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84)화 (84/122)

제84화. 14장. 준비는 거창하게 (3)

“그래서? 어떻게 멈춰야 해?!”

연무장의 이곳저곳이 움푹 팬 것을 보고는 다급히 물음을 던졌다.

이제야 왜 처음에 레이프가 방어막을 쳤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매서운 속도를 내며 방어막에 처박히는 얼음은 보는 것만으로도 살벌했다.

그럼에도 레이프는 태연자약하기만 했다.

‘아, 진짜!’

그 모습에 짜증이 치밀어 올라 레이프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데스티니!”

반면 레이프는 나를 보며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눈부신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 나는 혈압이 바싹 올랐다.

“지금 웃음이 나와?!”

“알았어, 알려 줄게.”

“제발 뭐라고 하기 전에 먼저 알려 줄 순 없는 거야?”

“당연히 안 되지. 재미가 없는걸.”

도리어 당당한 레이프의 말에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사실 신이 레이프를 봉인한 건 금기를 어겨서가 아니라, 하도 저렇게 깐족거려서가 아닐까?’

그저 흘러가는 대로 떠오른 의식이었지만 제법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레이프는 가늘어진 내 시선을 마주하더니 찬란하게 빛나던 미소를 싹 지웠다.

“그런 거 아냐, 세이딘.”

‘어라? 어떻게 안 거지?’

정색과 함께 이어진 말에 합리적인 의심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설마 다시 생각이 읽히기 시작한 건가?’

퍼뜩 떠오른 생각에 서둘러 착용한 아이템들을 확인했다. 여전히 철벽의 에메랄드가 활성화되어 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속으로 안도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음을 던졌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내 성격 때문에 신에게 봉인당했을 거라 생각한 거 말이야.”

…정말 어떻게 안 거지?

그렇게 콕 짚어서 말하면 시치미를 떼기도 민망해지잖아.

아니나 다를까 레이프는 이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얼굴에 다 티 나, 세이딘.”

아, 그래?

“어머나, 나도 참.”

머쓱함을 감추려 뻔뻔하게 구는 나를 보며 레이프는 무척이나 할 말이 많은 눈치였지만,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인지 블리자드가 몰아치는 주위를 둘러 오며 말을 이었다.

“마법을 멈추는 방법도 비슷해. 구동되는 마법들이 사라지는 것을 상상한 뒤에 그것을 강하게 바라면 끝이야.”

“주문은? 없어?”

“세이딘, 시동 마법이면 몰라도 마법을 멈출 땐 주문을 외우지 않아.”

“왜?”

“너무 멋없잖아.”

제발 진지한 표정으로 헛소리를 늘어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모든 마법사들이 그렇게 생각해. 뭣하면 단테에게 물어봐도 돼.”

다른 사람도 아닌 대마법사가 그렇다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나는 여전히 매섭게 몰아치는 눈과 얼음 덩어리들이 사라지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그것들이 사라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자 흉흉했던 광경은 거짓말처럼 단번에 정리가 되었다.

“봤지?”

가벼운 물음에 그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의지를 따라 실행된 마법들은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투성이여서 꿈을 꾸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회피하기엔 몇 년째 이 세계에 살고 있는 나 자신부터가 말도 안 됐기에 순순히 받아들일 뿐이었다.

‘무엇보다 손해 보는 일도 아닌걸.’

오히려 손해는커녕, 넙죽 받아도 될까 싶을 정도로 든든한 아이템이었다.

처음 마법을 사용함으로 인해 밀려온 흥분을 가라앉히자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새로운 힘을 얻게 됐다는 성취감이었다.

“레이프! 이거 정말 내가 받아도 되는 거야?”

두 눈을 반짝이며 묻는 질문에 레이프는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쓸데없는 고철 덩어리들을 두고 간다면.”

‘그럼 그렇지.’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곧장 납득했다.

레이프의 말은 어느 정도 예상한 것이었던 데다, 나쁜 조건도 아니었기에 거절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수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더니 레이프는 느닷없이 손을 내밀었다.

“뭐야? 손 달라고?”

“아니, 망토 돌려달라고.”

“방금 전엔 준다며!”

“아직 무기들을 가방에서 정리 안 했잖아? 제대로 확인하고 나면 줄게.”

“뭐? 그런 게 어딨어?!”

황당함에 높아지는 내 언성과 달리, 레이프는 무척이나 평온한 표정이었다.

경험상 저런 때는 어떤 말을 해도 도돌이표였다.

‘활 정도는 챙겨 두려 했는데.’

속으로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뒤, 한숨 섞인 투로 말했다.

“알았어, 그럼 얼른 가서 처리하….”

“그러지 않아도 돼, 세이딘. 혹시 몰라서 챙겼거든.”

레이프는 빙글 웃으며 제 팔을 들어 보였다.

언제 갖고 온 것인지 그의 손에는 내 마법의 가방이 쥐어져 있었다.

‘아주 작정하고 노렸구나!’

나와 마주한 호박빛 눈동자는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호를 그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맘에 안 드는 상황이었지만 마냥 레이프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설령 그가 꿍꿍이를 가졌어도 내가 좀 더 눈치 빠르게 행동했으면 될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아, 정진하자.’

