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11장. 진실은 개나 줘 버리라지 (2)
“하아….”
아티야의 발걸음이 멀어지고 그녀를 태운 마차가 떠나는 소리까지 듣고 나서야 나는 짙은 한숨을 터뜨렸다.
“세상에 뭐 이런 정신 나간 일이….”
차라리 공략캐들에게 시달리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티야와의 대화는 이 세계에 오면서 겪은 어떤 것보다도 최악이었다.
충격이 가시지 않은 가운데, 소파에 늘어진 나는 몇 번이고 마른세수를 했다.
조금 조용히 있으려나 싶었건만, 복도 너머로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응접실 문이 열렸다.
앤이었다.
“아가씨, 손님이 갑자기…!”
“알고 있어.”
호들갑스럽게 달려왔던 앤은 내 모습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저 여자랑 무슨 일이 있었길래 말라비틀어진 풀처럼 축 처져 있어요!?”
기운이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예고 없이 훅 치고 들어온 비유가 어이없어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말라비틀어진 풀이라니…. 앤,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냐?”
“심하다뇨, 거울이나 보고 그런 말씀 하세요.”
“진이 다 빠져서 거울 볼 힘도 없어.”
“그럼 제가 보여 드려야죠.”
이런 데선 쓸데없이 쿨한 앤은 응접실 구석에 있던 이동식 전신거울을 가져와 나를 비췄다.
그녀의 말대로 내 모습은 딱 말라비틀어진 풀, 그 자체였다.
“어, 정말이네.”
“그쵸? 제가 그렇다고 했잖아요.”
앤은 별것도 아닌 일에 으쓱거렸다.
어쩐지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런 걸 하나하나 지적하기엔 피로했기에 그만두었다.
“여튼 할 말 다 했으면 나가 줄래? 혼자 있고 싶어.”
어찌 됐건 앤의 엉뚱한 표현 덕에 한결 기분은 나아졌지만, 밀려오는 피로감 때문에 좀 쉬고 싶었다.
“의원님을 불러 드릴까요? 아니면 사람을 불러 방으로 옮겨 드릴게요.”
어릴 적부터 자매처럼 지내 온 사이인 만큼 내 기분을 잘 아는 앤은 언제 농담을 던졌냐는 듯 진지하게 물었다.
“아냐, 괜찮아. 그냥 여기 좀 있다가 괜찮아지면 알아서 움직일게. 오늘은 누구도 마주치기 싫으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전해 줘.”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낸 앤은 고개를 끄덕인 뒤 조용히 응접실을 나섰다.
오롯이 혼자 남게 된 나는 신발까지 벗고 소파에 누웠다.
착 감기는 폭신폭신함에 몸이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째 단순하게 생각하려 할수록 복잡해지냐….”
생각이 계속될수록 그 안에서 허우적댈 뿐인지라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애썼건만, 이런 일이 벌어지니 한숨만 푹푹 나왔다.
“설마 이대로 살아야 하나?”
무심코 흘러나온 혼잣말에 나는 고개를 미친 듯이 저었다.
시스템 창에 휘둘리고 공략캐에게 시달리는 것만으로도 끔찍한데 계속 같은 시간대를 반복하는 삶이라니,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왜 이 꼬라지가 된 거야?”
그게 무엇이 됐건 한순간이라고 해도 레이프가 사랑을 느끼면 그만인 일 아닌가?
“그러게 말이야,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네.”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눈을 찌푸렸다.
하도 아무 데서나 불쑥 나타나는 것에 적응해서 그런지 이젠 놀랍다기보단 ‘또 저러네.’ 하는 마음이었다.
나는 상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앤한테 못 들었어? 오늘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들었어, 그래서 더욱이 혼자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생각한 거고.”
대답과 함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안녕, 세이딘? 생각보다 얼굴이 좋아 보이네. 다행이야.”
나를 응시한 호박빛 눈동자가 달처럼 호를 그렸다.
“좋겠다, 기분 좋아 보여서.”
“당연하지, 내 아가씨를 볼 때면 언제나 설레는걸.”
예전이라면 헛소리로 치부하고 넘어갈 말이었건만, 요 근래의 레이프의 태도는 한없이 진지했기에 여러 의미로 무시할 수 없었다.
다른 날이었으면 화제를 돌렸겠지만 지금은 상태가 썩 좋지 않으니 솔직하게 말했다.
“데스티니, 나 진짜로 이야기할 기분 아냐. 그러니 오늘은 좀….”
“아티야가 왔다 갔었지?”
앤에게 들은 것인지, 아니면 데스티니를 통해 그녀의 기운을 느꼈는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는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나를 보며 웃던 반짝이던 미소가 단숨에 서릿발이 내릴 것처럼 바뀐 것이 그 증거였다.
상태를 봐선 곱게 돌아갈 것처럼 보이지 않아 나는 나가라고 하는 것을 포기하고 입을 열었다.
“그래, 그게 왜?”
“무슨 말 했어?”
“별말 안 했어. 그냥… 모든 걸 원래대로 돌려놓겠다 정도?”
내 말을 알아들은 레이프는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머금었다.
“그게 별말 아니라고?”
“애초에 어떤 각오도 없었는걸. 그러니 별말이 아니지.”
레이프는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는데도 대략적으로 어떤 말이 오갔는지 알아차렸다.
