엘과 린든이 각자 한마디씩을 던졌다.

‘과연 앤이라니까?’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음식들을 마차의 테이블 위에 꺼냈다.

내 유능한 하녀는 샌드위치뿐만 아니라 여러 음식들을 종류별로 챙겼다. 그중에는 디저트도 있었다.

이티엘과 린든이 보기엔 많은 모양이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대식가인 단테까지 낀 이상, 이 정도는 적당히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우리는 푸짐한 식사를 하면서 앞으로 신전에 도착하면 할 일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앞서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해 둔 바가 있기에 그리 오래 걸리는 얘기는 아니었다.

우선 계획은 이러했다.

이티엘을 제외한 우리는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추수제를 위해 기도하러 신전에 온 황제의 측근들인 척 위장한다.

듣자 하니 원래 이 시기에는 추수제를 위한 기도를 하러 황제가 측근들을 대동하고 오기 때문에 의심받을 일은 없다고 했다.

본격적인 계획은 기도실에 안내받은 후부터 시작된다.

“배정받을 기도실은 나와 측근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곳이네. 때문에 주위에 성기사단이나 사제들은 없을 거야.”

“왜죠?”

“황실을 믿는다는 일종의 신뢰 표시야. 성기사들 대신 직속 기사들을 세울 수 있게 해 주는 거지.”

신전과 황실이 무척이나 친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친한 줄이야.

나는 떨떠름해하면서도 잘됐다고 생각했다.

에이브와 아티야를 찾기 위해 기도실에서 사제복으로 갈아입고 돌아다닐 예정인데 기도실의 경비가 삼엄하면 목적을 달성하기도 전에 들킬 가능성이 있었다.

기도실에서 나와서는 곧장 고위 사제들의 기도실로 향할 것이다.

살펴본 바로는 황제의 기도실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가는 길에 누군가에게 들킬 위험도 낮았다.

고위 사제들의 기도실은 신전 본관을 제외하고는 가장 신성력이 밀집된 곳이었기 때문에 좀처럼 감지가 쉽지 않았다.

뭐 어쩌겠는가. 여기서부터는 별수 없이 발로 뛰어다녀야지.

“그래서 준비한 것이 있다.”

거기까지 이야기가 오가던 중, 단테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유리병은 정확히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의 머릿수에 맞게 준비되어 있었다.

단테는 무엇인지 물어볼 새도 없이 설명을 늘어놓았다.

“지난번에 말한 신성력을 막아낼 수 있는 약이다. 그리고 이건 신성력을 감지할 수 있는 약이고.”

반대편 품에서 다른 유리병을 꺼내는 단테는 어쩐지 들뜬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언제 이런 걸 만들었어요?”

신전에 가기로 한 날로부터 지금까지 고작 3일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단테는 그사이에 대단한 걸 만들어 냈다.

감탄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자 단테는 오늘 날씨를 말하듯 평온하게 대꾸했다.

“그때 모여서 대화를 하고 돌아가자마자 만들었다. 마침 이전에 구했던 신성력 샘플이 있어서 빨리 만들 수 있었어.”

“신성력 샘플?”

“아, 그건….”

설명하려던 단테는 드물게도 말끝을 흐리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머리를 번뜩이며 스쳐 갔다.

나는 끙끙대면서도 설명하려 입을 달싹이는 단테를 서둘러 막았다.

“설명은 됐어요. 그렇게 궁금했던 건 아니니까.”

―또로롱

아, 이놈의 호감도!

‘하도 이러니까 무슨 말을 하기가 무섭잖…. 어?’

속으로 투덜대며 시스템창을 연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알림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단테의 호감도가 떨어졌습니다.]

‘떨어지기도 해?’

순간 당황했지만 한발 물러나 생각해 보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바이올린과 꽃미남들>에서도 어떤 선택지를 고르느냐에 따라 호감도가 왔다 갔다 했으니까.

오히려 지금까지 호감도가 떨어지지 않고 오르기만 한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 마법사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껄끄럽게 들릴 수도 있으니 말이야.”

한편 단테는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무표정한 얼굴에 어린 옅은 감정은 명백한 서운함이었다.

나는 찜찜함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애써 모른 척하며 입을 열었다.

“그, 이걸 먹으면 신성력을 감지할 수 있다는 거죠?”

“…그래, 하나는 신성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약이고.”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대답한 단테는 슬그머니 레이프를 바라보았다. 서운함으로 넘실거렸던 눈동자는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레이프 님, 부족한 실력이지만 괜찮으시다면 꼭 드셔 주셨으면 합니다.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레이프는 마법약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모처럼 잘 만든 것 같으니 도움 좀 받을게.”

“감사합니다!”

“…….”

하여간 이렇게 덕질이 무섭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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