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10장. 우연이 계속되면 의심해라 (5)
에이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적이 찾아들었다.
직접 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에이브를 제외한 모두가 한마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거…, 한 대 팰까?’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제아무리 눈치가 없다고 해도 한 명도 아닌 셋이나 표정이 좋지 않은 건 알겠는지 에이브는 그제야 눈동자를 도로록 굴리며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
“…뭐, 그래. 저마다 취향이 있기 마련이니까. 무엇을 좋아하건 그건 개인의 자유지. 그렇고말고!”
그렇게 말한 에이브는 힐끗힐끗 아티야의 표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눈치를 볼 거면 그런 말을 하지 말란 말이야…….’
나는 절로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아티야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면서 꼭 미움받을 짓만 골라 하는지 몰라.
누가 먼저 입을 여나 눈치 싸움을 하던 중, 시작을 끊은 것은 아티야였다.
“에이브.”
에이브는 서늘한 눈초리를 앞에 두고는 움찔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바라보던 아티야가 단호하게 말했다.
“난 무례하고 저급하게 말하는 사람은 딱 질색이야. 그러니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말하면 다신 안 볼 거야.”
눈을 휘둥그레 뜬 나는 귀를 의심했다.
자비라고는 일절 없는 단어들은 여주인공이 쓸 만한 것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안 좋게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에이브가 얼마나 피곤하게 굴었으면 그랬을까 싶어 안타까운 기분이 들 따름이었다.
“그래서.”
한편 이티엘은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에이브를 향한 그의 얼굴에는 태양처럼 찬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까부터 그대는 뭐지? 그웨니르 영애에게 친근하게 굴고 말이야.”
“네?”
“뭐…?”
“치, 친근?”
나를 비롯한 두 사람의 반응이 사방에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
‘눈이 가출했나.’
아무리 콩깍지가 씌어도 그렇지 어떻게 저렇게 미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고 덤벼드는 걸 친근함으로 받아들여?
이런 마음은 비단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세상에….”
아티야는 탄성을 터뜨리며 두 손으로 제 입을 막았고.
“이걸 어떡해야 하냐.”
에이브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다들 너무 그러지 마…….’
가감 없이 솔직한 반응들에 나는 괜히 울고 싶어졌다.
‘아, 그냥 모른 척하고 나가 버려?’
울적한 마음이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껏 겪어 본 바, 이런 상황에서 도주해 버리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지거나 귀찮게 흘러갈 뿐이었다.
그러니 되도록 이티엘의 마음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 되도록 자연스럽고 신속하게 볼일을 마치고 나가는 것이 최고였다.
‘그런데 이티엘은?’
이렇게 조용히 있을 만한 인물이 아닌데.
내 우려와 달리, 이티엘은 대놓고 무시를 당했음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의외네.’
행동하는 분위기로 봐선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았는데.
놀라는 표정이 퍽이나 강렬했던지 나와 시선을 마주친 이티엘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영애. 이래 봬도 더한 일도 겪어 봤으니 말이야.”
“아, 네….”
이티엘의 업적을 모르는 건 아니다.
지나다니다 보면 그에 대한 칭찬과 불만이 반반씩 들려오니까.
그저 황제와 일개 영애 정도의 거리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나 또한 남들과 같이 때로는 두려워하고 때로는 존경했을지도 몰랐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지.’
지금 이 상황에도 이티엘을 불안하게 지켜보는 이유는 단 하나, 호감도 때문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는 내가 얽히기만 하면 제대로 된 사고를 못 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
그러니 불안하지 않으려 해도 할 수밖에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정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던 이티엘은 그 시선을 거두고 다시 에이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입가엔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붉은 눈동자에는 웃음기라곤 전혀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또다시 돌아온 숨 막히는 시간 속에서 나는 애써 이 상황을 모른 체하고자 양을 셌다.
이렇게 심란한 상황 속에서 잠이 올 리는 없었으니 적어도 현실 도피 정도의 수준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땅이 꺼지라 한숨을 터뜨린 에이브였다.
“하아, 내가 왜 이런 불쾌한 일을 겪어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난 세이딘과 아무 사이도 아냐. 아티야만 아니었다면 되도록 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담이 걸린 것 같다는 이유로 영애의 어깨를 만지고 말인가?”
“…이봐, 그런 이유면 의사도 못 건드려.”
에이브의 반박에 이티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저놈답지 않게 설득력 있는 말이니 이티엘도 충분히 납득할 터…,
“여자 의사에게 진료를 보게 하면 된다.”
는 개뿔.
여러분 보고 계십니까? 사랑에 빠진 사람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한편 어쩐 일로 상식을 되찾은 에이브는 연달아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방금 아티야도 무슨 사이냐고 의심해 놓고?”
뼈 때리는 말에 이티엘의 미간이 깊이 팼다.
