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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83)화 (83/122)

제83화. 14장. 준비는 거창하게 (2)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칠흑같이 까만 망토가 나타났다.

나는 서둘러 내게 날아오는 망토를 두 손으로 받았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천 안에 반짝거리는 것이 들어가 마치 별무리 진 밤하늘을 보는 것만 같았다.

고급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망토를 한참 바라보다가 레이프에게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걱정이 가득했던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의문 섞인 내 시선을 바라보던 레이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새벽의 망토야.”

기다린 시간 대비 형편없는 대답에 조용히 마법의 가방에서 몰니르를 꺼냈다.

그리고 옅은 미소로 레이프를 바라보았다.

“설마 고작 그 한마디 하려고 기다리게 만든 건 아니지?”

“정말 어떤 상황이 와도 대비할 수 있을 것 같은걸?”

“진지하게 묻는 거니까 농담 그만해, 레이프.”

내 눈초리가 뾰족해지는 것을 발견한 레이프는 두 손을 들었다.

평소처럼 돌아온 태도를 좋아해야 할지 잠시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참 아름다운 망토지?”

뜬금없는 물음이 아닐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싶어 대답 대신 더욱 눈에 힘을 주었음에도 레이프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미소와 함께 안 그래도 가까운 거리를 더욱 좁혀 왔다.

“그렇게 보지 말았으면 해, 세이딘. 네 열정적인 모습을 보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떨리거든.”

“알았어, 알았으니까 거리 좀…!”

다시금 의식의 저편으로 멀어졌던 거리가 의식되기 시작하니 머리가 핑핑 돌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몰니르를 슬그머니 들어 올렸다.

레이프는 한때 자신이 발명한 망치가 상체와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짓더니 상체를 뒤로 뺐다.

“내 아가씨는 매정하다니까.”

얼굴 가득 아쉬움을 드러낸 레이프는 정확히 세 걸음을 물러났다.

그런들 내가 마음이 약해질 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었다.

그제야 긴장을 떨쳐 낸 나는 더욱 무심하게 대꾸했다.

“됐고, 이 망토가 뭔지 설명이나 해.”

선을 긋는 내 말에 레이프도 장난기를 쏙 뺀 표정으로 돌아가 순순히 망토에 대해 설명했다.

“새벽의 망토는 내 발명품이야.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상당히 잘 만들어진 수작 중 하나이기도 해.”

대체 얼마나 괜찮길래 저렇게 자화자찬을 하는 거야?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는 레이프라고 해도 그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극히 드물었다.

그러다 보니 기대감은 자연스레 커질 수밖에 없었다.

말 대신 재촉의 시선을 보내자, 그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 망토를 착용하면 마법사가 아닌 사람도 마법을 구사할 수 있어.”

“나도?”

“응.”

담백한 대답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법은 철저한 재능의 영역이었다. 그런 것을 망토 하나 두르는 것만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희대의 발명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놀랍건만, 레이프의 설명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마법이든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어.”

“어떤 마법이든…?”

“그래, 어떤 마법이든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가능해. 봉인되기 전 내가 할 수 있는 마법은 전부 집어넣었거든.”

“세상에, 이걸 왜 이제야 줘?!”

레이프의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나는 새벽의 망토를 고이 접어 오른팔에 얹은 뒤,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 이제 곧 모두 올 거야.”

느닷없이 방을 나서려는 나를 보며 레이프가 의문을 드러냈다.

레이프의 말대로 약속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렇다 해서 매우 촉박한 건 아니었다.

그러니 그 시간을 활용해 보는 수밖에.

나는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잠시 실험 좀 해 보게.”

*  *  *

망토의 성능을 확인하기 위해 레이프와 함께 그웨니르 기사단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저택 곳곳에서 각자 맡은 일을 하고 있을 시간대여서 그쪽으로는 사람들이 없을 터였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연무장은 텅 비어 있었다.

평소의 활기찬 모습을 생각하면 썰렁하기 짝이 없었지만, 레이프의 발명품을 실험하기에는 딱이었다.

연무장 가운데에 서서 새벽의 망토를 둘렀다.

밤하늘처럼 은은한 빛을 띠는 망토는 내가 보기에도 마법사스러움이 물씬 드러났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모습을 확인하던 것도 잠시, 나는 레이프를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그래, 세이딘?”

“몰라서 물어?”

쏘는 듯한 내 물음에도 레이프는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한 모습이었다.

다 알면서 시치미를 떼는 모습에 기가 찼지만, 신경이 거슬리니 한시라도 빨리 싹을 쳐내는 게 훨씬 나았다.

나는 속으로 참을 인을 몇 번이고 말한 뒤 말을 이었다.

“이제 막 걸음을 뗀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 같은 눈으로 쳐다보지 말아 줄래?”

“굉장히 설명이 자세한걸?”

“나라고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거든?”

그런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런 시선인데 어떡하라고!

밀려오는 짜증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노려보자, 레이프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망토를 이리저리 보는 게 귀여워서 그만.”

