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71)화 (71/122)

제71화. 11장. 진실은 개나 줘 버리라지 (6)

그럼에도 레이프는 호박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더니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니 영광이야, 나의 아가씨.”

“그런 의미에서 내려 주면 안 될까? 가까운데.”

몇 번이고 가까운 건 부담스럽다고 이야기를 했었기에 레이프라고 해서 모르는 바는 아닐 터였다.

그런데도 그는 침묵한 채로 나를 응시하기만 했다.

‘좋지 않아.’

공주님 안기로 안겨 있는 상황에 서로 간에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게다가 그윽한 시선 너머로 얼핏 스쳐 간 열기가 머릿속에 경고를 울렸다.

결국 이 상황을 참을 수 없었던 나는 애써 능청스러운 척 입을 열었다.

“그만 좀 쳐다봐. 얼굴 닳겠어.”

“닳지 않는다는 거 알잖아, 세이딘.”

달콤한 목소리로 말하면 뭐 하니?

쓸데없이 현실적인 대답인데.

예쁘게 접히는 눈을 본 나는 그제야 레이프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분위기를 잡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던 것이 부끄러워 괜히 목소리를 높였다.

“당장 내려놓지 못해?”

“하하, 귀엽긴. 무슨 생각을 했길래 이렇게 화를…. 아, 알았어! 내려 줄 테니까 그렇게 버둥거리지 마…!”

내가 지금 네놈 말을 듣게 생겼니?

어떻게든 일어나 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아기로 돌아간 것처럼 팔과 다리를 필사적으로 휘둘렀다.

그 과정에서 몇 차례 레이프의 얼굴이나 팔 같은 곳을 치게 됐지만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난 분명 경고했고, 그 말을 듣지 않은 것은 레이프였으니까.

결국 실랑이 끝에 승리한 나는 마침내 내 발로 땅을 디딜 수 있었다.

“세이딘, 너무해. 아무리 그래도 구해 준 사람인데 그렇게 싫어할 필요는 없잖아?”

“바닥이 전부 불바다가 된 것도 아닌데 계속 안겨 있어야 할 이유는 또 뭔데? 그리고 꾸준히 말했을 텐데? 가까이 오지 말라고.”

“왜? 두근거려?”

얼굴이 잘난 놈들은 곤란하다.

자신이 어떤 파급력을 미치는지 알고 저런 말도 서슴없이 하니까.

일반 사람들이었다면 대대적으로 욕을 먹고도 남았을 텐데, 잘생겼고 틀린 말이 아니다 보니 반박할 말이 없었다.

불만스러운 나를 보며 레이프는 활짝 웃었다.

“기뻐.”

아무래도 정신이 나간 모양이었다.

고작 저 한마디에 심장이 저 밑으로 떨어진 걸 보면.

‘심부전인가?’

아무래도 눈을 뜨고 현실로 돌아가면 곧장 건강검진부터 받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쟨 어떡하지?”

레이프와 이상해진 심장을 무시하기 위해 말을 돌렸다.

내 시선 끝에는 바닥에 처참하게 널브러진 에이브가 있었다.

그 와중에도 대답할 여력은 남아 있었는지 그는 발끈하며 외쳤다.

“날 잊고 있었단 말이야?!”

“기억해야 한단 법이라도 있어?”

“…나쁜 계집애.”

에이브는 어지간히도 할 말이 없었는지 애먼 나를 탓했다.

이글거리는 황금빛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니 헛웃음이 나왔다.

남의 목숨을 노리고 의식까지 쳐들어와 난동을 피운 놈이 누군데 나쁘네 마네 운운하고 있어?

한마디를 하기 위해 입을 벙긋하려고 할 때였다.

“고개 숙여.”

짧지만 강렬한 명령조에 나는 눈을 들었다.

햇살처럼 밝게 웃던 레이프가 한겨울처럼 냉기 가득한 표정으로 에이브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상황 파악이 안 된 듯한 상대를 향해 다시 한번 나직하게 말했다.

“고개, 숙이라고 했을 텐데? 못 들었어?”

에이브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맞받아쳤다.

“누가 마법사 따위에게…!”

“천족, 내가 고작 마법사 따위인가?”

서늘한 물음과 함께 레이프의 전신에서 흘러나온 위압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숨 쉬는 법조차 잊을 정도로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두렵고 압도적인 기운이었다.

옆에서 느끼는 것만으로도 이런데 정면으로 마주하는 에이브는 오죽할까.

“컥…!”

이를 증명하듯 에이브는 누군가 목이라도 조르는 것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모든 것을 압도한 공기를 거둔 레이프가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 고개 숙여. 그리고 허락할 때까지 이쪽을 바라볼 생각도 하지 마.”

에이브는 굴욕스러워하면서도 자신이 당해 낼 재간이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바닥에 납작 엎드러진 핑크빛 뒤통수를 보니 불쌍하기는커녕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속이 시원했다.

“물어보는 것에 잘 대답하는 것이 좋을 거야. 대답 여하에 따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말이야.”

“…알았어.”

노골적인 협박에 에이브는 순순히 대답을 했다.

레이프는 호흡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누가 시킨 일이지?”

음, 누구든 시작은 다 비슷한 법이구나.

