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14장. 준비는 거창하게 (1)
성스러운 방울은 이벤트 보상이었던 랜덤박스에서 나온 아이템이었다.
처음에는 별것 아닌 걸로 치부하고 창고에 박아 놨지만, 조금 전에 아이템 설명을 읽고 생각을 달리했다.
[성스러운 방울]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방울. 신을 소환해 한 가지 소원을 빌 수 있다.
다시 봐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꿈같은 설명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지금껏 나오거나 모아 둔 아이템들은 도움이 되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편의적인 건 없었다.
당장이라도 성스러운 방울로 신을 소환해 이 거지 같은 상황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소원을 빌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쉽게 얻은 아이템은 그만큼 쉽사리 사용할 수 없었다.
성스러운 방울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붙었다.
[신의 호감을 산 자만이 사용 가능.]
‘참 졸렬하단 말이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젯밤, 자기 전에 방울을 흔들어 보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민망한 정적뿐이었다.
덕분에 나는 신의 호감을 사지 못했다는 사실만 뼈저리게 느끼고 자연스레 성스러운 방울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을 떠올렸다.
아티야 세르비아스.
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성녀이자 <바이올린과 꽃미남들>의 여자주인공.
그녀의 도움 없이는 신을 불러내기란 불가능했다.
‘이놈의 아티야 중심인 세상.’
아무리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해도 그렇지, 내가 사용할 수도 없는 걸 랜덤박스에 넣어서 어쩌자는 건데?
덕분에 다른 건 몰라도 신이 참 삐뚤어졌다는 건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치사하고 더럽고 황당하기 짝이 없었지만, 포기하기엔 성스러운 방울이 가진 효과는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아티야가 이 방울을 흔들게 하겠어.’
결심을 다지고 고개를 들었다. 생각을 하느라 느끼지 못했던 공략캐들의 이목이 단번에 몰려들었다.
이티엘과 린든을 시작으로 단테와 레이프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을 눈에 담았다.
징글징글하게 여겼던 이들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제법 든든한 전우처럼 느껴졌다.
“좋아요, 그럼 제 계획을 말하도록 할게요.”
심호흡 후 시작된 말과 함께 느닷없이 알림음이 울렸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시스템창으로 눈을 돌린 나는 옅은 미소를 흘렸다.
[공통 이벤트 – 흑염룡의 봉인을 풀지 못한 천족]
미쳐 가는 천족을 저지하고 그에게 붙잡힌 성녀를 구해 주세요.
▷보상 : 봉인의 열쇠 / 6000H / 각 캐릭터 호감도 증가
그것은 데스티니와 얽힌 이후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이벤트였다.
* * *
“세이딘, 준비됐어?”
“이제 다 됐어! 조금만 기다려.”
뒤에서 들려오는 물음에 나는 마법의 가방에 가발을 넣으며 대꾸했다.
마침내 리스트에 적힌 물품들을 다 챙기고 다시 한번 빠뜨린 것이 없는지 확인한 뒤 몸을 돌렸다.
레이프는 팔짱을 낀 채로 소파에 앉아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무언가 고민하는 눈치였다.
‘왜 저래?’
머릿속에 피어나는 의아함과 함께 고개를 갸웃거렸다.
긴 고민 끝에 레이프는 눈을 동그랗게 뜨는가 싶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한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세이딘, 혹시 바캉스 기분 내는 귀족 영애를 연기하려 하는 거야?”
“…뭐?”
이건 또 무슨 신명 나는 개소리람?
좀처럼 무슨 말인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도 레이프는 거침없이 제 주장을 펼쳐 나갔다.
“그런 거라면 지금보다 훨씬 화려하게 입고 짐도 좀 더 대놓고 가져가는 게 좋을 거야. 그래야 사제 놈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테니까.”
대체 어떻게 하면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기가 막히면서도 한편으로는 감탄스러울 따름이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짜증을 뒤로하며 겨우 대꾸했다.
“데스티니, 3일 전에 나눈 대화들 다 잊었어? 아티야를 구출하려고 가는 거잖아!”
“물론 기억하지. 하지만 그렇게 짐을 챙기니까 내가 모르는 계획이라도 생긴 건지 궁금해져서 말이야.”
달처럼 부드럽게 휜 호박빛 눈동자는 장난기로 가득했다.
궁금하긴 무슨, 다분히 놀리려는 표정이구만.
나는 얼굴을 왈칵 구기면서도 장난기 가득한 물음에 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 걸 대비해서 그런다, 왜!”
“대비하는 건 좋은데, 너무 많다 생각되지 않아?”
레이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음을 던지자, 나는 입을 벙긋거리다 다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내가 손에 쥐고 있는 필요한 목록이 적힌 종이는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래, 이건 좀 과하긴 하지.’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었던 바였기에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다 보니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변명에 가까웠다.
