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12장. 정원 밑이 어둡다 (2)
느닷없는 시비에 나는 울컥하는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 대꾸했다.
“며칠 동안 누워 있었는데 멀쩡한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아요?”
조금 생각을 해 본 단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아마 당분간은 계속 그럴 거다. 과하게 움직이면 몸만 더 상할 테니 방 안이라도 가볍게 산책하는 것이 좋아.”
나는 찬찬히 눈을 깜박였다.
지금까지 단테와 이야기를 하면서 이 정도로 평범한 대답을 들어 본 적은 처음이었다.
‘진짜 뭐 잘못 먹은 거 아냐?’
고개를 빼꼼 내밀던 걱정도 잠시, 호감도를 확인한 나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단테의 호감도는 조금 있으면 400대였다.
게임을 플레이한 기억을 더듬어 보면 누구든 이 정도로 호감도가 높아지면 제법 평범한 대화를 했었더랬다.
‘그래서 갈수록 공략캐들에게 매력을 느꼈던 거 같은….’
흘러가는 기억들을 떠올리던 나는 멈칫했다.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서 떠오른 것이 레이프의 상냥한 말과 그걸 들은 내 반응이었다.
‘어쩌면 심부전이 아닐 수도…….’
그렇게 생각하니 등줄기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미쳤네, 미쳤어!”
나는 곧장 베개에 얼굴을 갖다 파묻었다.
아무리 의식의 흐름이라고 해도 그렇지 너무하잖아!
“정신 똑바로 차리자, 세이딘! 호랑이 굴에서 정신을 놓으면 어쩌자는 건데!?”
나는 무아지경으로 스스로를 향해 중얼거렸다.
“그래, 이건 운동 부족이야. 그래서 그런 거야.”
“세이딘…?”
“단테, 정원에서 산책 좀 할까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주먹까지 불끈 쥐며 단테에게 보란 듯이 의욕이 넘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꾸루루룩.
요란하고 부끄러운 소리는 다름 아닌 내 배에서 들려왔다.
한동안 정적이 흐른 뒤, 단테는 푸른 눈동자를 천천히 깜박이곤 말했다.
“위험신호로군. 그 상태로 산책을 나가면 빈혈로 쓰러질 가능성이 있으니 우선 영양섭취를 하도록 하지.”
“…….”
담담하면서도 노골적인 단테의 표현에 나는 곧바로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이 정도로 부끄러움을 표현하고 있으면 모른 척해 줄 법도 한데 단테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세이딘. 자연스러운 현상이야.”
나름의 배려였는지 아이를 달래는 듯한 어조에 나는 더욱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이대로 먼지가 되고 싶다.’
이 수치는 온갖 음식이 방 안에 들어올 때까지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었다.
‘먹을 것 앞에서 장사 없다더니, 내가 딱 그 짝이네.’
며칠 만에 보는 음식을 정신없이 해치우고 난 뒤, 내 사고는 놀라우리만치 차분해져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단테의 말대로 산책에 나갔으면 쓰러졌을지도 몰랐다.
한결 느긋해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단테가 조용히 한마디를 던졌다.
“잘 먹는군. 보기 좋아.”
뒤에 덧붙인 한마디가 없었으면 시비를 거는 것으로 오해하기 딱 좋은 소감이 아닐 수 없었다.
배가 부르니 모든 것에 관대해져 버린 나는 후식으로 나온 셔벗을 한입 떠먹으며 대꾸했다.
“적어도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요.”
“왜지?”
“왜냐뇨? 잘 먹으니까 그렇죠.”
“…내가?”
살면서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는 듯한 반응에 어이가 없었다.
“그럼 이 방에 나 말고 당신밖에 더 있어요?”
“내가 잘 먹나?”
놀라움이 가득 담긴 물음에 나는 되레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키가 크고 여리여리한 이미지와 달리, 단테는 대식가였다.
거기다 잘 먹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표정으로 먹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흐뭇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오죽하면 내가 그렇게 정신없이 먹는 와중에도 그를 챙겼을까.
의아해하는 단테를 향해 나는 다시 한번 확신을 심어 주었다.
“네, 단테. 당신은 잘 먹어요. 행복해 보이고요.”
―또로롱!
‘정말 알 수가 없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밥 잘 먹는다는 말이 호감도가 40씩이나 오를 일입니까?
이 황당함의 의문은 곧 풀렸다.
표정 없는 얼굴 위로 미미하지만 묘하게 쑥스러워 보이는 기색을 띤 단테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봤어.”
그래, 안 그래도 반응이 그런 것 같았지 뭐야.
“말은 안 들어 봤어도 사람들 표정을 보면 알 거 아니에요.”
방금 전 식사할 때만 해도 그랬다.
식사 시중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은 말없이 눈을 반짝이며 먹는 단테의 모습에서 햄스터를 떠올렸는지 흐뭇한 표정으로 뭐라도 더 먹이고 싶어서 이것저것 갖다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식사 중에 그럴 틈이 어디 있지? 그리고 먹으면서 여기저기 보는 것은 매너가 아니다.”
“이런 때만 상식인인 것처럼 말하지 말아 줄래요?”
나는 욱하는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유감스럽지만 이런들 단테가 알아들을 리는 없었다.