나는 속으로 납득하면서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내 독단으로 벌인 일이야.”

“아티야가 시킨 게 아니고?”

레이프의 물음에 발끈한 에이브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티야가 이런 일을 시킬 리 없잖아! 이 세상에 그 아이처럼 착하고 순수한 인간이 달리 있을 것 같아?! 아티야가 아니었으면 진작에 이 세계는 멸망했어!”

억울함이 가득한 에이브의 말에는 몇몇 의문점이 있었다.

‘이것 봐라?’

나는 살짝 눈을 찌푸렸다.

이 세계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착각인 모양이었다.

어쩌면 또다시 페널티를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잔뜩 긴장하며 물음을 던졌다.

“아티야가 아니었으면 멸망했다, 라는 게 무슨 의미야?”

울컥해서 말을 쏟아 내던 에이브는 그제야 내 존재를 눈치채고는 얼굴을 파랗게 물들였다.

아무래도 내가 들어선 안 되는 이야기였던 모양인지 그는 황금빛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고개, 숙이라고 했을 텐데?”

그 와중에도 레이프는 착실히 에이브를 바짝 조였다.

씩씩대던 것이 언제냐는 듯 얌전히 고개를 숙이는 에이브를 보며 나는 마른 웃음을 흘렸다.

“넌 어디 가서 천족이라고 하지 마.”

“…시끄러워.”

나는 레이프가 한마디 하려는 것을 막으며 에이브를 재촉했다.

“됐고, 질문에 대한 대답이나 해.”

에이브의 대답은 좀처럼 이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는 결심이라도 다진 듯 입을 열었다.

“아티야는 특별해.”

“그렇겠지.”

여주인공인데.

내 속마음을 모르는 에이브는 서둘러 대꾸했다.

“‘선택받은 자’여서가 아니야. 아티야는…… 정말 특별해.”

“그러니까 뭐가 그렇게 특별한 건데?”

“그녀는…, 성녀야.”

와우.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에이브 딴에는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말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이미 레이프에게 들은 이상 그렇게 놀랍진 않았다.

그럼에도 감탄사를 터뜨린 것은 다시 들어도 기가 막힌 설정 때문이었다.

‘아주 되는대로 다 갖다 붙여놨구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제 이 세계는 게임 속이면서 동시에 현실인 것을.

애석하지만 받아들이는 수밖에.

아티야는 신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성녀였다.

그런 만큼 그녀는 세계를 향한 사명감도 투철했고, 신이 하는 일에 어떤 의문도 갖지 않고 앞장서서 그의 말을 따랐다.

레이프의 봉인은 그중 하나였다.

신은 레이프가 진실한 사랑을 깨우치기를 바라며 아티야를 보냈다.

자신의 사랑을 받는 그녀라면 신의 금기를 깬 레이프를 얼마든지 바꿔 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신의 예상과 달리, 레이프는 아티야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사랑했지만 그것은 그가 바라는 기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알겠어? 아티야는 지금껏 자신을 희생해 온 사람이야. 레이프가 사랑만 했어도 그 아이가 이렇게까지 고통받고 세계가 반복되는 일 따위는 없었다고.”

설명을 끝낸 에이브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러다 레이프한테 또 한 소리 들으려고.’

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생각 이상으로 쓸데없이 방대하고 구구절절한 이야기라 받아들이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 말이 안 믿기는 모양이지?”

이런 건 또 귀신같이 알아채는 에이브였다.

애초에 속내를 감출 만큼 위협적인 상대도 아니었기에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안 믿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시작부터 끝까지 아티야가 불쌍하다는 말뿐이잖아.”

“그게 사실이야. 몇 번이고 말하지만 아티야는 이 세계를 위해 희생….”

“그걸 누가 바랐는데?”

내 물음에 에이브가 멈칫했다.

의문으로 가득한 황금빛 눈동자를 마주한 나는 말을 이어 갔다.

“신의 금기가 뭔진 모르겠지만 그걸 어긴 건 레이프야. 그러면 레이프만 봉인시키면 그만인 것을 왜 이 세계 전체의 시간을 반복시키는 건데?”

“그건, 레이프가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하기 위해…….”

“그게 이상한 거지.”

아, 이걸 어떡하면 좋냐.

의문이라곤 일절 없는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뒤통수를 세게 때려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답답한 마음을 꾹 누르고 나는 설명했다.

“잘못을 저지른 게 레이프라면 레이프와 끝내면 될 일이야. 그런데 레이프에게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해 주려고 관계없는 다른 사람들까지 휘말리게 한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백번 양보해서 주변에서 레이프가 금기를 어길 때까지 방관했다는 이유로 그가 살던 시대가 반복되었다면 이해했을지도 몰라. 그런데 이 세계는 레이프가 봉인된 후로부터 500년이나 지났어. 이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 것 같아?”

의문을 담았던 에이브의 눈동자가 서서히 떨리기 시작했다.

옆에 선 레이프도 놀란 듯,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나는 호흡을 골랐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아마 신은 레이프의 봉인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성녀인 아티야가 태어났고, 그녀라면 레이프가 사랑을 깨닫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로 인해 이 세계의 시간은 반복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가리키는 바는 명백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