거기까진 생각 못 했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뭐야 진짜. 이게 이렇게 고민할 일이야?’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은 이티엘의 표정이 워낙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귀찮은 일을 이 이상 늘리고 싶지 않았다.
그와 별개로 길어지는 정적에 숨이 턱턱 막혀 가고 있을 때였다.
“어쩔 수 없군.”
뭐가 어쩔 수 없는데요?
앓던 이를 뺀 것처럼 개운한 표정의 이티엘이 말했다.
“내가 의술을 배우도록 하지.”
이티엘을 제외한 모두가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이제 나는 머릿속으로 양을 세는 것을 잊은 채 입을 뻐끔거렸다.
‘세상에 내가 뭐라고 황제가 의술을 배워?!’
당장이라도 이티엘의 멱살을 잡고 뭐라고 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는 것을 꾸역꾸역 억눌렀다.
철벽 반사가 발동하고 있는데도 저런 걸 보면 이티엘은 사랑에 빠지면 앞뒤 물불 안 가리는 타입인 모양이었다.
물론 알고 있었지만.
‘아이고, 내 머리야….’
점원에겐 미안하지만, 장신구고 나발이고 일단 여길 나가야겠다는 마음이 앞서고 있을 때였다.
“아무래도 오해하시는 것 같아요, 바르시.”
그때 입을 연 것은 아티야였다.
그녀는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이 상황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지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제가 세이딘을 좋게 생각하는 건 맞아요. 하지만 그… 연애 감정이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서 갖는 호감일 뿐, 다른 의도는 없어요. 물론 세이딘이 절 구해 줬을 때는 너무 멋있어서 두근거리긴 했지만요!”
‘이봐요, 여주인공 언니!!!’
나 원한다, 아티야의 입 막기.
충동을 견디지 못하고 머리를 부여잡았다.
오해를 풀게 할 거면 1절만 해야지, 2절을 하면 어떡합니까, 네?
아니나 다를까 이티엘이 눈가를 꿈틀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웨니르 영애가…, 당신을 구했다고?”
“네! 식당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치근덕거리던 걸 세이딘이 구해 줬어요. 그쵸, 세이딘?”
“아, 아하하…. 네, 뭐, 그렇게 됐네요.”
그 말에 이티엘은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놀랍군. 그웨니르 영애가 그렇게 늠름한 줄 몰랐어. 내게도 그 모습을 보여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하….”
내가 너님에게 어떻게 전기충격기를 들이대고 그러겠어요.
그랬다간 하루아침에 우리 가문 전체가 쫄딱 망할 수도 있는데.
아티야는 이티엘이 어느 정도 마음이 누그러졌다고 여겼는지 이 기세를 몰아 에이브에 대한 해명도 했다.
“그리고 에이브와 저는 어릴 때부터 친구예요. 저를 과하게 걱정하다 보니 세이딘에게도 과하게 경계를 하거나 싫은 짓을 하는 게 바르시에겐 친하게 보였던 것뿐이고요.”
‘어라? 왜 부부라고 말하지 않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관 주인에게도 부부라고 말했고, 내게도 그렇게 말했던 아티야가 이티엘에게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이 의문이었다.
‘혹시 이티엘에게 관심이…?’
의식의 흐름처럼 떠오른 가능성에 머리가 번뜩였다.
원래 여주인공이었으니 공략캐를 향해 관심을 보일 수 있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조금씩 두근거리는 마음이 고조되는 가운데, 설명을 들은 이티엘이 입을 열었다.
“…지금 그걸 믿으라고 하는 말인가?”
“믿지 않으셔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 무턱대고 거짓말을 할 정도로 말주변이 있는 사람은 아니어서요.”
이티엘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던 이티엘은 무심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건방지군.”
“건…방….”
너무 황당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읊조리고 말았다.
나도 이런데, 직접 들은 아티야는 얼마나 당혹스러울까.
‘있던 호감도 다 사라지겠네.’
게다가 아티야는 이티엘의 정체를 모르니 더욱이 저놈이 왜 저럴까 하는 마음이 들 터였다.
잠시나마 둘이 호감을 가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내가 바보였다.
‘이대로는 안 돼!’
정신을 차린 나는 곧바로 이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겪어 온 바로는 이 이상 이티엘이 입을 놀리면 가뜩이나 좋지 않은 분위기가 더욱 가라앉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우선 저 입을 막자!’
결심을 다진 나는 서둘러 이티엘의 팔을 잡고 외쳤다.
“바르시!”
“그웨니르 영애…?”
그러자 붉은 눈동자에 놀라움이 어렸다.
그럴 만도 하지. 지금껏 내가 그에게 먼저 이런 식으로 매달리거나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니까.
나는 눈을 데록데록 굴리다가 아티야가 온 뒤로 흐릿해진 본래의 목적을 상기시켰다.
“이, 이제 슬슬 골라야 하지 않을까요? 오랫동안 이러고 있는 건 영업 방해이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