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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69)화 (69/122)

제69화. 11장. 진실은 개나 줘 버리라지 (4)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단테는 성큼 내 지척으로 다가왔다.

그 후로도 여분의 베개를 던져 보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더 던질 것이 없나 두리번거리던 순간, 흔들거리는 침대와 함께 가까워진 숨결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것은 어디선가 맡아 본 듯한 달큼한 꽃향기였다.

‘이런 빌어먹을….’

이틀 넘게 기절했었다고 말한 주제에 또 이러기야?

흐릿해지는 시야에 비친 조각 같은 단테의 입술을 마지막으로 나는 아득히 멀어지는 정신을 따라 그대로 눈을 감았다.

*  *  *

세이딘이 쓰러진 뒤, 커튼 너머의 그림자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이딘은?”

“말씀하신 대로 잠을 재웠습니다. 앞으로 하루에서 이틀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단테는 세이딘을 조심스레 침대에 눕히며 정중하게 대답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그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그럼 마음에 들 거라고 생각하나?”

“…어떤 부분이 문제인지 말씀해 주신다면 시정하겠습니다.”

상대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됐어, 이번은 그냥 넘어갈 테니.”

어차피 말을 해도 단테는 알아듣지 못할 것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지도 못한 단테에게 설명을 해 봐야 세이딘을 향한 마음을 자각하게 할 뿐이었다.

가뜩이나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 자들이 한둘이 아닌 마당에 신경 거리를 하나 더 늘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커튼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레이프는 느릿한 걸음으로 세이딘의 침대로 다가왔다.

얼마나 억울했는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로 잠들어 있었다.

“다…. 죽어……!”

“푸흡…!”

어설픈 내숭을 벗어던진 세이딘의 본심에 레이프는 반사적으로 터져 나온 웃음을 꾹 참았다.

웃음 때문에 앞으로 은밀히 진행해야 하는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았다.

“넌 이런 때조차도 유쾌하구나.”

작게 중얼거린 레이프는 흐트러진 세이딘의 머리카락을 넘겼다.

부드러운 손길에 짜증이 가득했던 얼굴이 한결 나은 표정으로 펴졌다.

그 모습에 레이프는 입가에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항상 화나거나 난감해하는 모습만 봐 왔기 때문인지 세이딘의 웃는 얼굴은 더욱 각별하게 다가왔다.

“레이프 님,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단테는 충동적으로 물음을 던졌다.

그는 스스로의 행동에 놀라면서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이를 알아채지 못한 레이프는 방해받은 기분에 살짝 눈을 찌푸릴 뿐, 곧 그에 대한 대답을 했다.

“내가 직접 세이딘의 의식 속으로 들어갈 거야.”

“제 마나로도 역부족이었습니다. 아직 힘을 완전히 되찾지 못하신 이상, 레이프 님도….”

“단테, 내가 누구지?”

나직한 물음에 단테는 등줄기가 오싹했다.

지금껏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감각에 두려움과 희열이 느껴졌다.

거의 평생에 가까운 시간을 대마법사로 살아온 단테가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감각들이었다.

단테는 전신에 퍼지는 전율을 뒤로하고 상대를 향해 경의를 표했다.

“전과 후로도 없을 대마법사이십니다.”

이채를 띤 푸른 눈동자에 비친 레이프의 눈동자는 한없이 서늘하고 차가웠다.

세이딘 앞에서 보여 주는 다채로운 표정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지켜봐.”

짧은 대답과 함께 레이프는 조심스레 세이딘의 손을 잡았다.

맞잡은 손을 중심으로 달을 녹인 듯한 은빛과 함께 소년이 아닌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원래 모습을 되찾은 레이프의 몸은 희미하게 변해 갔다.

세이딘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레이…!”

그 모습에 당황한 단테가 입을 열었다 곧 다물었다.

줄곧 만나길 고대했던 레이프였다.

애초에 봉인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이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조차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니 단테는 걱정보다 기대를 품기로 했다.

짧은 순간의 변화를 눈치챈 레이프는 조금 놀란 눈으로 그를 보더니 곧 피식 웃었다.

“그래, 그래야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레이프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  *  *

“하나같이 치사하고 이기적인 놈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깊은 분노로 가득 찬 외침이 울려 퍼졌다.

“어떻게 된 게 하루도 얌전히 있는 놈들이 없어? 사채업자야?! 돌려막기를 한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여기저기서 시비를 거는데!!”

부글부글 끓어오른 마음은 좀처럼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하, 진짜…. 다 죽었으면.”

마음에 있는 모든 감정을 쏟아 내다 기력이 빠진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요한 정적을 따라 생각에 잠겼다.

울다가 지쳐 정신을 잃었고, 눈을 뜨니 단테가 이틀이 지났다고 말했다.

