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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78)화 (78/122)

제78화. 13장. 때늦은 중2병은 위험해! (2)

나는 문 너머의 앤을 향해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평소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이 실수하기 시작하니 밑도 끝도 없구나.

‘그런데 린든이라고?’

앤이 안타까운 것과 별개로 린든의 등장은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내 마음을 더욱 술렁이게 만들었다.

에이브를 들먹이며 나타난 이티엘.

그리고 비슷한 타이밍에 나타난 린든.

이것이 과연 우연일지에 대해 생각해 봤을 때 나는 높은 확률로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 세계는 게임, <바이올린과 꽃미남들>이었다.

물론 이제는 전만큼 게임 속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이 세계의 흐름은 게임의 전개를 따랐다.

예를 들면 한 가지 일이 터지면 연달아 일이 터지는 상황.

지금이 정확히 그런 경우였다.

‘제발 아니어야 할 텐데….’

린든이 온 이유가 이티엘과 같은 이유라면 지금보다도 훨씬 골치 아파질 가능성이 높았다.

“들어오라고 해.”

오랫동안 생각을 해 봐야 불안해질 뿐인지라 나는 일단 린든의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방 안에 들어선 린든은 꽤나 얼굴이 굳은 채였다.

“안녕하십니까, 그웨니르 영애. 그리고…. 다른 분들도 계셨군요.”

“브누아 후작, 그대가 여긴 어쩐 일이지?”

이티엘의 물음에 린든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그웨니르 영애와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 오게 되었습니다.”

“혹시 에이브라는 자에 대한 것인가?”

“그걸 어떻게…. 설마?”

놀라움이 어린 린든을 보며 이티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게도 그자가 왔었다. 그웨니르 영애와 연관된 일인 듯해서 전말을 들어 보고자 온 거고.”

“저와 같군요. 저 또한 같은 이유로 왔습니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이어 가던 두 남자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항상 느끼지만 이런 예감은 언제나 틀린 적이 없었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모양이구나.’

나는 에이브를 떠올렸다.

분명 처음 볼 때만 해도 순수하게 아티야를 아끼는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흐르는 시간과 함께 에이브의 행동들을 보면서 나는 점점 알 수 없어졌다.

진심으로 아티야를 위한다 해도 지금 에이브가 벌이는 일들은 결코 그녀를 위한 일이 아니었다.

생각을 마친 나는 입을 열었다.

“폐하께 대답했던 것처럼 지금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기다려 달라는 것뿐이에요. 저 혼자 결정해서 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라서요.”

“…혹시 그 일에 데스티니가 포함되어 있는 겁니까?”

린든의 질문은 조심스러웠지만 그 안에는 이미 어느 정도 확신이 차 있었다.

일단 레이프와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는 시치미를 떼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던 것도 잠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그 이상은 말할 수 없어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서 말이에요.”

“아닙니다, 이걸로 충분해요. 말하기 어려우셨을 텐데 대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웨니르 영애.”

나는 이티엘에게 했던 말처럼 린든에게도 이에 대해 좀 더 생각을 정리한 뒤 말해 주겠다고 하며 돌려보냈다.

그들은 제법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곧 수긍하고는 사이좋게 각자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내가 있어도 괜찮은 이야기였나?”

모두가 돌아가고 정적만 남은 속에서 단테가 물음을 던졌다.

짐짓 걱정스러운 듯한 물음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티엘과 인사할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 책만 읽는 듯한 단테였지만, 사실은 줄곧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뭐예요, 갑자기? 인제 와서 내숭이라도 떠는 거예요?”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 거다.”

“뻔뻔하긴, 설마 제가 모를 거라 생각해서 묻는 건 아니죠?”

내 물음에 단테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알고 있었나?”

“그럼 제가 바본 줄 알아요?”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대꾸했다.

단테는 아티야를 비롯해 과거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알게 된 계기는 무척 사소했다.

아티야의 이름이 언급된 것과 동시에 레이프가 그녀에게 다녀온다는 말을 할 적에도 단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궁금하거나 모르는 것에 서슴없이 관심을 보였을 그가 그런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방금 전 또한 그랬다.

에이브라는 낯선 이름을 들었음에도 단테는 조금도 궁금해하기는커녕,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이러한 근거들을 이야기하자 단테는 감탄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것만 가지고 추론을 해내다니. 예리하군, 세이딘.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던데 말이야.”

“그런 경우는 눈치가 없거나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이런 건 조금만 관심을 두면 알 수 있는….”

무심코 말을 잇던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을 깨닫고는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착각하지 마세요, 당신을 관심 있게 본다는 것이 아니라 제가 에이브의 행동에 날을 세우고 있어서 그런 것뿐이니까.”

“그래, 알았다.”

