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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64)화 (64/122)

제64화. 10장. 우연이 계속되면 의심해라 (6)

“어머, 저는 괜찮은데. 이런 재미있는 구경은 흔치 않아서.”

저 사람이 진짜!

나는 이티엘 너머의 점원을 노려봤다.

장난스레 호호 웃으며 상황을 얼버무리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배신감이 밀려왔다.

프로 정신이 투철한 것 같다는 생각은 전부 취소다.

‘이놈의 가게, 다신 오나 봐라.’

두고두고 다짐을 다진 나는 다시 이티엘을 향해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제발 다른 데 신경 쓰지 말고 얌전히 살 거 골라서 나가자는 내 바람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그는 미간에 힘을 준 채로 생각에 잠겼다.

덕분에 답답한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고민을 하는 걸 보니 머릿속에 무언가가 툭 끊기는 것만 같았다.

나는 서늘한 시선으로 이티엘을 응시했다.

“그럼 전 이만 가도록 할게요.”

“그게 무슨 소리지, 그웨니르 영애?”

“기회를 달라고 하신 분께서 무슨 말을 해도 반응이 없으신데 제가 여기 있을 필요가 뭐가 있나요?”

나도 모르게 감정이 섞인 말에 이티엘은 붉은 눈동자를 동그랗게 떴다.

그는 내가 이렇게까지 말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충격 어린 표정으로 굳어 있던 그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네, 영애. 나는….”

말끝을 흐린 그는 아티야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고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대의 말을 따르도록 하지.”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추궁 속에서 해방이구나!’

나는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면서 혹시라도 이티엘이 말을 바꿀 가능성을 생각해 겉으로는 서늘한 표정을 유지했다.

*  *  *

이후의 일들은 빠르게 굴러갔다.

내가 이 상황들을 불편해한다는 걸 눈치챈 아티야는 가져온 물건을 수리 맡긴 후 에이브를 데리고 가 버렸고, 나는 나대로 빠르게 볼일을 보고 이티엘과 함께 공방을 나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러한 소동 때문에 이티엘이 집착하던 짱돌만 한 다이아 팔찌를 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가 정신없는 틈을 타, 내가 고른 것은 사파이어로 된 브로치였다.

과하지 않은 크기여서 아무 옷에나 잘 어울리는 데다가 마법 효과 또한 적절해서 여러 방면으로 만족스러웠다.

브로치에 걸린 마법 효과는 모르는 사람이 부담스럽다 싶을 정도로 가까이 접근할 경우, 위협용 파이어볼을 발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과하다 여겨질 수 있는 효과였지만, 납치를 한 번 당해 보니 무엇이든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다는 생각에 고른 것이었다.

‘제발 쓸 날이 없기를….’

스스로가 생각해도 아이러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굵든 얇든 어찌 됐건 길게만 살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마법 구동어가 ‘안 돼요, 싫어요, 하지 마세요.’인 이유가 훨씬 컸다.

‘욜로 이전에 수치스러워서 죽어 버릴 거야!’

생각만으로도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몇 번이고 마법을 쓰지 않을 상황이 오길 중얼거리는데, 문득 이티엘의 상태가 영 시원찮았던 것이 떠올랐다.

그는 내가 뭐라고 한 이후로 줄곧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다.

덕분에 돈을 지불할 때도 느닷없이 백지 수표를 꺼내 얼마나 수습하기 힘들었는지 모른다.

좀 있으면 괜찮아지겠지 싶어 좀 더 지켜봤지만, 부티크 애비뉴의 입구에 다다를 때까지도 이티엘은 한결같았다.

“저기, 바르시…?”

더는 참기 어려워 조심스럽게 이티엘을 불렀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고, 그 모습을 계속 보고 싶지 않았던 나는 성큼 이티엘에게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폐하!”

이티엘은 비명 대신 반사적으로 빠르게 내게서 멀어졌다.

얼마나 빨랐던지 어깨가 닿을 만큼 가까웠던 거리가 지금은 열 걸음 이상은 되는 것 같았다.

“뭐, 뭔가, 그웨니르 영애!”

마침내 이티엘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붉은 눈동자와 귀를 막은 손이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보여 주었다.

덩달아 놀란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부터 계속 불렀는데도 대답하지 않으시길래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혹시 아까 제가 범한 무례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무례? 어떤 걸 말하는 거지?”

“그건….”

딱히 틀린 말을 했던 건 아니지만 어찌 됐건 황제를 상대로 볼일 없으면 가네 마네 한 것은 썩 좋지 않은 태도였다.

난감한 내 표정을 읽었는지 이티엘은 곧바로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할 것 없네, 영애. 그대의 말은 틀리지 않았어. 난 그런 말을 들을 만했고.”

어라?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저렇게 말하는 거지?’

