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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65)화 (65/122)

제65화. 10장. 우연이 계속되면 의심해라 (7)

‘이…, 미친놈이!’

아무리 아티야가 안타깝다고 해도 그렇지, 전혀 관계없는 나를 끌어들여 놓고 시치미를 떼?

“그웨니르 영애…?”

이티엘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머릿속이 뒤죽박죽 꼬이는 바람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단숨에 끓어올랐던 분노는 단숨에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아티야도 여주인공으로 인식한다는 사실을 안 이상, 이대로 있을 수 없었다.

“바르시, 아티야를 볼 때 느낀 감정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어요?”

“그건 신경 쓸 필요 없다, 영애. 재차 말하지만 내가 마음에 품은 건 그대뿐…….”

“폐하의 마음을 의심하는 게 아니에요.”

한숨 섞인 내 말에 열심히 해명하던 이티엘은 멈칫했다.

“그렇다면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어서요. 생각해 보세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정상적인 건 아니잖아요?”

“그, 렇지.”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이티엘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내게 물었다.

“어떤 부분 때문인지는 말해 주지 않을 건가?”

“…네, 송구하게도 그래요. 확실하지 않은걸요.”

좀 더 그럴듯하게 말할 수도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나았다.

괜히 이것저것 염두에 두고 머리를 굴리면 본전도 못 찾을 수 있으니까.

이티엘은 묻고 싶은 것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

“영애의 바람이라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 대신 그 전에 먼저 이 시간을 좀 더 의미 있게 보냈으면 해.”

희미하게나마 희망이 보인 마당에 뭔들 못 할까.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된 거, 성심성의껏 데이트를 즐겨 주겠어.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티엘과 함께한 번화가 구경은 성공적이었다.

돌아다닐 곳이라곤 공방 외엔 정해 두지 않았지만, 언제나 일정이 정해진 그에게 정해진 곳 없이 돌아다니는 것은 상당히 신선하고 기분전환이 되는 일이었다.

나 또한 처음에는 목적과 수단을 위해서 함께한 시간이었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그래, 솔직하게 말해서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들떠서 그랬다.

어찌 됐건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약속대로 이티엘은 아티야에게 느꼈던 감정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줬다.

그것들은 정확히 게임 속에서 묘사되었던 그의 심리와도 일치가 되어서 나는 더욱 확신했다.

아티야가 데스티니를 만지게 되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라고.

그리고 그날은 얼마 가지 않아 찾아왔다.

“어서 와요, 아티야!”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세이딘!”

마차에서 막 내린 아티야는 나를 보며 활짝 핀 꽃처럼 미소를 지었다.

어김없이 아름다운 모습이 어찌나 눈부시던지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아티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정말 괜찮나요? 전 하루만 머무르게 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며칠씩이나….”

“여기까지 와서 또 그러는 거예요?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부모님도 다 허락하신 일이에요. 그러니 원하는 만큼 지내도 돼요.”

내 말에 아티야는 수줍게 미소 지었다.

하여튼, 누가 여주인공 아니랄까 봐 말도 생각도 예뻐요.

‘그런데 난 이런 사람에게 짐을 던져 주려고….’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힘차게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데스티니를 비롯해 모든 공략캐들이 허락된 것은 아티야였지 내가 아니었다.

애써 꾸물꾸물한 마음을 구석에 구겨 넣은 나는 아티야를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그웨니르 저택은 가진 재력에 비교하면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 저택 근처의 제나드 자작 저택이 더 클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대단히 으리으리하고 대단한 규모가 아님에도 소개해 주는 곳마다 아티야가 감탄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예술품을 다루는 집안에서 자란 것을 감안했을 때 오히려 우리 저택보다 그녀의 저택이 훨씬 볼 것도 많을 텐데도 그녀는 끊임없이 신기함을 감추지 않았다.

결국 머쓱해진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신기해요?”

“네! 제 주변 분들의 집은 주로 예술과 관련된 일을 하시는 분들이어서 언제나 예술품이나 여러 가지 잡동사니로 꽉 차 있거든요. 그런데 세이딘의 집은 장식이 많지 않고 창문도 크게 나 있어서 굉장히 신선해요!”

아, 그러니까 우리 집엔 예술품이 많이 없어서 신기하단 거구나.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서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상대는 아티야였다.

그녀는 게임에서 본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맑고 순수했다.

‘저러니 에이브가 지켜 주려 하는 거겠지?’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 좋아하는 저런 사람을 누가 돕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증거로 마음 구석에 묻어 둔 죄책감이 또다시 고개를 쳐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후우, 정신 차리자.’

그저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뿐이야.

스스로를 다독인 나는 아티야에게 구경시켜 줄 만한 곳을 전부 보여 준 뒤, 내 전용 응접실로 향했다.

큰 규모가 아니라고 해도 저택 곳곳을 돌아다녔으니 어느 정도 피로가 쌓였을 터였다.

오후의 응접실은 한창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티야는 탁 트인 창문에 감탄하며 내가 권한 소파에 앉았다.

