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13장. 때늦은 중2병은 위험해! (3)
한번 솟아난 용기는 좀처럼 가라앉을 줄 모르고 사람을 담대하게 만들었다.
“변태도 아니고 갑자기 그러면 얼마나 놀라는 줄 알아?”
“변태라니. 세이딘, 그건 좀….”
“심하다 생각하면 직접 겪어 볼래?”
내 귀에도 꽤나 도발적인 물음이었다.
레이프에게도 그렇게 들린 것인지 그의 눈동자는 아까보다도 훨씬 더 휘둥그레진 상태였다.
충동적으로 꺼낸 말이었지만 저렇게까지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시늉이라도 해 보자는 마음이 솟아났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에 겪은 일들이 하나같이 꿈도 희망도 없이 거지 같다 보니 이렇게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나는 실실 웃음이 나려는 것을 참으며 무표정한 척 레이프에게 한 발자국씩 다가갔다.
“세이딘, 잠깐…. 그 이상은….”
진심으로 당황했는지 레이프의 얼굴에서는 어떤 여유도 찾을 수 없었다.
언제 이런 모습을 또 볼 수 있을까 싶어 한 걸음을 더 내딛는 순간, 나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어…?”
몸이 휘청거리는가 싶더니 온 세상이 휙 돌았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신나게 바닥을 구른 나는 전신으로 통증이 밀려왔다.
‘…뭐지? 설마 나 침대에서 떨어진 거야?’
뒤늦은 깨달음과 함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답답함과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세상에 한두 살 먹은 아기도 아니고 열일곱이나 먹고 침대에서 굴러?
세이딘의 몸이 열일곱이라고 해도 이곳에 빙의할 적의 내 나이는 20대 중반이었다.
그러다 보니 심란한 마음은 더욱 배가 되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거꾸로 맺힌 시야에 레이프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세이딘? 그러게 조심해야지.”
걱정스러운 말과는 달리,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지려는 모습에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여간 재수 없어!
실실 쪼개기는 해도 미안하긴 했는지 레이프는 마법으로 나를 들어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그는 이불을 덮어 주는 것도 모자라 회복마법까지 걸어 주었다.
덕분에 온몸에 비명을 지르는 듯한 통증은 사라졌지만, 그것과 별개로 내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진작에 말해 주면 좀 좋아?”
“세이딘, 난 말하려 했어. 무시한 건 너야.”
돌아오는 대답에 나는 아랫입술을 자근거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분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레이프 님, 아티야라는 여자는 만나셨습니까?”
단테는 내 기분이라곤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물음을 던졌다.
참 배려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민망한 상황을 벗어나게 되어서 마음이 편했다.
한편 질문을 들은 레이프는 얼굴에서 장난스러운 미소가 싹 사라졌다.
뭐야,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래?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아티야한테 뺨이라도 맞은 건 아니지?”
“…못 만났어.”
돌아온 대답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대단하지 않았다.
“그래 뭐, 모처럼 놀러 온 곳이니 이것저것 보러 다니고 그러겠지. 그러다 보면 마주치지 못할 수도 있고.”
“그런 게 아냐.”
이번에도 레이프의 대답은 무척이나 무거웠다.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레이프를 보면서 그제야 무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꼈다.
한참 깊게 생각하던 레이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티야가 사라졌어.”
“뭐?”
아까와 같이 다른 데 가서 놀고 있는 거 아니냐는 식의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동시에 왜 레이프가 이틀이나 돌아오지 않았는지도 납득이 갔다.
그는 아티야의 행방을 찾기 위해 돌아다녔던 것이다.
“아티야가 묵고 있는 여관을 가 봤어.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돌아오지 않길래 주인에게 물어봤더니 며칠째 방에만 있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 그래서 안에 들어가 봤는데 짐을 풀어놓은 흔적만 있고 사람의 기척은 없었어.”
“안에 들어가 본 거야?”
내 물음에 레이프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제대로 확인하려면 어쩔 수 없었어.”
“그래서 무언가 알아내신 것은 있으십니까?”
“아티야가 모습을 감춘 건 자의가 아닌 타의라는 거야.”
결론까지 듣고 나서야 레이프가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았는지 마음 깊이 이해했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아티야는 납치를 당했다. 에이브에게.
유감이라고 한다면 그가 그런 행동을 벌인 이유 또한 짐작이 간다는 것이었다.
“썩을 놈, 미치려면 곱게 미칠 것이지 왜 이렇게 사방에다 똥을 던지….”
열이 뻗친 나머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나는 어느새 주변의 시선을 받고 있음을 깨달았다.
“세이딘….”
“음, 제법….”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는 레이프와 단테의 모습에 뒤늦은 부끄러움이 솟아올랐다.
“아하하, 그게…, 너무 화가 나서 불가항력적이라고 해야 하나, 어쩔 수 없다고 해야 하나….”
