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13장. 때늦은 중2병은 위험해! (5)
“신전에 갈 거다.”
내가 민망해하는 동안 단테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티엘과 린든은 모처럼 잡은 분위기를 망친 것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뾰족한 시선을 던졌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신전엔 왜 가는 겁니까?”
차분한 푸른 시선을 바라보며 물음을 던진 것은 린든이었다.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만으로는 신전에 가는 목적이 명확하지 않은 데다 그나마 가능한 추측은 에이브와 관련이 있다는 것 정도였으니 그의 물음은 타당했다.
“그건….”
어디까지 설명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잠시, 대답을 하려고 운을 뗀 단테를 보고 내가 먼저 서둘러 대답했다.
“에이브에게 친구가 납치당했어요.”
불만 어린 시선이 조용히 꽂혔지만 별수 없었다. 단테의 설명은 친절하지 않으니까.
단테에겐 미안하지만 두 번 설명하느니 차라리 한 번에 깔끔하게 설명하는 것이 나았다.
문제는 그것보다 아티야와의 관계를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어 취한 단어 선택이 문제였다.
“…그웨니르 영애의 친구, 말입니까?”
돌아오는 린든의 반응엔 다소 놀라움이 가득했다. 이미 나에 대해 이것저것 조사를 해 봤을 테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까지 놀랄 일은 아니잖아?
‘잘 가라, 치유캐.’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린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불만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내심 린든을 엔딩을 함께할 상대로 염두에 두고 있었던 터라 실망은 배로 부풀었다.
나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까칠한 물음을 던졌다.
“제가 친구가 있다는 게 그렇게 놀라운 일인가요?”
“그웨니르 영애, 죄송합니다. 친구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보니 그만…….”
‘음, 그래도 솔직하게 말하니 그나마 다행이네.’
그렇다 해서 한 번 잃은 신뢰가 바로 회복되기는 힘들겠지만.
한편 공략캐들은 린든과 나를 저마다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의 속내야 뻔했다. 더는 내가 린든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거겠지.
하지만 저들은 모를 것이다. 내가 얼마나 청개구리인지를.
‘누가 네놈들 좋을 대로 해 줄 줄 알고?’
호감도가 오를 대로 오른 지금, 저놈들의 목줄을 쥐고 있는 건 나였다. 그러니 내 맘대로 할 거야!
생각을 마친 나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전부 거둬들이고 활짝 웃었다.
“괜찮아요, 브누아 영식. 신경 쓰지 마세요.”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당황하는 린든만큼이나 다른 이들 또한 당황한 기색을 금치 못했다.
그 모습에 괜히 흥이 난 나머지 나는 조금, 아니 매우 뻔뻔하게 굴었다.
“당연하죠. 용서하고 말고 할 것이 뭐가 있나요? 애초에 수줍음이 많아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하는 제가 문제인걸요.”
“푸흡…!”
“큭…!”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자세를 가다듬은 레이프와 단테가 보였다.
이놈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레이프는 그렇다 쳐도 단테 넌 뭔데요?
이번 일만 끝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굳어 가던 차였다.
“친구…라면 저번에 만났던 자를 말하는 건가?”
시선을 회피하는 이들을 대신해 물음을 던진 것은 이티엘이었다.
‘하여간 눈치도 빨라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티엘은 자연스레 의아함을 드러냈다.
그럴 만도 했다. 당시 에이브와 아티야의 모습은 납치범과 피해자로 보이지 않았으니까.
‘역시 말… 해야겠지?’
여기까지 온 이상, 그들과 어떤 식으로 얽히게 된 것인지를 설명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키지 않는 마음을 꾸역꾸역 억누르고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이티엘의 한마디가 불쑥 날아들었다.
“설마 했었는데 사실이었군.”
“뭐가요?”
반사적으로 질문을 던지긴 했지만 내 속은 여러 생각으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설마 무언가 떠올랐나?’
공략캐들 중 아티야를 직접 본 것은 이티엘이 유일했다. 당시에 그녀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 해서 지금도 그러리라는 법은 없었다.
‘제발 떠올려라!’
만약 공략캐들의 관심이 아티야에게 돌아간다면 내가 힘들여 그녀를 설득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곧 내가 자연스럽게 이 빌어먹을 시스템과 안전이별을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제발, 제발!!’
퍼즐처럼 딱딱 들어맞는 생각에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이티엘을 바라보았다.
1분 1초가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이티엘의 입이 마침내 달싹였다.
그것은 상당히 예상을 빗나간 대답이었다.
“데이트 폭력이라는 것이 존재하다니 말이야.”
“…네?”
순간적으로 물음이 튀어나왔다.
원래 세계에서나 들을 법한 단어를 여기서 들을 줄은 몰랐기에 당황스러웠다.
‘설마 헛다리야?’