슬그머니 웃는 미소에 나는 괜히 짜증이 났다.

사람이 하는 말은 믿어라, 좀!

한마디를 덧붙이려던 나는 입안에 맴돌던 말을 삼켰다. 이런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당신은 얼마나 알고 있어요?”

“레이프 님께서 설명해 준 정도만 알고 있다.”

이 양반이 오늘따라 왜 이리 답답하실까?

무언으로 방긋 웃는 나를 보며 단테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알아들었는지 일단 대답을 했다.

“레이프 님이 금기를 어긴 대가로 데스티니에 봉인된 것뿐만이 아니라 이 세계가 반복된다는 것과 원래는 아티야라는 여자가 선택받은 자였다는 것, 그리고 에이브라는 천족이 아티야 대신 그 자리에 널 세우려 한다는 것 정도다.”

“…다 알고 있잖아요.”

“정말 이게 전부인가?”

담담한 표정과 함께 돌아온 질문에 순간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오롯이 나만을 비추는 푸른 눈동자는 마치 이것 외에도 더 숨기는 것이 있지 않냐고 물어보는 듯했다.

‘말할까?’

단테의 시선을 마주 보던 중, 가슴 깊은 곳에서 충동이 고개를 쳐들었다.

솔직하게 지금껏 있던 일을 말하면 도와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미쳤구나, 세이딘.’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헛웃음을 머금었다.

어떻게든 저들과 엮이지 않으려고 몸부림칠 때는 언제고, 혹시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다니.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갔던 것이 분명했다.

“세이딘?”

돌아오는 물음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의아한 표정의 단테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신을 단단히 잡은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미안해요,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바람에. 그것보다 그게 다냐고 물어보셨죠? 네, 그게 전부예요.”

“…정말인가?”

“네.”

단답으로 대답한 나는 단테를 바라보았다.

그는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곧 납득하고 넘어갔다.

“무슨 이야기 중이었어?”

“단테가 지금 상황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물어보는…. 으악! 뭐, 뭐야!”

귓가에 닿는 바람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뒤에 바싹 다가와 있었던 레이프는 감탄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세이딘, 반사신경이 좋구나? 새로운 걸 알았네.”

“대, 대체 언제? 기척도 없었는데?”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하나같이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레이프는 호박색 눈동자를 깜박이더니 곧 부드럽게 휘었다.

“그야 방금 전에 왔으니까 그렇지. 기척이 없었던 건 네 뒤에서 나타났으니 그렇고.”

“뭐뭐…!”

더욱더 말을 잇지 못하던 나는 서둘러 단테를 바라보았다.

“단테, 레이프가 온 거 알고 있었죠?”

“아니, 너무 순식간이어서 오신 줄도 몰랐다.”

칼로 잰 듯한 맞춤형 대답에 나는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이 인간아. 네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내 뒤가 얼마나 훤히 보이는지 누가 모르는 줄 알아? 보나 마나 레이프가 말하지 말라고 했겠지.

레이프에게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그는 천연덕스럽게 침대의 모서리에 걸터앉는 것도 모자라 아쉬움을 폴폴 드러냈다.

“너무하네, 오랜만에 보는데 반가워해 주지도 않고 화만 낼 거야?”

“데스티니, 너처럼 이상한 짓을 하면 반갑던 마음도 다 사라지지 않을까?”

“이상한 짓이라니? 내가 무슨 짓을 했는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레이프는 맑은 눈동자로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저 뒤에 꿍꿍이로 가득한 시커먼 미소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레이프는 내가 부끄러워서 말을 못 할 거라 생각하고 저러는 것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딱 그런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걸 그냥 넘어갈까 말까 고민하던 나는 레이프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는 것을 보고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정말 몰라서 물어?”

“응, 모르겠는데. 괜찮다면 알려 주겠어, 세이딘?”

적극적으로 도발하는 레이프는 이제는 대놓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갈팡질팡하던 마음이 단단해졌다.

그래, 까짓거 좀 수치스러우면 어때!

시원하게 한번 말해서 놀래 주지, 뭐.

“알겠어, 그렇게까지 듣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

내 대답에 레이프의 얼굴에 ‘어라?’ 하는 생각이 드러났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자각하게 해서는 곤란했기에, 나는 부끄러움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최대한 빨리 입을 열었다.

“갑자기 사람 뒤에 나타나서 귀 안에 바람을 불어넣는 짓 말이야.”

“….”

“….”

부끄러움을 감수한 대가는 방 안을 에워싼 정적이었다.

내가 말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 레이프는 호박빛 눈동자를 동그랗게 뜬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를 거들었던 단테 또한 내가 그럴 줄 몰랐다는 듯 당황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그 모습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수치스럽다는 생각보다는 말하길 잘했다는 성취감이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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