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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72)화 (72/122)

제72화. 11장. 진실은 개나 줘 버리라지 (7) 

나는 에이브를 향해 똑바로 시선을 맞추고 한 마디, 한 마디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이 세계가 반복된 것은 레이프가 아니라 아티야 때문이야.”

신의 이야기에 누구보다 귀를 기울이고, 그렇기 때문에 신의 사랑을 받던 성녀.

그는 아티야가 거절하지 않을 걸 알았기에 그녀에게 일을 맡긴 것이다.

또한 그녀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 아무리 레이프가 그녀를 사랑해도 그 이상의 진심과 마음으로 대하길 바랐기에 사랑이 아니라 치부했던 것이고.

“아니야….”

내 말을 들은 에이브는 또다시 현실 부정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그래, 어디까지나 추측이니 믿든 안 믿든 네 자유야. 그렇지만 나로서는 결코 좋게 볼 수 없네.”

“아티야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무것도 모르…!”

“내가 그걸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

에이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미 몇 번이고 말했지만 나는 이 상황과 전혀 무관했다. 

책임져야 할 사람이 도망가는 바람에 바란 적이 없음에도 그 자리를 대신 메꾸고 있는 사람.

그런 내가 아티야를 동정할 의무는 조금도 없었다.

“에이브, 네가 아티야를 아끼고 안타까워하는 건 알겠지만, 적어도 내 앞에서는 그딴 말 지껄이지 마.”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야구방망이에 힘을 더했다.

화가 났다.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기분만으로 행동한 주제에 그것이 얼마나 정당한지를 주장하는 모습이라니.

나는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에이브를 바라보았다.

“네가 이럴수록 아무리 아티야에 대해 좋게 생각하려 해도 상황만 더 안 좋아질 뿐이야.”

아티야의 이름을 들은 에이브는 어깨를 움찔거렸다.

이 와중에도 그녀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것을 보면 지극정성이 아닐 수 없었다.

‘뭐, 말을 이렇게 했다 해서 아티야를 좋게 볼 생각은 없지만.’

나는 속으로 중얼거린 뒤, 에이브에게 말했다.

“그러니 이 정도로 만족하고 돌아가. 그렇지 않으면 흠씬 두들겨 패 줄 거야.”

믿지 않을지도 모르니 야구방망이를 일부러 눈에 띄게 들었다.

혼란스러운 얼굴인 와중에도 에이브는 그것을 보고는 끔찍하다는 듯 새파랗게 질려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아, 알았어! 가면 되잖아! 그러니까 그거 내려놔!”

“가는 걸 볼 때까진 들고 있을 거야.”

내가 네 뭘 믿고 이걸 내려놔?

의지를 담은 눈동자로 눈을 부라리자 에이브는 결국 한풀 꺾이고 말았다.

비틀비틀 일어난 그는 옷을 탈탈 턴 뒤, 갈 채비를 마쳤다.

“잠깐, 세이딘.”

줄곧 지켜보던 레이프가 입을 열었다.

사람 키만 한 하얀 빛을 만들어 낸 에이브가 멈칫했다.

“저대로 보낼 셈이야?”

“응, 다친 곳도 없고 다시는 이러지 말라고 으름장을 놨으니….”

“너무 물러.”

단호한 레이프의 대답에 조금 놀랐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무르다고 생각했지만 별수 없었다. 

이곳이 의식 속이라 망정이지 현실에서 이런 식으로 죽이겠다 달려들었으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굳게 다짐했다.

‘아무래도 아이템을 사 둬야겠어.’

현실에서도 이런 일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어찌 됐건 요는 에이브에게 좀 더 강한 제지를 하고 싶어도 내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 레이프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불쑥 한마디를 던졌다.

“내가 있잖아.”

아무래도 생각이 또 얼굴에 드러난 모양이다.

레이프는 내가 머쓱해할 새도 없이 말을 이어 갔다.

“세이딘 혼자라면 모를까, 지금은 내가 있어. 그러니 부디 저놈을 이렇게 보내지 말았으면 해.”

“…어떻게 할 생각인데?”

조금 불안한 마음에 물음을 던지자 레이프가 해사하게 웃었다.

“죽이진 않을 거야.”

그러니까 죽지 않을 정도로 고통을 준다는 말이지?

내 해석과 비슷하게 알아들었는지 바싹 긴장한 에이브는 허둥지둥 자신이 만든 게이트로 슬그머니 발을 들였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를 불렀다.

“어디 가? 아직 말 안 끝났는데.”

“약속은 최대한 빨리 지키는 게 낫잖아. 그래서….”

에이브가 말끝을 흐리는 것과 동시에 독보적인 존재감을 내뿜던 게이트는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원인은 분명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 가운데 레이프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세이딘이 말이 아직 안 끝났다잖아. 기다려 봐.”

“나, 날 어떻게 할 셈인데!”

“방금 못 들었어? 죽이진 않을 거야. 안심해.”

잘도 안심하겠다.

나는 레이프를 향해 눈을 가늘게 뜨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상황이 통쾌했다.

어차피 손해 보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가 무엇을 할지 지켜보기로 했다.

