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11장. 진실은 개나 줘 버리라지 (1)
“아티야? 안색이 좋지 않은데 괜찮아요?”
“아, 물론이죠.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과 달리, 아티야의 표정은 갈수록 좋지 않았다.
그녀는 무언가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쩌지….’
괜찮다고 했는데 또 물어보면 기분이 상할 수도 있으니 섣불리 묻기도 그렇고.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상황에 한참을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차였다.
“세이딘, 할 말이 있어요.”
무언가 결심한 듯한 아티야가 똑바로 나를 바라보았다.
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가슴이 찔렸다.
“그…, 아티야,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게….”
“아니에요, 세이딘. 이건 꼭 말해야 해요. 그러니 조금만…. 심호흡만 하고 말할게요.”
너무나도 간절한 부탁에 나는 떨떠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티야의 상태를 봐서는 싫다고 해도 소용없을 것이 뻔하기에 원하는 대로 하게 두는 것이 나았다.
몇 번을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 아티야는 아까보다 안색이 한층 나아졌다.
이쯤 되니 무슨 말이기에 해바라기처럼 환하게 웃던 사람이 저러는 건지 궁금해졌다.
“죄송해요, 세이딘.”
“무…엇이요?”
“그냥 전부요.”
느닷없는 사과에 나는 진지하게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이 세계 사람들은 왜 이렇게 주어를 빼먹을까?
원래부터 화법이 그랬던 건지, 아니면 게임을 만든 놈들 때문인지, 어느 쪽이건 굉장히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아티야가 왜 다짜고짜 사과를 했는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먼저 사과부터 하면 잘못한 일에 대해 말하기가 조금 더 수월하기 때문이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선 조금도 그렇지 않지만, 어찌 됐건 그걸로 심적으로 말할 수 있는 용기로 이어지는 것이니 뭐라고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가만히 있자, 아티야는 머뭇거리며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실은… 저도 이 세계에 대해 알고 있어요.”
“네…?”
누군가 뒤통수를 후려친 것 같은 충격과 함께 반사적인 물음이 흘러나왔다.
아티야는 그런 내 반응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시선을 마주치기 힘들었는지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로 말을 이어 나갔다.
“에이브에게 들으셨을 거예요. 데스티니를 중심으로 이 세계가 반복된다는 걸요.”
“아니, 그걸 어떻게…. 에이브가 말해 주던가요?”
황당한 마음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렇게 아티야를 애지중지하는 것 같더니 아주 못 하는 말이 없네? 내 예상과 달리, 아티야는 자조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에이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 사실을 아는 이유는 제가 그 기억들을 전부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충격이 머릿속을 휩쓸었다. 반복되는 세계를 기억한다.
그 말은 곧 여주인공으로서 공략캐들과 엮이며 엔딩을 반복했다는 의미였다.
결론과 함께 내 입은 절로 움직였다.
“절 속였군요.”
그제야 사과가 이해가 되었고, 그동안 있던 일들이 하나둘 퍼즐 조각처럼 딱 들어맞기 시작했다.
아티야는 내 대답에 작게 움찔거리고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쥐어짜듯 겨우 목소리를 냈다.
“미안해요, 세이딘. 제겐 어떤 말도 할 자격이 없어요.”
“그런 이야기를 듣자고 한 말이 아니에요.”
나는 충동적으로 울컥하는 마음이 드는 것을 꾹 참았다.
머리와 마음이 혼란스럽다고 해서 감정적으로 굴었다간 어떤 것도 얻어 내지 못한다.
이성으로 행동을 억누른 나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랬어요?”
많은 의미를 내포한 물음에 아티야는 푸른 눈동자를 잘게 떨었다.
알고 나니 새삼 그녀의 표정에 어린 감정이 더욱 다양하게 보였다.
아티야는 떨리는 손을 온 힘 다해 맞잡은 채로 입을 열었다.
“무서웠어요.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 쳐도 바뀌지 않는 현실이.”
그 말에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티야가 말한 삶은 지금 내가 겪고 있었고, 동시에 원래 세계에서도 겪었던 일이었다.
때문에 이 세계에 오기 전까지 나는 <바이올린과 꽃미남들>을 열심히 플레이했다.
호감도를 올리기 위해 약간의 노력을 하면 공략캐들과의 연애 이벤트라는 보상이 따랐고, 그것을 반복하다 보면 엔딩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고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가 아무 말도 못 하는 사이, 아티야는 아련한 표정으로 기억들을 더듬으며 말했다.
“많이 노력했어요. 이 세계가 더는 반복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어느 한 사람도 소홀히 하지 않고 마음 다해 사랑했어요. 모든 걸 쏟아서 사랑했지만 결실을 맺고 나면 언제나 똑같이 과거로 돌아왔죠. 그렇게 조금씩 마음이 깎여 가던 중, 에이브가 도망치자고 말했어요. 그리고 그 후로는 세이딘이 본 대로예요.”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전혀 다른 이유라고 해도 나 또한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마음속에 조금씩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이유가 어찌 됐건 결국 아티야도 에이브의 행동에 동의를 했고, 내가 그녀를 대신해 여주인공의 위치에 있게 된 걸 알면서도 못 본 척한 것이었으니까.
