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62)화 (62/122)

제62화. 10장. 우연이 계속되면 의심해라 (4)

그러자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그웨니르 영애, 그럴 수 없어. 약속과 다르지 않나.”

약속? 지금 이 상황에서 약속을 운운해?

나는 웃음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바르시, 저한테 선물하고 싶다고 했죠?”

“그래.”

“제가 원하는 걸 고르라고 했고요.”

“그렇지.”

여기까지 대답하고도 이티엘은 의아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진짜 몰라서 저러는 건지, 아니면 뻔뻔해서 저러는 건지.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저 무식한 크기의 다이아몬드를 팔목에 차고 건초염에 걸릴 바에야 좀 치사하더라도 말을 바꾸는 편이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훨씬 나았다.

단호한 태도에 놀란 이티엘은 몇 번이나 다이아몬드 팔찌에 대한 극찬을 늘어놓으며 나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더욱 다이아몬드를 향한 마음이 식을 뿐이었다.

“잊었어요, 바르시? 제가 원했던 건 매일 착용할 수 있을 만큼 가볍고 마법 효과가 있는 장신구지 이렇게 돌팔매 같은 묵직한 게 아니었어요.”

“돌팔매? 말이 심하군, 영애. 이 다이아몬드의 어디가 그 무식한 것과 같단 말이지?”

“맞아요, 손님. 돌팔매에는 이런 아름답고 섬세한 세공이 들어갈 수 없는걸요.”

이럴 때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갈수록 깊어지는 점원을 향한 배신감을 애써 뒤로하고 어떻게든 설득을 시도해 보려 했다.

딸랑!

그러나 손님을 알리는 종소리에 생각은 시도조차 되지 못했다.

“어서 오세요!”

이티엘과 내가 주춤하는 사이, 점원만큼은 투철한 직업정신을 발휘해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활짝 웃으며 들어오는 고객을 향해 인사했다.

“어머?”

딸랑거리는 소리에 이어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이딘?”

거기서 왜 내 이름이 나와?

나는 당황한 나머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황금처럼 반짝이는 금발과 놀라움을 고스란히 담아낸 푸른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익히 아는 인물이었다.

“아티야…?”

“맙소사, 세이딘! 이런 데서 만나다니 엄청난 우연이네요!”

아티야는 언제 놀랐냐는 듯 곧장 반가움을 드러내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라고 해서 반갑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보다도 혼란스러움이 앞섰다.

‘아티야가 어떻게 여기에 있지? 원래 이용하던 공방은 따로 있지 않았나?’

게임 속에서 아티야가 자주 가던 공방은 부티크 애비뉴의 중간쯤에 위치한 델라스라는 곳이었다.

주로 호감도를 비롯한 여러 아이템을 구입할 수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게임을 할 적에 자주 가곤 했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아티야?”

애써 침착한 척하며 물음을 던지자, 아티야는 봄처럼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에이브가 추천해 줬어요. 고모님이 주신 목걸이가 끊어지는 바람에 수리를 맡겨야 했거든요.”

그렇다는 건 설마…….

나는 고개를 퍼뜩 들었다.

딸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공방 안으로 들어오는 분홍 머리 남자의 모습에 절로 얼굴이 굳었다.

“아티야, 그렇게 뛰다간 넘어질 수 있다고……. 아.”

나를 발견한 상대가 종잇장처럼 얼굴을 구겼다.

반응을 보니 나만큼이나 달갑지 않은 듯했다.

에이브와 내 상태를 모르는지, 아티야는 그저 해맑은 미소로 반가움을 드러냈다.

“에이브, 세이딘이야! 정말 우연이지 않아?”

“어, 어어…. 그러네. 반가워, 세이딘.”

떨떠름하게 대꾸하는 에이브의 모습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놈 또 거짓말하네. 반갑지도 않으면서 반가운 척하긴.

그 증거로 아티야가 나를 보며 조잘대는 사이, 에이브는 내게 눈을 부릅뜨고 말하지 말라는 암묵적인 의사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웨니르 영애, 누구지?”

뒤통수로 서늘하게 퍼지는 물음에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이런 데서 아티야를 만나 너무 당황한 나머지 이티엘을 잠시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 말았다.

“바르시, 인사해요. 여긴 제 친구….”

당황스러운 마음에 서둘러 소개를 시키려던 나는 퍼뜩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여주인공이랑 공략캐잖아…!’

팔에는 오소소 닭살이 일어났고 등줄기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여주인공과 공략캐들의 만남은 이전부터 내가 바라고 바라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에이브에게 사건의 전말을 들은 후, 그런 생각은 일절 하고 있지 않았지만 막상 이렇게 닥치니 당황스럽기만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상황 속 내 위치 때문이었다.

원래라면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한 두 남녀를 아무것도 아닌 엑스트라가 소개를 해 주고 있다.

가까이서 보든 멀리서 보든 굉장히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졸지에 나는 잘못을 하지 않았음에도 바람을 피우다 들킨 내연녀처럼 쭈뼛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웨니르 영애?”

“세이딘, 괜찮아요?”

저들은 알까?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들의 걱정 어린 물음이 괜찮지 않다는 것을.

한편 그런 나를 보고 안 되겠다 싶었는지 에이브가 서둘러 다가와 대뜸 내 어깨를 꽉 쥐며 말했다.

