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14장. 준비는 거창하게 (4)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 뭐?!”
저번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라도 한 건 아닐까 싶어 조마조마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레이프는 어깨를 으쓱였다.
“갑자기 다가가는 것이 싫다고 하니 물어보는 거야. 이러면 조금이나마 마음을 준비할 수 있잖아.”
아무렇지 않은 투였지만 내가 어떤 부분을 어려워하는지 충분히 알고 말하는 것이었다.
‘하여튼 눈치는 귀신같이 빨라요.’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을 들켜 땅을 파고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래 봐야 시간 낭비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괜한 힘을 빼지 않는 방법을 택했다.
“알았어, 대신 조금이라도 쓸데없는 짓을 하면……. 알지?”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웃음기로 가득했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진지했다.
이런 땐 그냥 평소처럼 말하지 그러니?
어떻게든 관심을 받으려는 노력이 가상한 나머지 나는 입안에 맴도는 말들을 전부 삼킨 채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프는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싹 거리를 좁혀 왔다.
내게서 눈을 떼지 않는 호박빛 눈동자는 열기로 가득했다. 그 안에 있는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져 나도 모르게 바싹 숨을 삼키고 말았다.
간질거리면서도 무거운 공기 속에서 레이프의 팔이 나를 향해 뻗어 왔다.
가까워지는 거리만큼이나 세기를 더해 가는 심장 소리로 인해 귓가가 시끄러울 지경이었다.
영원 같은 시간 속에서 레이프의 손은 내 어깨에 닿았다.
평소와 달리 정중한 태도에 이제 나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이런 거라면 차라리 불쑥불쑥 거리를 좁히는 게 나을지도.’
시답잖은 생각을 진지하게 하던 것도 잠시, 어깨에서부터 퍼지는 빛에 이목이 쏠리다 보니 부산스러웠던 감정들이 자취를 감췄다.
레이프의 손에서 시작된 황금빛은 내 어깨를 거쳐 망토 전체로 스며들었다.
방금 전 마법을 사용해 봐서 그런지 주문 없이 이런 기운을 드러내는 것이 새삼 무척이나 신기하게 느껴졌다.
마침내 모든 빛이 스며들자 레이프는 어깨에서 손을 거두며 한 걸음 물러났다.
온기가 사라진 자리로 스치는 서늘함에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세상에,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무심코 떠오른 생각에 나는 속으로 펄쩍 뛰었다.
다짐을 다진 게 언젠데 그새를 못 참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굉장히 부끄러웠다.
“망토에 마나를 주입했어.”
한편 레이프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모르는 척 한마디를 던졌다.
태도를 봐서는 어느 정도 짐작을 한 것 같지만 물어보기엔 자폭하는 지름길인지라 시치미를 떼고 무슨 말인지 쉽게 설명하라는 시선을 보냈다.
“마나를 주입해서 재사용이 가능한 시간을 단축시켰어. 앞으로 한두 시간 후면 아까처럼 사용할 수 있을 거야.”
흡사 휴대폰 충전기를 연상케 하는 설명에 나는 곧장 납득했다.
동시에 사용하고 나면 레이프에게 가져가야겠다는 소소한 다짐을 다졌다.
“세이딘, 왜 그렇게 음흉한 표정을 짓는 거야?”
뼈 때리는 물음에 뜨끔하는 것도 잠시, 이렇게 좋은 아이템을 받아 놓고 충전기 대용으로 생각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는 노릇이었던지라 나는 정색을 함으로써 레이프의 의문을 떨치려 했다.
“누가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는 거야?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돌아가…, 기는 힘들겠네.”
나는 그제야 연무장이 초토화된 광경을 확인했다.
새벽의 망토를 사용하면 금세 복구되겠지만, 그렇게 하면 기껏 레이프가 충전해 준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
그럼 선택지는 결국 하나였다.
“데스티니.”
부르는 것과 동시에 빤히 쳐다보는 나를 보며 레이프는 어이없어하면서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어.”
대답을 마친 레이프가 손을 튕기자, 갈아엎은 밭처럼 처참했던 연무장이 눈 깜박할 사이에 제 모습을 되찾았다.
방어막까지 거둔 레이프는 상큼하다 못해 눈부신 미소를 피워냈다.
“그럼 갈까?”
레이프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갑작스러운 에스코트 동작에 당황한 나는 놀란 눈으로 손과 레이프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안 잡아 줄 거야?”
조금도 해롭지 않다는 듯 어필하는 화사한 미소에 속으로 헛웃음을 머금었다.
무슨 속셈인지 알 수 없는 건 여전했지만, 예전과 다른 점이라면 그 안에는 호감도 한 스푼이 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외면하며 레이프의 손을 슬그머니 밀어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얼른 가자, 이젠 진짜로 서둘러야 해.”
가만히 있으면 실랑이가 길어질 것 같아 나는 걸음을 옮겼다.
곁을 스치며 레이프의 시선이 따라붙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너무 원망하지 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랑 엮이는 건 부담스럽단 말이야.
* * *
나머지 공략캐들이 찾아온 것은 우리가 막 저택에 들어섰을 때였다.
“아, 마침 저기 오는군.”
“좋은 아침이군요, 그웨니르 영애. 산책이라도 다녀오셨습니까?”
“그런 것치곤 표정이 좋지 않은데.”
나를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한마디씩 건네는 공략캐들의 모습은 조잘대는 새를 연상시켰다.