한 번 시작된 말은 점차 추궁하듯이 흘러갔다.
“갑자기 이야기를 하는 건 무슨 저의인가요? 이제라도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 용서라도 받으려는 건가요?”
“아니, 아니에요!”
아티야는 고개를 저으며 크게 부정했다.
노력을 해도 표정이 추슬러지지 않는 나를 본 그녀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사과한다 해서 용서받는다는 안일한 생각은 하지 않아요. 아무리 사과한들, 저로 인해 세이딘이 피해를 입었던 시간들은 되돌릴 수 없으니까요.”
여주인공이라 그런지 말은 참 잘하네.
내 눈치를 살핀 아티야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단지 제가 이 자리까지 온 이유는 지금이라도 다시 제자리로 돌리기 위해서예요.”
“제자리로… 돌린다고요?”
의외였다.
그렇게 반복해서 살아온 삶이 지긋지긋해서 도망쳤으면 제자리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 텐데.
‘뭐, 아티야에게 데스티니를 만져 보게 하려던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것과 별개로 대체 무슨 이유로 저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땅콩 줄기처럼 쏟아지는 의문을 뒤로한 나는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게 가능한가요?”
“네, 가능해요. 제가 데스티니와 접촉하면요.”
그 와중에 생각했던 가설이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 소소하게 기뻤다.
‘하 참, 이게 뭐라고.’
나는 절로 입가에 미소가 걸리려는 걸 애써 참았다.
괜히 웃었다가 화가 풀렸다고 멋대로 생각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제멋대로인 놈들을 상대하다 보니 별걸 다 신경 쓰고 있네.
“그러면 그 후는 어떻게 되나요?”
“말한 대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거예요. 세이딘은 원래의 일상을 되찾을 거고, 저는 데스티니에게 선택받은 자로서 그동안 당신과 얽혔던 사람들과 다시 관계를 이어 가겠죠.”
“그들이 계속 저에게 관심을 가질 가능성은요?”
“지금은 세이딘을 저로 인식하기 때문에 그런 것뿐,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면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아티야는 확신에 차서 말했지만 나는 조금 마냥 그렇구나, 할 수 없었다.
지금껏 이 지긋지긋한 환경과 시스템에서 벗어나려고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럼에도 상황은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경계와 의심뿐이었다.
한편 고민 깊은 내 얼굴을 바라보던 아티야가 입을 열었다.
“세이딘, 뭘 걱정하는지 알아요. 저 또한 걱정했던 일인걸요.”
“제가 그 말을 어떻게 믿죠?”
“영원히 절 안 믿어도 괜찮아요. 하지만 이번만큼은 부디 믿어 주세요.”
간절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아티야의 모습에 나는 날 선 태도로 대꾸했다.
“말로는 뭔들 못 하겠어요. 별이라도 따다 줄 수 있겠죠.”
“세이딘, 제발…. 어떻게 해야 믿어 주실 건가요?”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아티야의 표정에 순간 짜증이 차올랐다.
지금껏 모르는 척 피해 다닐 땐 언제고, 대뜸 나타나서 믿어 달라고 하면 어떤 사람이 선뜻 ‘그럴게요.’ 하겠냐고!
“그럼 어디 한번 증명해 봐요.”
나는 신경질적인 대답과 함께 팔을 들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데스티니가 나타나 내 손에 착 감겼다.
나는 그것을 곧장 놀란 표정을 짓는 아티야의 앞에 들이밀었다.
“자요, 데스티니예요. 굳이 믿어 달라 하지 않아도 이걸 만지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테니 충분할 것 같은데, 어때요?”
아티야는 눈을 동그랗게 뜰 뿐, 조금도 미동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혹시나 했던 일인데 역시나였다.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릴 거라던 아티야의 말은 그저 그뿐이었다.
데스티니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만지지 못하는 것이 그 증거였다.
가슴 한편에 아티야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했던 마음들이 재처럼 흩어져 버렸다.
서늘한 물음이 입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아티야, 대체 여기엔 뭣 하러 온 거예요?”
“세, 세이딘. 전…!”
“미안하다, 모든 걸 제자리로 돌려놓겠다, 믿어 달라. 지금 그 말들 중에 제가 조금이라도 신뢰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었죠?”
어떻게든 해명하려고 하던 아티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음속에 실망감이 가득 차올랐다.
더는 대화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만 돌아가 주세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보던 아티야는 내가 조금도 미동하지 않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 미안해요….”
몇 번이고 이어진 사과는 응접실의 문이 닫힐 때까지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