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화. 12장. 정원 밑이 어둡다 (1)
“응, 이번과 같은 일이 또 벌어지면 그때는 제정신이 아닌 걸로 간주해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레이프는 서늘한 눈빛과 함께 아름다운 미소를 피워냈다.
상큼한 목소리로 무시무시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어요, 참.
그렇다고 해서 안쓰럽게 여긴다든가 동정하는 건 절대 아니다.
경고를 무시하고 또다시 나타나면 그건 뭐, 제 팔자가 그러려니 해야지.
“그나저나 제가 의식을 잃은 동안 별다른 일은 없었어요?”
나는 화제를 전환하며 단테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지난 일주일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딱히 없군.”
“정말요?”
“음…. 황제가 왔었다.”
딱히 없는 게 아니잖아?
나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뭐라고 하던가요?”
“네가 어떤지 묻더군.”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은요?”
“으음…….”
대체 얼마나 대단한 대답을 하려고 저렇게 고민을 하는 건지.
긴장 어린 표정으로 한참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단테가 겨우 입을 열었다.
“네 아버지라고 하는 사람과 사용인들이 오갔었다. 그리고 병문안을 받아야 할지 말지 고민이라는 말을 하더군.”
나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이티엘의 병문안은 받았으면서 다른 사람은 받을지 말지를 왜 고민하는지.
“제가 무슨 왕족도 아니고 그냥 받으면 되는 걸 뭘 그렇게….”
“아티야, 라든가?”
돌아오는 대답에 얼굴이 절로 굳었다.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그녀는 아니지.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왔어요?”
“아니, 오지 않았다. 네가 들이지 말라고 했다고 하더군. 그리고 내가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기도 했고.”
“잘했어요.”
이번만큼은 단테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내 반응에 단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껄끄러운 사람인가?”
“껄끄러운 정도가 아니라 많이 불편해요.”
“…놀랍군. 네가 딱 잘라 그렇게 말할 정도라니.”
동그랗게 뜬 푸른 눈동자에 이채가 가득했다.
평소에 날 어떤 식으로 보길래 반응이 이런 거람?
“저도 좋고 싫음은 명확하거든요?”
“물론 알고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처럼 칼같이 자르진 않지 않나.”
“그…건 그렇죠?”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표정도 없고 레이프에 대한 찬양만 하는 단테가 저렇게까지 나에 대해 파악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반면 그는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한 거다. 세이딘, 너는 현실적이어서 아무리 싫은 상대여도 여러 가지를 염두에 두고 대하니 말이야.”
뭐지, 왜 이렇게 잘 아는 건데?
이쯤 되니 놀라는 것보다 걱정이 앞섰다.
나는 진지한 얼굴로 단테에게 물음을 던졌다.
“…단테, 뭐 잘못 먹었어요?”
“평소와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식사였다만, 왜 그러지?”
“아니에요, 그냥 평소랑 좀 다른 거 같아서.”
“내가 너에 대해 제법 잘 알고 있어서 그런 거라면 놀랄 것 없다. 딱히 분석을 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보였을 뿐이야.”
그 말인즉, 난 그냥 슥 봐도 알아채기 쉬울 정도로 단순한 사람이라는 거 아냐?
단테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스멀스멀 고민이 올라올 때였다.
“흐음, 사이 좋네.”
경쾌한 목소리에는 묘한 날카로움이 섞여 있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대화를 지켜보던 레이프가 화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도 그 정도로 사이가 좋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나긋한 어조와 달리, 레이프의 눈은 전혀 웃지 않고 있었다.
당황한 나는 괜히 뜨끔해서는 말을 이었다.
“뭐, 뭐가 친하다는 거야? 욕먹은 거 안 보여?”
“욕? 글쎄, 무엇이 그렇게 들렸는지 난 잘 모르겠는걸.”
뻔히 알면서 거짓말도 참 거창하게 한다.
알면서도 아니라고 우길 기세인 레이프인지라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더 대꾸하지 않았다.
이 이상 말씨름을 해 봐야 감정 소모만 깊어질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레이프 님. 저로 인해 기분이 언짢으셨다면 고치겠습니다.”
한편 레이프에게 진심인 단테는 그 말을 전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아니, 단테. 이 상황은 고치고 개선해서 해결될 그런 게….”
“말 걸지 마라, 세이딘. 레이프 님을 위해서라도 난 노력할 것이다.”
“아, 그러세요….”
저렇게 말하는데 내가 더 무슨 말을 해.
“참 대단한 여자네.”
한참 동안 흐르던 어색한 정적 속에서 레이프가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나는 당황했다.
세상에 게임 속 여주인공에게 공략캐가 저런 식의 표현을 할 거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걸 제쳐 두더라도 레이프에게 있어 아티야는 어떤 형태로든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낀 상대였다.
그런 사람에게 저렇게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걸 보니 조금 묘한 기분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레이프는 호박색 눈동자를 곱게 접었다.