반짝이는 공략캐들의 시선의 중심에 선 나는 허허 웃음을 흘렸다.
그들은 지금부터 천족을 잡으러 가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태평하기 짝이 없었다.
“자, 전부 모인 것 같으니 어서 가도록 하지. 마차를 준비해 뒀네.”
이티엘의 말과 함께 모두가 저택을 나서려 할 때였다.
“아가씨!”
다급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흐뭇하게 쳐다보던 사용인들 사이를 헤치고 나온 것은 앤이었다. 겨우 내 앞에 선 그녀는 가쁜 숨을 가다듬은 뒤, 커다랗고 묵직한 바구니를 건넸다.
“앤, 이건…?”
“샌드위치와 쿠키를 좀 챙겼어요. 가면서 드세요! 밖에 너무 오래 두면 다 쉬어 버리니 얼른 드시는 거 잊지 마시고요.”
“응?”
뜬금없이?
영문을 몰라 눈을 끔벅이고 있자, 기다렸다는 듯 레이프가 대꾸했다.
“잊었어, 세이딘? 네가 너무 바빠서 정신이 없으니 대신 피크닉 준비를 부탁해 달라고 했잖아.”
내가? 대체 언제?
아무리 머릿속을 더듬어 봐도 그런 부탁을 한 기억은 눈곱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두 눈을 끔벅거리는데 레이프가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슬그머니 내 팔을 콕 찔렀다.
그제야 나는 납득했다.
그는 이 인원이 모인 그럴듯한 핑계로 피크닉과 도시락 준비를 떠올린 것이었다.
‘이건…, 좀 고맙네.’
가뜩이나 남다른 호들갑을 자랑하는 사용인들이었던지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간다 했으면 여기저기서 이유를 묻고 귀찮게 굴었을 것이 분명했다.
‘거기다 부모님까지 합세하면….’
그 모습을 상상한 나는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레이프가 신경 써 준 덕에 살았다. 진심으로.
“아, 맞다. 하도 정신이 없어서 깜박하고 있었네. 고마워, 레이프. 그리고 앤도.”
“뭘 이런 걸 가지고.”
“더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아직 필요하시면 더 가지고 올게요.”
“아냐, 이 정도면 충분해.”
한편 사랑을 제외하고는 눈치가 번쩍이는 다른 공략캐들도 어떤 식으로 상황이 흘러가는지 짐작한 듯싶었다.
이티엘은 모르는 척 나를 향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마침 식사도 안 했는데 잘됐군. 잘 먹도록 하지.”
“그웨니르 영애는 섬세하시군요. 그럼 저녁은 돌아오는 길에 저희 상단에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하도록 하죠.”
린든까지 합세하면서 훈훈한 분위기가 조성되는가 싶었지만, 문제는 단테였다.
아직도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한 그는 느닷없이 피크닉을 가기로 한 설정을 연기하기 시작한 우리를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피크닉? 세이딘, 그게 무슨….”
나는 서둘러 단테의 입을 막고 속삭였다.
“나가서 설명할 테니까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알겠어요?”
단테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폭탄을 막아냈다는 안도감과 함께 뒤를 둘러보았다.
이 수고를 전혀 모르는 앤과 저택의 사용인들은 그저 단테와 나를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그 안에 담겨 있는 의미는 너무도 명백했다.
‘우리 아가씨가 어떤 분을 선택할지 기대되는걸?’
데스티니의 영향으로 전보다 배로 나를 아끼게 된 사용인들은 내가 이들 중 어떤 사람과 잘될지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 그럼 얼른 가 볼까요?”
이 이상 시선을 받기 싫었기에 서둘러 앞장서서 현관문을 향해 성큼 걸어갔다.
아무래도 사용인들은 내가 쑥스러워한다고 단단히 오해를 하는 모양이었다.
“세이딘 아가씨, 힘내세요!”
비장한 목소리로 외친 앤을 시작으로 사용인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응원을 쏟아 냈다.
“전 누구든 좋아요!”
“피크닉 잘 다녀오시고요!”
“자존심 세운다고 마음을 속이는 짓은 하지 마세요!”
사용인들이 진지하면 할수록 부끄러움은 오롯이 내 몫이 되었다.
나는 저택 바로 앞에 있는 인공 연못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더는 안 되겠어.’
여기저기서 터지는 일만으로도 버거운데 데스티니의 마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까지 상대하려니 이제는 정신이 가출해 버릴 것만 같았다.
가뜩이나 욜로를 만끽하지 못하는 것도 불만스러운데 이 이상 종이 인형처럼 맥없이 휩쓸리는 것은 사절이었다.
‘이번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벗어날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아티야가 성스러운 방울을 쥐고 흔들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싫다고 해도 있는 힘을 다해서 해내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굳건히 한 나는 멀뚱히 서 있는 공략캐들을 재촉했다.
“뭐 해요? 빨리 안 오고!”
내 말에 제일 먼저 움직인 레이프가 곁에 붙어 서며 속삭였다.
“어때, 세이딘?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밖에 없지?”
뭐래, 정말!
나는 얼굴을 왈칵 구기며 레이프의 팔을 찰싹 쳤다.
가뜩이나 짜증 나 죽겠는데 헛소리도 풍년이었다.
뒤에 따라오는 공략캐들을 확인한 뒤 이티엘의 마차가 서 있는 곳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다.
아직 신전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앞날이 캄캄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