실망이 밀려오는 것도 잠시, 필사적으로 긍정 회로를 돌렸다.
‘에이, 그럴 리가. 이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분명 아티야와 관련된 걸 거야.’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버리지 못한 채 이티엘이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미간에 깊이 주름을 잡은 그는 턱을 괸 채 데이트 폭력을 막기 위한 법안을 내야겠다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웨니르 영애.”
“네, 폐하.”
기대감에 찬 나와 마주한 이티엘은 한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단순한 데이트 폭력이 아닐 수 있다.”
“아…….”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티야에게 일절 관심이 없구나. 응, 그래.
‘좋다 말았네.’
아슬아슬하게 쌓인 희망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 위로 서늘한 허탈감이 스쳤지만 나는 이내 회복했다. 데스티니를 손에 쥔 날부터 내 바람을 코 푼 휴지처럼 취급하던 세상이었다.
‘에이브, 이 자식. 잡히기만 해 봐라.’
내 의식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과 동시에 에이브에게로 분노의 방향을 돌렸다.
그가 아티야를 데려간 것은 뻔했다. 보나 마나 그녀가 여주인공 자리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겠지. 그거 때문에 날 죽이려 의식까지 찾아왔을 정도인걸.
‘아티야의 반응을 보면 딱히 여주인공이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지난날에 나눴던 아티야와의 대화를 떠올리자 입가에 씁쓸함이 떠올랐다.
아티야에게 원래 자리로 돌아갈 마음이 없는 이상, 나도 되도록 그녀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저대로 모습을 감춰 버린다면 나는 또다시 아티야 대신 이 자리를 메꿔야 할 수도 있었다.
그런 건 더 이상 사절이었다.
“에이브 그자는 처음부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세르비아스 영애에게 접근했을 거야.”
한편 이티엘은 한 번 엇나간 방향으로 엇나간 추리에 살을 덧붙이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무슨 이야기를 하나 싶어 지켜봤지만 이대로 뒀다가는 엉뚱한 의미로 폭주를 할 것 같아 이제 슬슬 제지하기에 나섰다.
“아니요, 오히려 에이브는 아티야를 아끼면 아꼈지 해를 끼치려 하진 않아요.”
“어떻게 그걸 장담하지?”
순간 나는 목구멍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껏 예상치 못한 순간은 수없이 많았지만, 내 입장에 대한 설명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왜냐하면…….”
두 마법사를 제외한 공략캐들의 조용한 시선이 따가운 가운데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를 데스티니의 ‘선택받은 자’로 만들었으니까요.”
먹구름이 낀 듯 어둡고 무거운 대답에 이티엘의 눈동자에 경악이 어렸다.
“설마….”
“맞아요, 선택받은 자는 제가 아니라 아티야예요.”
내 대답을 마지막으로 방 안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이 사실을 처음 안 린든과 이티엘은 무척이나 생각이 많아졌다. 그 증거로 호감도 창에 적힌 그들의 코멘트가 바뀌어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데스티니는 단 한 사람이 만질 수 있는 게 아니었나?]
[묘하다 생각하긴 했지. 처음 본 여자인데도 오랫동안 안 것처럼 익숙했으니까. 그런데 이런 일이 숨겨져 있을 줄은 몰랐어.]
끊임없이 이어지는 코멘트를 살펴본 나는 목을 큼큼 다듬었다.
생각에 잠겼던 이티엘과 린든이 꿈에서 깨어나듯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혼란스러운 건 알아요.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어요. 그러니…….”
“알겠네. 우선 움직이도록 하지.”
말을 끊는 것과 동시에 돌아온 대답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머뭇거릴 거라 생각한 것과 달리, 이티엘의 표정에서는 더 이상 혼란스러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혹시나 싶어 린든을 바라보니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왜 저렇게 의연한 거지?’
이제 당황스러운 건 나였다.
고민이 깊어지는 가운데, 이티엘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 놀라지 말아, 영애. 그대의 이야기는 놀랍지만 그렇다 해서 우선순위를 잊을 정도는 아냐.”
“폐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것이든 돕겠다 했으니 부디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질세라 연이어 대답하는 두 사람을 보며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제야 내가 줄곧 긴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에 놀라면서 한편으로는 납득했다.
아티야를 숨기려고 한 것을 보면 에이브는 상당히 심적으로 내몰린 상태였다. 그런 그와 마주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결심을 다져야 했다.
지금이 꿈이 아닌 현실인 이상, 더욱이 그러했다.
‘우선 에이브에게서 아티야를 떼어 놓고 시간을 벌어야 해.’
다시금 목표를 되새긴 나는 시스템창에 뜬 아이템 목록을 바라보았다.
그중에서도 혼자만 네온사인 색으로 번쩍이는 아이템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성스러운 방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