“…어쩔 수 없잖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이것저것 준비를 해 둬야지.”
나라고 해서 이러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동안 각양각색의 일을 겪다 보니 걱정만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져 어떤 상황이 닥쳐도 안심할 수 있게 준비하는 버릇이 생겨 버렸다.
레이프는 그런 나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한 그는 말없이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곧장 내게로 다가왔다.
“한번 볼게.”
지척에 선 레이프는 짧은 말과 함께 내가 들고 있는 리스트를 훑었다.
한없이 진지한 표정의 그와 달리, 나는 그 자세로 굳은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까워, 가깝다고!’
그렇게 리스트가 보고 싶으면 가져가서 보면 될 것을, 레이프는 굳이 내 어깨 너머로 바싹 몸을 숙인 채로 리스트를 보고 있었다.
덕분에 내 목과 어깨 언저리는 그의 머리카락과 숨결이 닿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더는 안 되겠어!’
이대로라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서 기절할 것이 분명했다.
더는 참을 수 없던 나는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디며 거리를 벌리려 했다.
그러나 레이프는 재빠르게 내 걸음을 쫓아 다시금 가깝게 거리를 좁혔다.
그 행동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레이프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왜 그러는데!?”
“뭐야, 이거?”
낮게 깔린 물음과 함께 호박빛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프가 나를 향해 정색하는 것은 무척이나 드문 일이어서 제법 당황스러웠다.
그 와중에도 내 입은 충실하게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보면 알잖아? 여차하면 필요할까 봐 챙긴 것들이야.”
이것만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했는지 레이프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아까보다 훨씬 더 깊어졌다.
“그래서 저런 무기들을 챙겼다?”
“내 몸 하나는 건사해야 할 거 아냐.”
이어지는 대답에 레이프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의 얼굴에 스친 감정은 명백한 불쾌감이었다.
레이프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느닷없는 물음을 던졌다.
“세이딘, 너 검 배운 적 있어?”
“아버지가 위험하다고 안 된다 하셨지.”
“창은?”
“검이 안 되는데 창이 됐겠니?”
“활은?”
“아슬아슬하게 허용 범위여서 배우긴 했는데 실력이 안 늘더라.”
“그럼 이 방패는?”
“방패도 사용법을 배워?”
긴 질의응답을 마친 레이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것과 동시에 곧장 대답했다.
“세이딘, 전부 놓고 가.”
언제나 장난기를 머금던 목소리는 칼같이 단호했다.
순간적으로 혼나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에 사로잡힌 나머지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레이프는 그런 나를 보고 아차 싶었는지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어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사용할 수도 없는 무기를 챙겨 봐야 짐만 될 뿐이야.”
“어쩐 일이야? 그런 말도 다 하고.”
“세이딘, 농담하는 거 아냐.”
정색하는 레이프의 대답에 나는 괜히 머쓱해졌다.
평소와 역전된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놀라웠다.
레이프가 이런 걸로 진지하게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나는 침착하게 온갖 무기들을 챙긴 이유를 늘어놓았다.
“사용할 줄 모르는 건 맞아. 하지만 그렇다 해서 꼭 그 용도대로 쓰라는 법은 없잖아?”
“그럼 어떤 식으로 쓸 건데?”
“그건… 때가 되면 알겠지.”
내가 생각해도 빈곤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금처럼 찬란한 호박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괜히 마음이 콕콕 찔리는 가운데, 레이프가 진지한 빛을 지우며 짙은 한숨을 토해 냈다.
“세이딘, 넌 이런 걸 챙길 필요가 없어. 내가 널 지킬 거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마법도 걸어 줬잖아. 그리고 다른 사람들 또한 널 지킬 거고.”
레이프는 답답함과 안타까움을 드러냈지만 나는 그럼에도 선뜻 안도할 수 없었다.
내가 바라보는 것은 코앞에 닥친 일이 아니라 그 뒤에 있을 일이었으니까.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던 중, 레이프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삽시간에 얼굴을 굳혔다.
“세이딘, 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하여간 눈치도 빨라요.
나는 최대한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 대꾸했다.
“딱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
“그런데 이런 것들을 챙겼다고?”
“언제나 상황이 예상한 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잖아? 너나 다른 사람들이 곁에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거고.”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면서도 힐끗 레이프의 눈치를 살폈다.
제법 태연하게 대처했다고 생각했지만 레이프에게는 이 정도로는 부족한 모양이었다.
그렇다 해서 솔직하게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고작 추궁 좀 받은 걸로 모처럼 얻은 가능성을 날려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알았어.”
한참 동안 이어지던 침묵을 깬 것은 레이프였다.
무겁고 긴 시간 동안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했는지,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제법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그럼 이거라도 가져가.”
짧은 말과 함께 레이프는 손가락을 튕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