“그렇잖아? 세이딘의 말마따나 어떤 각오도 다지지 않았어. 그러면서 상대가 쓰러졌다는 소식에 찾아오는 건 뭔데? 어떤 상황이어도 착한 사람이고 싶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뭐, 그건 그렇지.”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딱히 아티야의 변호를 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서늘한 눈빛을 남겨 둔 채로 싱긋 웃던 레이프는 깊게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잠깐, 데스티니! 어디 가?”
슬금슬금 밀려오는 불안한 마음에 서둘러 레이프를 붙잡았다.
레이프는 몸을 돌려 나를 보는가 싶더니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그 끝에는 겨우 옷자락 끝을 잡은 내 손이 있었다.
괜히 민망함이 밀려왔다.
“이게, 그건….”
“세이딘.”
나직한 목소리에 괜히 바싹 긴장되었다.
―또로롱!
호감도가 올라가는 소리에 나는 속으로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럴 때의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아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레이프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내가 붙잡은 건 어디까지나 아티야에게 찾아가서 뭘 어쩌겠냐는 뜻에서 그런 거지 그 외에 다른 의미는….”
“알고 있어.”
담백하게 돌아온 대답에 황당해서 눈을 깜박였다.
그런데 호감도는 왜 올라?
나는 호감도가 오른 창 밑을 힐끗 바라보았다.
단테처럼 레이프에 대해서도 무언가 적혀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어떤 이유건 관심을 보여 준 것이 기쁩니다.]
‘왜 그러는 거야, 진짜….’
고작 어디 가냐고 묻고 옷 좀 붙잡은 걸로 이러면 어떡하니 정말!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와 비슷한 경우는 그동안 수없이 많이 있었지만 이만큼 긴장되고 간질거린 적은 없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몸 상태가 이러냐.’
별것도 아닌 일에도 벌벌거리는 걸 보면 나도 어지간히 심적으로 지친 모양이었다.
이따 의사를 불러 꼭 정밀 진단을 받아 보기로 다시 한번 결심하고 있을 때였다.
“그거 알아?”
느닷없는 레이프의 물음에 나는 멍청하게 눈만 끔벅였다.
더욱 짙어진 미소가 나를 향했다.
“네가 날 찾아 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지.”
평소에도 그랬으면 진작에 봉인을 풀지 않았을까?
나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생각을 가슴 저편에 묻어 뒀다.
“그러니 불안하게 여기지 마. 네가 싫어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곤란하게 만들 일도.”
“아티야를 찾아가는 게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
“아니, 내가 있는 한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야.”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저러는 건지.
한마디를 더 하려던 나는 자신만만한 레이프를 보고 그만두었다.
지금 상태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기어코 해내고 말 것 같아서였다.
깊은 한숨을 터뜨린 나는 신신당부했다.
“대신 위험한 일은 하지 마. 알았어? 협박도 하지 말고.”
“너무하네, 세이딘. 날 뭐로 보고 그러는 거야? 나 그렇게 꽉 막히고 답답한 사람 아니야.”
그래, 그렇다고 하니 믿도록 하자.
레이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아쉬움을 드러냈지만 곧 표정을 관리했다.
“그래, 그렇게 못 미더우면 보여 주면 그만인 일이니까. 그럼 다녀올게. 그때까지 단테, 너는 세이딘과 함께 있어. 저번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레이프 님.”
깍듯한 인사를 받은 레이프는 그대로 자취를 감추었다.
레이프가 떠나고 둘만 남은 내 방은 휑하다 싶을 정도로 정적이 가득했다.
이 이상 어색한 분위기인 채로 흘러가고 싶지 않던 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테, 레이프한테 그런 대접 받으면 기분 나쁘지 않아요?”
“그런 대접이라면…. 이것저것 시키는 것 말인가?”
“네, 당신도 대마법사잖아요.”
아무리 레이프가 뛰어난 대마법사였다고 해도 지금껏 대접받던 단테가 그에게 부려지는 것은 썩 유쾌하지 않을 수도 있기에 물어본 것이었다.
그렇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내 우려가 무색하리만치 명쾌했다.
“한 번도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다.”
“조금도요?”
“전혀. 오히려 내게 이것저것 요청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다. 조금이나마 레이프 님께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 족해.”
나는 이제 기가 막힌 표정을 조금도 감추려 하지 않았다.
레이프를 찬양하는 모습이 범상치 않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래, 뭐 당사자가 행복하다면 그만이지.’
더는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팔을 쭉 펴고 스트레칭을 했다.
단테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몸에 이상 있는 곳은 없나?”
“네, 몸이 뻐근한 것 외에는 괜찮아요. 그리고 두통이 약간 있다는 것 정도?”
“운동 부족이군.”
나는 담백하게 사실만으로 가슴을 사정없이 후벼 파는 단테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스트레칭 하는 거 안 보이니, 이 나쁜 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