항상 밀어붙이기만 하는 이티엘이었기에 이렇게 순순한 태도를 보일 때마다 당혹스러웠다.

내 딴에는 의심스럽게 쳐다보는 것이었지만 상대에게는 아니었는지 그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그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골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 나는 한참을 도망 다니는 이티엘의 눈동자를 쫓아다녔다.

더는 계속하기 힘들었는지 그는 얼마 가지 않아 백기를 들었다.

“내가 졌어, 그웨니르 영애. 그러니 그만 쳐다보게.”

“네? 무슨 말씀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사실은 다 알고 있었지만 시치미를 뚝 떼자, 이티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

“그대가 그렇게 쳐다보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아…….”

순간 말문이 막혔다.

힐끗 나를 보다가 내리까는 붉은 눈동자와 살짝 붉어지는 귓가가 너무도 선명해서.

참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몇 번이고 게임 속에서 봤던 모습인데도 현실로 접하니 괜히 간질거리고 쑥스러웠다.

‘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지금껏 수많은 게임 속 대사를 듣고도 별생각이 없었던 주제에 왜 인제 와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할 때였다.

“실은 감격했다.”

느닷없이 날아든 말에 거짓말처럼 간질거리던 감각이 사라졌다.

몽글몽글했던 감각이 단숨에 현실로 돌아오는 것을 느낀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티엘이 엉뚱한 말을 해서 다행이야.’

자칫했다가는 눈곱만큼이라도 이티엘에게 호감을 가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건 그거고.

충분히 안도를 한 나는 이제는 바짝 긴장했다.

이놈의 공략캐들은 꼭 중요한 말을 할 때면 이렇게 주어를 빼먹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대가 날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어.”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인데요?

머릿속에 물음표만 가득해지는 가운데,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번뜩였다.

“설마… 폐하께서 제 말을 안 듣는다고 간다고 했던 것 말씀이세요?”

“그렇다.”

깔끔하고 확실한 대답에 나는 마른 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눈치가 좋은 편이라고 해도 이런 것까지 맞히고 싶진 않았다.

‘그나저나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이건 상대가 이티엘이 아니라도 화를 낼 수 있는 일이었다.

대화를 주고받아야 할 상대가 제대로 듣지 않으면 누구도 화가 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조금 더 고민하던 나는 설명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구구절절 열심히 설명한들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할 것이 뻔한데 쓸데없이 기운을 빼고 싶지 않았다.

한편 이티엘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멋대로 해석했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줘서 고맙네, 그웨니르 영애. 오늘 남은 하루도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어.”

“아, 네….”

잠깐이라도 몽글거렸던 순간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가슴은 한없이 차가웠다.

그러고 나니 문득 의문이 들었던 이티엘의 행동이 떠올랐다.

“그런데 폐하.”

“바르시.”

하여간 누가 집착남 아니랄까 봐 애칭에 집착하는 것 좀 봐.

나는 살짝 눈을 가늘게 뜨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바르시, 궁금한 것이 있어요.”

“뭔가?”

“마지막에 왜 그렇게 아티야를 쳐다본 거예요?”

옆에서 가자고 말하는데도 듣지도 않고 말이야.

나는 나머지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사실 바르시도 알잖아요. 아티야가 저를 사랑하거나 그런 게 아니라는 걸요. 그런데도 왜 그렇게 한 거예요?”

“날 제쳐 두고 더 친해 보이는 게 맘에 들지 않았다.”

“…….”

“농담이다.”

방금 눈빛은 진심이었는데.

진의를 살피는 내 시선이 껄끄러웠는지 이티엘은 어울리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

“그러려고 물어본걸요.”

담백한 내 대답에 이티엘은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오후의 햇빛이 반사된 붉은 눈동자는 어쩐지 조금 어두워 보였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지만, 어디선가 그 여자를 본 것 같아.”

천천히 들려온 대답에 나는 흠칫 놀랐다.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듯 이티엘은 하지 않은 말들을 이어 갔다.

“혹시나 오해할까 봐 말하지만 내겐 그웨니르 영애, 그대뿐이야. 그런데 그녀와 눈을 마주치니 그리우면서도 설레고 심장이 뛰더군. 마치 누군가가 내 모든 감각을 조종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불쾌한 나머지 그녀에게 날카롭게 굴었어.”

이티엘의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과 함께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 들었다.

본능이 고개를 쳐들었다.

‘아티야를…, 여주인공으로 인식하고 있어.’

그런 게 아니라면 이티엘이 느낀 감정은 조금도 설명할 수 없었다.

나는 잘게 떨리는 몸을 애써 다잡으려 노력했다.

이티엘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세계의 여주인공은 나로 정해져 있다는 에이브의 말은 거짓이었다.

그리고 신 또한 그 거짓말을 눈감아 줬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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