“세이딘, 그보다 더 심한 욕도 할 수 있나?”
이 와중에 단테가 던진 물음은 상식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는 내가 얼굴을 구기든 말든 기대에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발 이런 데서 지적 호기심을 드러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색하며 한마디를 할 생각으로 입을 여는데 레이프 또한 질세라 한마디를 거들고 나섰다.
“흠, 그건 나도 좀 궁금한걸?”
대체 왜 남이 욕하는 모습이 궁금한 거야?
나는 속으로는 심한 말을 쏟아 내며 두 남자의 부담스럽게 반짝이는 시선을 칼같이 잘라 냈다.
“그건 그렇고! 아티야에 대한 거라면 에이브를 추적하면 되지 않아? 그러면 금방 찾을 거 같은데.”
“그래서 문제인 거야.”
“응?”
“위치는 아는데 들어갈 수 없어.”
레이프의 대답을 들을수록 아리송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천족이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레이프가 들어갈 수 없는 곳….’
그런 곳이 있나?
좀처럼 짐작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단테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신전이군요.”
“그래.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고위 사제 이상의 성직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기도실.”
그 말에 나는 절로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천족은 신의 대리인이기도 하니 그런 기도실쯤이야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을 터였다.
“…굉장히 자신에게 유리한 곳이네.”
“그래, 아주 바퀴벌레같이 생존에 특화된 놈이야.”
활짝 피어난 꽃 같은 미소와 달리, 레이프의 목소리는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이틀 내내 아티야를 찾아다닌 끝에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는데 들어갈 수 없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화가 날까.
‘나였으면 스트레스로 그 자리에서 쓰러졌을지도….’
거기까지 설명을 듣던 나는 자연스레 의문이 들었다.
“그럼 아티야는 괜찮은 거야? 고위 사제도 아닌…. 아.”
맞다, 아티야 성녀라고 그랬지?
단숨에 납득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들을수록 모든 것이 철저하게 아티야 위주로 맞춰져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을 그냥 게임 속이라고 여겼을 당시에는 아티야가 여주인공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게임이 아니라는 걸 안 이상,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없었다.
생각이 깊어지는 것과 동시에 절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대체 왜 그런 걸까?”
“뭐가?”
내 혼잣말에 레이프가 질문을 던졌다.
이걸 말을 해도 될지 고민하던 나는 그래도 말을 해 보기로 했다.
“아니, 그냥…. 모든 게 아티야 위주로 흘러가는 것만 같아서. 이 세계가 반복되는 원인이 너 때문이라곤 하지만, 네가 이뤄 내야 할 것에 비해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잖아.”
레이프의 봉인이 완전히 풀리기 위한 조건은 선택받은 자를 통해 진정한 사랑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상대의 사랑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인지, 아니면 선택받은 자와 사랑을 하라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느 쪽도 레이프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
사람의 감정은 지시를 해서 생기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님에도.
“감동이야, 세이딘.”
생각이 깊어지는 중에 날아든 말은 무척이나 뜬금없었다.
고개를 들자, 레이프가 호박빛 눈동자를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맨날 아니라고 말하면서 사실은 날 많이 생각하고 있구나, 그렇지?”
“…….”
기대로 가득 찬 목소리와 표정을 보는 순간 나는 얼굴을 왈칵 구겼다.
“농담 그만해, 재미없어.”
“너무해라, 난 진심인데.”
부루퉁한 표정으로 입을 비죽거리는 레이프를 보며 나는 눈에 힘을 주었다.
‘지금 어디서 귀여운 척을?’
소년의 모습이었을 적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레이프는 다 큰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가 아름다워도 용서가 안 되는 짓과는 별개였다.
‘어디 한 번 더 그러기만 해 봐라.’
얼굴 가득 드러낸 내 굳은 의지에 레이프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반짝거리던 표정을 거두었다.
“세이딘? 잘 알았으니까 제발 그렇게 쳐다보지 말았으면 해.”
“그렇게 쳐다보는 게 뭔데?”
“…말해도 돼?”
사뭇 진지한 레이프의 표정에 나는 더 이상 궁금하고 싶지 않아졌다.
“됐고, 앞으로는 일절 그런 소리 하지 마. 재미없고 짜증만 나니까.”
서늘한 시선과 어우러진 단호한 대답에 레이프는 슬그머니 올라가던 입꼬리를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두 사람은 신전에 있단 거지?”
다시금 돌아온 질문에 레이프는 장난기를 빼고 성실히 대답했다.
“맞아.”
“그리고 기도실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고.”
“그렇지.”
다시 한번 확인차 물어본 나는 턱을 괴었다.
금지된 장소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본 결과, 제일 먼저 머릿속에 스치는 것은 이것뿐이었다.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레이프와 단테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고 있었다.
기대에 부응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 자신은 제법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 생각했기에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우선 고위 사제로 위장해서 들어가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