내 맞은편 소파로 걸어와 앉은 그는 조금 생각에 잠기는가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럴 수 있지. 아무리 아티야가 평범한 여자가 아니라고 해도 이렇게 긴 세월을 버티는 건 한계가 있으니 말이야.”
아티야를 옹호해 주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저 말은 좀 정정하고 싶었다.
“아무리 아티야가 악기를 잘 다뤄도 그렇지, 그 능력이랑 같은 시간을 계속 사는 거랑 비교를 하면 어떡해?”
“응? 그게 무슨…. 설마, 천족에게 아무것도 못 들었어?”
“뭘?”
내 물음에 레이프는 얼굴을 왈칵 구기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신과 관련된 놈치고 멀쩡한 놈이 없어.”
제발 혼자만 알지 말고 나도 알려 줬으면 좋겠다.
말 대신 눈으로 온갖 욕을 쏘아붙이는 걸 눈치챘는지 레이프는 나를 보며 말했다.
“아티야는 성녀야.”
충격이 연달아 이어지다 보니 이제는 어느 정도 면역이 생긴 모양이었다.
머리가 멍한 와중에도 사고를 하는 것이 그 증거였다.
‘아…, 그래서 에이브가 지키려고 했구나.’
다른 것은 몰라도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게 납득이 갔다.
아티야는 여주인공이라서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성녀이기 때문에 사랑을 받았고, 여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또 사랑을 받았지.’
그것이 아티야의 바람과 일치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내가 왜 거기까지 신경 써야 해?’
나는 어쩐지 화가 났다.
그저 의식의 흐름처럼 이어진 생각이었음을 알지만, 그럼에도 괜히 아티야에 대해 더 알아야 하고 미안해야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데스티니, 이 이야긴 여기서 그만해.”
나는 레이프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그가 왜 아티야에 대해 묻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떤 의도가 있든 간에 더는 듣기도 말하기도 싫었다.
레이프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네가 그런 기분이 아니라면 더 묻지 않을게.”
“그래, 고마워.”
영혼 없이 대답한 나는 또다시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비우려 할 때였다.
“세이딘, 한 가지만 물어볼게.”
“묻지 마.”
“아티야가 제대로 결심을 한다면 그녀에게 날 넘길 거야?”
내 말을 무시하고 날아든 질문은 뼈가 있었다.
게다가 얼마나 열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얼굴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시위에 가까운 레이프의 행동을 견디지 못한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꾸역꾸역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왜 궁금한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안 그러면 어쩌라는 건데? 계속 이대로 살란 소리야?”
그 말에 발끈한 나는 상체를 일으켰다.
레이프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올곧게 나를 향한 시선만으로도 그에 대한 대답은 충분했다.
나는 욱하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레이프를 향해 소파에 있던 쿠션을 닥치는 대로 집어 던졌다.
“나쁜 놈!”
“잠깐, 세이딘…!”
“넌 너밖에 생각 못 하지?!”
한 번 터진 울분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정말 화가 났다.
모든 것이 우연이었을 뿐이었다.
원래 세계에서 고된 삶을 살았던 것도.
게임 속 엑스트라에 빙의한 것도.
모든 것이 내 의지와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항상 마음에 드는 일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 안에서 나는 제법 열심히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단 한 번, 충동적으로 게임 속에서 보던 마법의 바이올린을 잡았다는 이유로, 최선을 다한 노력조차 빼앗아 간다면 나는 무엇을 기대하고 바랄 수 있을까?
“세…이딘?”
묵묵히 날아오는 쿠션을 맞던 레이프의 얼굴에 당혹이 어렸다.
깨달았을 때는 난 이미 방울방울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손을 갖다 대자, 눈가에 어린 축축한 물기가 단번에 손끝을 적셨다.
한 번 인지를 하고 나니 괜스레 더욱 서러워져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흐윽…!”
원래 소리를 내지 않고 우는 편인데도 그간 쌓인 서러움이 상당했는지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나오는 흐느낌은 어떻게 막을 도리가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울고 있을 때였다.
“미안해.”
속삭임과 함께 온기가 내 몸을 감쌌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깜짝 놀랐지만, 그것은 곧 무너진 댐처럼 쏟아지는 감정 속에 묻혀 버렸다.
장마처럼 끊임없이 우는 나를 보던 레이프는 나를 더욱 깊이 안았다.
“미안해, 세이딘. 정말 미안.”
계속해서 반복되는 사과 속에서 나는 점점 멀어지려는 의식을 놓았다.
* * *
눈을 떴을 때는 따사로운 햇살이 노을에서 밤으로 바뀐 때였다.
“정신이 들었나?”
담담한 물음에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오랜만에 보는 이름뿐인 스승이 앉아 있었다.
“단테?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요?”
“네가 쓰러졌단 말을 듣고 왔다.”
담백한 대답에 멍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아, 나 울다가 쓰러졌었지?’
뒤늦은 깨달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물밀듯이 두통이 찾아왔다.
“아직 몸을 일으키지 않는 게 좋아. 오랜 시간 기절해 있다 깼으니 말이야.”
“뭐라고요? 오랜 시간이라니, 대체 얼마나 시간이 흘렀길래….”
“정확히 이틀하고도 8시간이 흘렀다. 두 시간 더 지났으면 위험할 뻔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