“귀, 귀여…….”

아득히 멀어지려는 정신을 겨우 붙들었다.

낯간지러운 말들을 하루 이틀 들은 것이 아니다 보니 이 정도는 가벼운 수준에 속했다.

그럼에도 레이프의 말은 이상하리만치 귓가를 맴돌아서 난감할 지경이었다.

‘정신 바짝 차려야지.’

스스로를 향해 중얼거리며 눈에 힘을 가득 줬다.

“세이딘, 굉장히 기합이 많이 들어간 것처럼 보이는데…….”

“신경 쓰지 마. 원래 이랬으니까.”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따라붙는 시선 끝에 얻어 낸 대답은 영 기분을 찜찜하게 만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그런 것보다도 간질간질한 느낌을 떨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레이프는 더 묻지 않고 화제를 전환했다.

“사용해 보고 싶은 마법은 있어?”

“규모가 큰 마법이라면 뭐든 좋아.”

나는 머릿속으로 TV나 만화에 나오던 마법사들을 떠올렸다.

어릴 적부터 먹고살기 바빴던 탓에 그런 것들은 현실성이 없다고 외면했었지만, 그럼에도 내심 한 번쯤은 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동경했더랬다.

‘어떤 기분이려나?’

다른 건 몰라도 당하는 입장에서 뭣같은 기분이 든다는 건 확실했다.

나는 원하는 마법을 사용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조금씩 기대를 부풀리다 문득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레이프가…, 말이 없네?’

원래라면 이런저런 말을 조잘거렸을 레이프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린 그를 보며 나는 그제야 무리한 요구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아무리 뛰어난 마도구라 하더라도 대마법사 수준의 마법을 담아내는 건 힘들겠지.’

나는 아이템 창고를 힐끗 살펴보았다.

지금껏 쟁여 둔 아이템들 중에서도 성능이 훌륭한 것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사용할 수 있는 기한이나 능력치의 한도 등, 여러 가지로 제한이 있었다.

그러니 레이프가 만든 것이라 해서 예외는 아닐 터였다.

“레이프, 미안. 아무래도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한 것 같은데 난 다른 거라도 괜찮으니…….”

“세이딘. 물, 불, 바람, 전격, 얼음 중에 어떤 게 좋아?”

“응?”

“마법 말이야. 어떤 게 가장 규모가 큰 마법일까 고민해 봤는데 다 비슷비슷한 것 같거든. 그러니 규모보다는 선호하는 속성으로 마법을 시전하는 게 어떨까 싶어서.”

“제약이 있는 게 아니었어?”

“제약? 무슨 제약?”

오히려 레이프는 의아한 시선으로 되물었다.

그는 멍청하게 눈만 끔벅거리는 나를 보더니 곧 무슨 말인지 알아차리곤 입가에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세상에, 세이딘. 설마 내가 그렇게 형편없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라 일반적인 마법도구들이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그리고 애초에 봉인이 풀리기 전의 힘으로 어떤 마법이든 사용할 수 있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잘 모르는구나, 세이딘.”

레이프는 대답과 동시에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연무장 주위로 얇은 막 같은 것이 돔처럼 생겨났다.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주위를 둘러보는 내게 레이프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마법의 출력만큼은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어. 그러니 마음껏 사용해 봐.”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이 이상 빼는 것은 실례되는 행동이었다.

나는 모 애니메이션에 나왔던 여왕이 얼음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장면을 떠올리며 말했다.

“얼음 마법을 쓰고 싶어.”

까다롭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무색하게 레이프는 상큼한 투로 말했다.

“그럼 블리자드가 좋겠네. 방법은 간단해. 머릿속으로 사용하고 싶은 마법의 이미지를 떠올린 다음에 주문을 외우면 끝이야.”

고작 그것만으로 엄청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여전히 믿기 어려웠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레이프의 말을 따랐다.

혹독한 추위와 얼음을 떠올린 나는 심호흡과 함께 입을 열었다.

“블리자드!”

힘찬 외침에 주위의 공기가 삽시간에 얼어붙는가 싶더니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쳤다. 그와 함께 크고 작은 얼음이 날붙이처럼 사방을 날아다녔다.

눈앞에 펼쳐진 자연재해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은커녕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훌륭한데?”

한편 곁에 선 레이프는 느긋한 감상을 보냈다. 압도적인 풍경에 어버버거리는 나와 달리, 그는 너무나 평온한 표정으로 블리자드를 구경했다.

“어떡할래, 세이딘? 계속 이대로 둘 거야?”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 블리자드를 구경하던 레이프가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름답게 호를 그리는 눈동자는 이 상황이 퍽이나 즐거운 듯싶었다.

“아니! 멈출래, 멈추고 싶어!”

처음에는 어릴 적 동경으로 두근거렸지만 지금은 그저 멈추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제야 알겠네.’

애니메이션의 여왕이 왜 그렇게 마법을 사용하는 데 두려워했는지 절절히 이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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