저택에 있는 소파 중 유독 온몸을 감싸는 감촉이 마치 마시멜로 같아서 아끼는 것이었다.

“폭신하네요! 구름 위에 앉으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아요!”

나와 비슷한 감상을 털어놓은 아티야는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괜히 뿌듯해진 나는 으쓱이며 답했다.

“그쵸? 저도 아끼는 소파예요. 아버지께서 엘라드 왕국에서 사 오신 건데 거기서만 나오는 소재로 만들었다고 해요.”

“그렇군요, 혹시 괜찮다면 그 소재가 뭔지 알려 주실 수 있으세요? 저도 사고 싶어요.”

“물론이에요, 이따 저녁 식사 때 아버지도 계시니까 그때 물어보면 되겠어요.”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는지 아티야는 그 후로도 소파의 감촉을 느끼기 위해 손으로 만져 보거나 엉덩이를 들썩이곤 했다.

“앤, 차와 간식을 준비해 줘.”

“네, 알겠습니다.”

그러는 사이, 나는 간단히 마실 차와 간식을 요청했다.

앤이 문을 닫는 소리를 들은 아티야는 소파에 심취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죄, 죄송해요, 세이딘! 제가 너무 아이처럼 굴었죠?”

“아니에요, 아티야만 그런 게 아니라 앉아 본 사람들마다 다 그랬어요.”

나는 종종 독서 모임을 하던 영애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하나같이 조용했던 그녀들도 이 소파에 앉고는 눈이 뒤집혔었지.

‘아, 그때가 참 좋았는데.’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일임에도 어쩐지 아련하게 느껴졌다.

워낙 이전 삶이 팍팍했다 보니 호화로운 집에 있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었기 때문에 딱히 사람들을 만날 생각을 하지 않았었지만, 독서는 좋아했기에 모임을 제법 열심히 나갔더랬다.

데스티니를 만진 후부터는 그마저도 안녕이 되어 버렸지만.

바이올린 하나로 산산이 무너져 버린 추억에 좋았던 내 기분은 단숨에 바닥으로 처박혔다.

‘하, 거지 같은 바이올린.’

지금까지 더러웠고, 다시는 보지 말았으면!

“세, 세이딘?”

당황한 듯한 아티야의 부름에 나는 서둘러 현실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너무 기억에 심취한 것 같다.

“괜찮아요?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미안해요, 아티야. 좀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서. 지금은 괜찮아요.”

아티야는 여전히 걱정 어린 눈으로 보았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욱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할 뿐이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말하지?’

줄곧 고민해 본 결과, 아티야에게 무작정 데스티니를 만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자연스러운 상황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나름 그럴듯한 이유도 떠올렸다.

최근 데스티니의 소리가 이상한 것 같으니 확인해 줄 수 있냐고 말이다.

모든 악기에 능통한 아티야였으니 그리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었다.

문제는 이 말을 할 만한 분위기인데, 어떻게 해야 그 흐름을 탈 수 있을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가씨, 차와 간식이에요.”

끊임없는 고민을 하면서도 아티야와 이런저런 잡담을 이어 가던 사이, 어느새 앤이 차를 가지고 응접실에 들어왔다.

“맛있겠네요! 안 그래도 조금 출출했는데.”

테이블에 티팟과 찻잔, 그리고 곁들여 먹을 조각 케이크가 늘어서는 걸 본 아티야가 말했다.

“저도요, 부디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어요.”

세팅을 마친 앤이 나간 뒤, 우리는 차와 케이크를 즐기기 시작했다.

린든이 준 찻잎과 우리 집 요리사의 케이크는 절묘하게 딱 떨어져서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훌륭했다.

“역시 로즈팟의 얼그레이는 좋네요.”

“이 차를 아세요?”

“그럼요, 자주 즐겨 마시는 차인걸요. 그중에서도 헤브론 상단에서 만든 로즈팟이라는 브랜드가 굉장히 깔끔하고 깊은 향을 가지고 있어서 좋아해요.”

“아티야는 아는 게 많군요. 대단해요!”

“뭘 이런 걸 가지고요. 그리고 로즈팟은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걸요.”

아티야는 쑥스러워했지만 오히려 쑥스러운 쪽은 나였다.

“실은… 전 차에 대해서 잘 몰라요. 이것도 친구가 선물해 주지 않았으면 그냥 ‘차구나.’ 했을 거예요.”

친구가 되기로 한 뒤로 린든은 심심할 때마다 내가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선에서 차를 선물했다.

의도는 굉장히 좋았지만 아쉽게도 그는 양을 조절하지 못했다.

무슨 놈의 차가 그렇게 종류가 많은지, 선물 받은 차는 차곡차곡 쌓여 앞으로 수십 년은 너끈히 마시고도 남을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웃으시는 걸 보면 좋은 친구분이신가 봐요.”

“네, 뭐…. 그렇죠.”

느닷없는 아티야의 말에 나는 말을 흐렸다.

사실 제가 웃은 건 황당해서랍니다. 살다가 집에 있는 창고가 차로 가득해질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때였다.

무슨 일인지 나를 보며 웃던 아티야가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진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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