스스로를 다독이며 레이프가 바라는 대로 챙겨 뒀던 무기들을 바닥에 쏟아 냈다.

귀신 같은 레이프는 리스트에 있던 무기들을 떠올리며 하나도 빠짐없이 있는지 확인한 뒤에야 마침내 내게 새벽의 망토를 주었다.

깐깐하기도 하지.

“그럼 사용법은 충분히 익힌 것 같으니 주의사항을 알려 줄게.”

보통은 그걸 먼저 알려 주지 않니? 나는 레이프를 노려보며 비아냥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참 빨리 알려 준다.”

“아, 미안. 아까부터 알려 주려고 했는데 틈이 안 나서 그럴 수 없었어.”

민들레 솜털만큼이나 가벼운 대답에 한 귀로 듣고 흘렸다.

틈이 안 나긴 무슨, 말할 기회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레이프 본인이 일부러 설명하려 하지 않았을 뿐.

이 이상 실랑이를 이어 가 봐야 시간 낭비였기에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며 대꾸했다.

“됐으니까 얼른 그 주의사항이 뭔지나 말해. 시간 없어.”

혹시나 해서 드레스 자락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확인해 보니 마침 다른 사람들이 도착할 시간이 코앞이었다.

레이프는 과장되게 놀란 척을 하다 매서운 내 시선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본론으로 돌아갔다.

“새벽의 망토는 어떤 마법이든 사용할 수 있지만, 그 대신 시간 제한이 있어.”

“뭐? 언제는 그런 거 없다며!”

“아, 그건 기능에 한해서 그렇단 거였어.”

이놈 봐라?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가네.

이젠 하도 기가 차서 별생각도 안 들었다.

어디 한번 더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자, 레이프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어 나갔다.

“마법의 사용 가능한 시간은 10분 정도야. 그리고 다시 마법을 쓸 수 있을 때까지는 최소 하루에서 최대 일주일 정도가 소요돼.”

그 정도라면 나쁜 조건은 아닌 것 같은데?

그보다도 다시 사용하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텀이 왜 그렇게 제각각인지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차이 나는 이유가 뭐야?”

“어떤 마법을 사용했는지에 따라 달라서 그래. 위력이 강한 마법을 쓸수록 다시 망토를 사용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려.”

“그럼 내가 이 망토를 사용할 수 있는 건 일주일 뒤에나 가능하단 말이네?”

나는 질문을 하는 것과 동시에 그저 난감한 마음이 들 뿐이었다.

정신 나간 기행을 벌이는 에이브를 떠올리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새벽의 망토를 사용하게 될 것이었다.

레이프를 비롯한 다른 공략캐들이 곁에 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든 잡히지 않길 바라는 그로서는 그들과 나를 떨어뜨려 놓으려고 할 가능성이 높았다.

뿐만 아니라 이후에 아티야와 무사히 대화가 끝날 거란 보장도 없어 그때까지는 망토를 사용할 수 있길 바랐는데, 많은 것이 틀어지고 달라져 버렸다.

“역시 무기들을 다 챙겨야….”

“망토에 대한 거라면 걱정하지 마.”

대답을 마친 레이프는 내가 있는 방향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와 동시에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조금도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레이프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향해 한 마디를 뱉었다.

“거리.”

그제야 알아들은 레이프는 작은 탄성을 터뜨리는가 싶더니 곧 불만을 토로했다.

“너무해, 세이딘. 설명을 위해선 어쩔 수 없단 말이야.”

“너무한 건 너야. 탓하려면 평소의 네 행동을 탓하도록 해.”

차분한 대꾸에 레이프는 입을 꾹 다물었다.

몇 번이나 꾸준히 말했는데도 말을 들어먹지 않는 건 전적으로 그의 잘못이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건 당연했다.

한편으로는 이 상황이 이질적이면서도 동시에 신기하게 느껴졌다.

예전이라면 레이프에게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행동을 했지만, 지금은 전혀 그러지 않고 있으니까.

‘생각해 보면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

항상 이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탓에 숨 돌릴 여유는 일절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한번 떠오른 기억들은 봇물 터지듯 밀려와 머릿속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레이프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나와 사랑을 찾아 떠나지 않겠어, 세이딘?’

‘그나저나 아가씨는 언제까지 모른 척할 거야? 내가 보이잖아.’

‘널 놓고 싶지 않았어.’

‘널 응원하겠다는 마음은 변함없어. 하지만. 네가 날 봐 줬으면 하는 마음도 진심이야. 그것이 거짓이라도.’

시간의 흐름을 따라 흘러가는 기억들을 훑은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처음부터 레이프는 달달하기 짝이 없는 태도를 보였지만, 때때로 눈동자에 스치는 감정들은 금방이라도 허점을 보이면 달려들 기회를 노리는 맹수와도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를 보는 레이프의 시선은 가랑비에 젖듯이 서서히 명확하게 바뀌어 갔다.

그리고 현재, 그는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나를 향해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쓸데없는 걸 떠올려 버렸어.’

나는 애써 생각을 떨치기 위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누군가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점점 상념으로 빠져들어 가던 중, 물음이 날아들었다.

“그럼 다가가도 될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