그렇게 상황 설명을 듣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볼까 하고 있던 찰나, 단테에 의해 반강제로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단테, 이 나쁜 놈. 재울 거면 곱게 재우든가, 왜 갑자기 얼굴은 들이밀어서 사람을 놀라게 만들어?”

나는 불만 가득 투덜거리면서도 어쩌면 그것도 일종의 수법이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상대를 방심시켜 함정에 빠뜨리는 일은 현실에서도 미디어에서도 곧잘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 근데 정말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지?”

도무지 단테의 생각을 알 수가 없던 나는 턱을 괸 채로 미간을 찌푸렸다.

마지막에 했던 말을 믿고 좋게 생각하기에는 잠에서 깨지 않았으면 위험할 뻔했다는 말이 걸렸다.

“설마 영영 잠들어라, 뭐 이런 건 아니겠지?”

낙천적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나는 곧 입을 다물었다.

한 가지가 마음에 걸리기 시작하니 이것저것 전부 열린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에휴, 더 생각하지 말아야지.”

그런다고 해서 현 상황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 데다 한번 생각에 빠지기 시작하면 대체적으로는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사고로 빠지기 마련이니 말이다.

“일단 좀 정리해 보자.”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여기가 내 의식 속이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자각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곳에 대한 인식을 하는 조건으로 잠에서 깨면 아주 일부를 제외하고는 여기서 있었던 일들은 전부 잊어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앞으로 뭘 하지?”

일반적으로 잠이 들고 난 후의 의식은 언제나 연극 무대처럼 배경이 존재했고, 그곳에서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

물론 지금처럼 아무것도 없이 캄캄한 경우도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오랜 시간 지속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고민할 필요 없어.”

한참을 끙끙거리고 있는 내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꿈이 시작되려는 건가?’

뭐, 어떤 것이든 이대로인 것보다는 나았기에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상대를 본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암흑 속에 서 있는 건 달콤한 솜사탕 같은 분홍빛 머리에 찬란한 황금빛 눈동자의 미남이었다.

“에, 에이브…?”

얘가 왜 여깄어?

익히 아는 얼굴의 등장에 떨떠름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놈이 꿈에 나올 만큼 친근하다 느껴 본 적은 없는데…….”

“다 들려, 세이딘.”

“응, 알아. 들으라고 한 거야.”

담백한 내 대답에 에이브는 발끈하는가 싶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내가 너한테 뭘 바라겠어. 자기가 지금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도 모르는걸.”

도통 모르겠네. 난 에이브가 환상이라는 걸 아는데도 왜 이렇게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걸까?

평소라면 충동적인 말은 되도록 자제하려 했지만 여기는 내 의식이자 꿈속이었다.

그러니 여기서라도 스트레스 없이 할 말은 다 해야지.

“안 물어봤고 안 궁금하니까 말 끝났으면 꺼져 줄래? 네 얼굴 볼 기분이 아니거든. 물론 언제나 그랬지만.”

단테는 내가 아티야를 만난 날로부터 이틀이 넘었다고 그랬지만 정작 내게는 오늘 일처럼 생생하기 짝이 없었다.

각오 없이 오로지 안쓰럽단 마음으로 나를 찾아온 아티야도 별로지만, 그런 그녀를 어떻게든 감싸려는 에이브는 더욱 보고 싶지 않았다.

파리라도 쫓듯 건성으로 팔을 젓는 내 모습에 에이브는 미간을 왈칵 찌푸렸다가 곧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도록 표정을 관리했다.

“그래, 그게 네가 원하는 마지막 모습이라면 어쩔 수 없지.”

에이브는 말을 마치자마자 나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을 중심으로 하얀 빛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상해.’

꿈의 일부여야 할 에이브가 만들어 낸 빛은 익숙하기는커녕, 강한 이질감을 띠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너…, 환상이 아니구나?”

내 물음에 에이브는 힘껏 입가를 끌어 올렸다.

설명하지 않아도 단번에 알 수 있는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안됐네, 차라리 눈치라도 없으면 꿈인 줄 알고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었을 텐데.”

에이브는 어느새 성인 머리만큼이나 커진 빛 덩이를 내게 던졌다.

현실이었다면 필사적으로 피해 다니며 소리를 질렀겠지만 여기는 내 의식 속이었다.

그것은 즉, 바라는 것은 얼마든지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빛 덩이가 점점 가까워지는 가운데, 머릿속으로 한 가지를 떠올렸다.

그저 빛처럼 스친 생각일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어느새 내 손에는 야구방망이가 들려 있었다.

나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난 뒤, 사정거리에 들어온 빛을 향해 힘차게 야구방망이를 휘둘렀다.

정확하게 명중한 빛 덩어리는 에이브의 머리를 넘어 저 멀리 날아가 종래에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어, 어떻게….”

에이브는 정신없이 흔들리는 동공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한 그를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배팅 센터를 좀 좋아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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