“아, 어깨 뭉친 것 좀 봐. 아무래도 담이 심하게 온 모양이야. 그렇지, 세이딘?”

동의를 구하는 물음과 함께 어깨에 더욱 힘이 주어졌다.

은근한 협박에 나는 에이브의 정강이를 걷어찰까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그 바람은 실행되지 않았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뒤통수에 꽂히는 물음이 따갑다 못해 차가웠다.

이대로라면 얼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나는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내 뒤에 바짝 선 이티엘이 서슬 퍼런 눈빛으로 에이브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편 황제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게 된 장본인은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황금빛 눈동자를 살짝 찌푸리며 대꾸했다.

“세이딘이 담 걸린 것 같아서 풀어 주는 중인데.”

“세이딘이라….”

이티엘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한 그는 에이브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 퍽이나 맘에 들지 않은 듯싶었다.

이티엘은 조금 고민하는가 싶더니 곧 입을 열었다.

“그 정도면 충분할 듯하니 당장 떨어졌으면 좋겠군.”

“뭐? 잘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담이 쉽게 풀리는 건 줄 알아? 이런 건 시간을 들……. 억!”

이 이상 쓸데없는 말을 줄이기 위해 나는 에이브의 정강이를 힘껏 후려쳤다.

그리고 고통에 소리 없는 몸부림을 치는 그를 향해 해맑게 말했다.

“어머, 이제 괜찮아졌네? 덕분에 어깨가 많이 가벼워졌어.”

죽일 듯이 노려보는 황금빛 시선이 거슬렸지만 별수 없었다.

모처럼 아이템 효과로 잠재워 둔 집착모드를 깨우지 않기 위해서라도 에이브는 닥쳐 주는 것이 곧 도움이었다.

나는 그를 뒤로하고 이티엘에게 다시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소란스럽게 해서. 다시 소개할게요. 이쪽은 아티야 세르비아스예요. 저번에 나갔을 적에 알게 된 친구예요.”

“바르시…라고 했죠? 처음 뵙겠어요. 세이딘이 소개한 아티야라고 해요. 잘 부탁드려요.”

아티야는 호감 가는 미소와 함께 이티엘을 향해 악수를 청했다.

그것을 본 나는 두 손으로 터져 나오려는 탄성을 눌렀다.

‘설마 이거…, 이티엘 첫 만남 이벤트 아냐?’

그랬다.

아티야는 이티엘과의 첫 만남에서 그가 누군지 모른 채 자기소개를 하며 저렇게 악수를 청했다.

제르아일에서는 여자와 악수를 나누는 인사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이티엘은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신선함을 느낀다.

포기한 거나 다름없던 여주인공과 공략캐의 만남이었건만, 이 상황을 보니 꼭 그러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티엘은 말없이 아티야를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가 잔물결처럼 떨리는 걸 보니 기대가 한층 더 치솟았다.

두근두근,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이티엘이 하얀 손을 맞잡았다.

‘어머어머, 세상에!!’

스스로가 생각해도 주책에 호들갑인 반응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잘하면 여주인공 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영원 같은 찰나 속에서 마침내 이티엘이 입을 열었다.

“그웨니르 영애에게 호감이 있나, 아티야 양?”

그 물음은 마음속에서 소소하게 커져 가던 기대를 단번에 짓밟아 버렸다.

‘아이고, 이 사람아!’

둘이 묘한 기류가 흐르지 않은 건 그렇다 쳐도 거기서 왜 그런 질문을 해?! 친구라고 했잖아?!

“…네?”

놀란 건 아티야도 마찬가지였는지 푸른 눈동자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모두를 경악으로 내몬 장본인은 거기서 그칠 생각을 하지 않고 되레 당당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웨니르 영애는 친구가 그리 많지 않아. 그리고 이렇게까지 친근하게 구는 이는 없는 걸로 알고 있네.”

‘당연히 뒷조사는 했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직접 들으니 썩 좋은 기분은 아니네.’

친구가 없는 걸 알면 더욱이 조심스럽게 말해야 할 텐데 이티엘은 그런 것도 없었다.

‘이런 걸 보면 저놈이 날 좋아하는 게 맞나 싶단 말이야.’

다시 보게 되는 행동을 했다가도 한순간에 모든 걸 엎어 버리는데 의심이 안 들려야 안 들 수가 없었다.

한편 내 표정이 썩어 가는 것도 모르고 자신의 추측에 강한 확신을 가진 이티엘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이 이렇게까지 친근하게 구는 건 그웨니르 영애에게 호감이 있다고밖에 볼 수 없는데. 어떤가?”

느닷없이 대답을 요구당한 아티야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그녀는 이티엘이 누군지 모를 테니 더욱이 이 상황이 혼란스러울 것이었다.

“뭔가 오해를….”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아티야의 말은 갑자기 끼어든 외침으로 인해 이어질 수 없었다.

드디어 고통에서 벗어난 건지 에이브는 아티야의 옆에 서더니 이티엘을 향해 핏대를 세웠다.

“아티야가 어떤 사람인데 세이딘 따위를 좋아해? 차라리 길가의 비둘기를 사랑한다는 게 훨씬 신빙성 있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