“그럼 이런 적은 없어요? 식사를 할 때 음식이 끊이지 않고 나오거나 묘하게 양이 많거나 하는 거요.”
“원래 음식은 다 먹을 때까지 계속 나오는 게 아닌가?”
돌아오는 대답에 나는 그저 헛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너무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벌어지던 상황이라 몰랐던 거구나. 그럴 수 있지.’
생각을 정리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어떻게든 사랑을 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다분한 세계였다.
이쯤 되니 오히려 엮이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렇게 생각해야 정신 건강에도 좋을 것 같고.
“그래서 세이딘, 산책은 어떻게 할 거지?”
한편 한숨을 이끌어 낸 장본인은 내가 답답해한다고 생각했는지 물음을 던졌다.
이젠 조금도 놀랍지 않은 의식의 흐름이었다.
“할 거예요.”
밥을 먹고 나니 나른해지는 게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까무룩 잠들 것 같았다.
양심이 있지, 며칠을 내리 잤는데 더 잘 수는 없었다.
몸을 일으킨 나는 대충 숄을 걸쳤다.
이미 잠옷 입은 모습도 보인 데다 고작 정원 좀 걷는데 옷을 갈아입는 수고를 겪고 싶지 않았다.
단테와 함께 방을 나서 정원으로 향했다.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가는 길에 만난 사용인들마다 옷을 따뜻하게 입어야 하는 거 아니냐, 혹은 그러다 감기 걸리면 어떡하려고 그러냐 등의 걱정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정원을 코앞에 둔 지금 또한 같은 말을 듣는 중이었다.
“아이고, 세이딘 아가씨! 며칠을 앓다가 일어나신 분이 이런 차림으로 밖을 나오시면 어떡합니까?”
정원사인 델은 안절부절못하며 내가 정원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 했다.
“델, 벌써 수십 번은 들은 말이고 난 괜찮아. 오히려 이 숄도 더울 지경이야. 그리고 가볍게 산책만 할 거라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아.”
폭포처럼 쏟아져 나온 답변에 델은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쯤 되면 납득하고 비켜 줄 법도 하건만 델은 머뭇거리기만 할 뿐, 조금도 비켜 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 미치겠네.’
몇 번씩이나 의미 없는 실랑이를 하려니 이제는 차라리 누워 있는 게 나았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이대로 집을 나가 버려?’
마음 한 곳에 잠들어 있던 철 지난 반항심이 서서히 고개를 쳐들려 했다.
“이렇게 하면 된다.”
난데없이 들려온 말과 함께 내 주변에는 크고 작은 불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마법에 익숙한 나와 달리, 처음으로 마법을 보는 델은 안쓰러울 정도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히익! 부, 부, 불이야!”
단테는 불을 끄기 위해 양동이를 찾느라 허둥거리는 델을 향해 차분히 대꾸했다.
“체온이 떨어지는 걸 염려하기에 만들어 낸 거다. 보기에만 이럴 뿐, 손에 닿아도 전혀 뜨겁지 않아.”
“단테, 설명해도 소용없어요.”
섬세한 손길을 가진 델은 성격도 그만큼 예민하고 섬세했다.
저렇게 놀라는 사람에게 굳이 더 말을 얹어 봐야 체력 소모만 될 뿐이라 그럴 바에는 직접 보여 주는 편이 나았다.
나는 주변에 있던 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솔직히 나라고 해서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단테가 온도의 기능만 있을 뿐이라고 했으니 그 말을 믿는 거지.
만에 하나라도 화상을 입게 될 상황이면 그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것 또한 알기에 이렇게 대범하게 행동하는 것이었다.
“으, 으아아! 아가씨!!”
한편 패닉에 빠져 허둥거리던 델은 내가 불을 잡는 것을 보고 금방이라도 거품을 물 것 같았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 보란 듯이 불을 잡았다.
손에 닿는 것은 따스한 온기뿐, 그 외에 어떤 느낌도 들지 않았다.
“델, 봐 봐. 아무렇지 않잖아.”
“으아아! 어떡해!! 아가씨가 화상을…. 어? 저, 정말이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델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 후로도 눈에 보이는 불들을 하나둘 잡았다.
다행히도 델은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그 와중에도 단테는 괴짜 아니랄까 봐 엉뚱한 소리를 내뱉었다.
“세이딘, 그렇게 장난치는 게 좋나?”
마치 내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그러는 것처럼 말하네.
나는 단테를 흘겨봤다.
“누가 좋아서 이런대요? 델을 안심시키려고 보여 준 거지.”
“아, 아가씨, 죄송합니다.”
“사과하라고 한 말 아니야, 델. 그나저나 이 정도면 충분히 확인시켜 준 거 같은데 정원에 들어가도 되지?”
“물론입니다! 대신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금방 나오세요!”
나는 몇 번이고 당부하는 델에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떻게 들어가는 정원인데 잠깐 있어?’
기왕 고생한 거 뽕이란 뽕은 다 뽑고 나와야지.
정원에 들어온 뒤, 단테가 그런 나를 보며 한마디를 꺼냈다.
“세이딘, 다 드러난다.”
“어머, 어쩐담? 같이 들어왔으니 단테도 공범이에요.”
내가 생각해도 참 가식적인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단테는 황당해하면서도 곧 태연하게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네가 바라면 언제까지고 있을 생각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