“그럼 원하는 대로 해 봐. 대신 죽이진 말고.”

그 말에 두 사람 사이로 천국과 지옥이 갈렸다.

*  *  *

“으, 음….”

작은 신음 소리와 함께 나는 의식이 조금씩 돌아왔다.

“세이딘? 정신이 드나?”

내 목소리를 들은 누군가가 곁에 와 물음을 던졌다.

보나 마나 단테일 것이 분명했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갑자기 쏟아지는 많은 양의 빛에 좀처럼 주위를 둘러보지 못했다.

“여긴….”

아직도 머리가 몽롱한 탓에 좀처럼 상황이 파악되지 않는 중이었다.

“깨어난 걸 보니 무사한 모양이군.”

담백한 어조로 읊조리는 무서운 내용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 잠들어 있었지, 참?

힘차게 눈을 깜박여 시야를 회복한 나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그는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단테, 이 나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널 살리려면 그것이 최선이었어.”

“어련하시겠어요.”

불만을 가득 담아 대꾸한 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지금은 누워 있는 게 좋아. 일주일 만에 깨어나는 거니 무리는 금물이다.”

“일주일이 지났다고요?”

“그래.”

하하, 자주 있는 일이다 보니까 이젠 놀랍지도 않네.

그러면서도 이런 것에 적응하는 나 자신이 안됐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나는 누운 채로 좀 더 정신이 또렷해지기를 기다렸다 입을 열었다.

“에이브는요?”

“에이브? 그게 누구지?”

“제 의식에 침투한 놈 말이에요.”

“설마 기억하는 건가…?”

단테의 푸른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희대의 발견이라도 한 듯한 표정에 나는 괜히 머쓱해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단은요.”

원래라면 의식 속에서 벌어진 일은 단편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전부 기억해 내지 못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나는 전부 기억했다.

진심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에이브에게 공격을 당하고도 현실에서 기억하지 못했으면 우연히 그를 조우하더라도 아무것도 모른 채 평소처럼 대했을 테니까.

‘그리고 레이프에게 도움을 받은 것도 기억하지 못했겠지.’

생각의 흐름과 함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레이프는요?”

이상하다? 의식 속에 등장한 걸 보면 레이프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 분명한데.

“영광이야, 세이딘. 눈을 뜨자마자 날 찾아 주다니.”

이거 봐라, 있지.

침대 근처의 소파에 앉아 있던 레이프는 눈가를 예쁘게 접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점점 가까워 오는 매혹적인 호박색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던 나는 한마디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꿈인가?”

레이프는 내 의식 속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였다.

이곳이 현실이라면 그는 소년 모습으로 되돌아갔어야 했다.

머릿속에 물음표가 하나둘 쌓이고 있을 때였다.

“아, 이 모습 말이야?”

레이프는 귀신같이 내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 대꾸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힘이 돌아왔어.”

“뭐? 데스티니를 켜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내가 황당해하는 반면, 레이프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놀랄 일은 아냐. 모습이 돌아온 경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가거든.”

생각과 함께 나는 미간을 좁혔다.

레이프가 힘을 되찾는 경우는 내가 데스티니를 연주해서 공략캐들의 호감도가 오를 때였다.

데스티니를 연주하지 않았어도 호감도는 착실하게 올랐으니 레이프가 힘을 찾을 만도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것이 내가 울다 기절하던 때만 해도 레이프는 소년의 모습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내가 기절해 있는 사이, 그러니까 의식 속에서 무언가가 계기가 되어 힘을 되찾았다는 뜻이었다.

이제 막 눈을 뜬 상태로 생각을 하려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런 나를 본 레이프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세이딘. 답은 의외로 가까이에 있거든.”

“뭔데?”

“그건 이따가 설명해 줄게. 지금은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어.”

레이프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곧 한 사람을 떠올렸다.

“에이브 말이지?”

“그래, 그러니 팔 좀 보여 줄래?”

나는 순순히 레이프에게 팔을 내밀었다.

조심스레 팔을 잡은 그는 꼼꼼히 살피더니 마나를 불어넣었다.

찬란한 황금빛이 스미자, 매끈했던 내 팔에는 문자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을 확인한 레이프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대로 발동하네.”

나는 빛의 여운이 남은 팔을 바라보았다. 흐릿해진 글씨들은 여전히 생소하기 짝이 없었다.

이것은 의식 속에서 레이프가 건 마법이었다.

에이브가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주장을 한 그는 내게 악의를 갖고 접근하는 순간, 자신에게 알람이 오는 것과 동시에 공격마법이 발동되도록 했다.

‘이티엘이 사 준 브로치랑 같이 발동하면 그것참 장관이겠어.’

자연스레 폭죽놀이의 광경이 떠올라 헛웃음을 머금었다.

차라리 폭죽놀이였으면 마음 편하게 예쁘다고 감탄하며 즐길 수라도 있지, 이건 그런 것도 아니잖아?

어쩌다 온몸으로 위협을 막아내는 상황이 되었는지 참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뭐, 어찌 됐건 앞으로는 에이브가 함부로 접근할 일은 없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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