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10장. 우연이 계속되면 의심해라 (3)
한편 내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이티엘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비싸다고 하지 않았나.”
“비싸다곤 했지만 살 수 없다고 하지는 않았잖아요?”
애초에 살 수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고 말이야.
이쯤 되면 포기할 법한데도 이티엘은 끈질겼다.
이런 식의 반박은 통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그는 이제 눈썹을 축 늘어뜨리는가 싶더니 방식을 바꿔 접근했다.
“그웨니르 영애, 사실 지금까지 한 말은 전부 구실일 뿐이야. 그대를 호위하지 못한다면 하다못해 도움이라도 되고 싶어. 그러니 영애에게 선물할 수 있게 해 주지 않겠어?”
진솔한 마음을 듣고 있으려니 마음이 불편했다.
이해가 안 된다는 태도를 취하거나 고압적이면 버텼을 텐데 오히려 저런 식으로 나오니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네.
게다가 다른 공략캐들이 준 것들은 받으면서 자기한텐 받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을 들은 직후라 더욱 그랬다.
“음…, 그럼 이번만이에요.”
오랜 생각 끝에 꺼낸 대답에 이티엘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고마워, 그웨니르 영애.”
“아니, 받는 입장이니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건 저죠.”
“그게 고마운 거야.”
나직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무척이나 부드럽고 다정했다.
달처럼 휜 붉은 눈동자와 마주친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피했다.
어쩐지 가슴이 술렁거렸다.
나는 그저 엑스트라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그 안에 있는 것들만을 누리며 즐겁게 욜로하길 바랄 뿐이었다.
이를 위해서 누구든 한 명과 엔딩을 보겠다고 결심했지만, 이티엘이 보내는 무한한 호감을 받고 있으려니 문득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과 함께 약간의 죄책감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 깊게 생각하지 말자!’
생각과 함께 기분이 스멀스멀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힘차게 고개를 저었다.
이럴 때는 망설임도 동반하기 때문에 생각하면 할수록 스스로의 행동을 제약하고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을 만들어 내기 쉬웠다.
그러니 의식적으로라도 모른 척하고 떨쳐 내야 했다.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마침 아주 좋은 타이밍에 카운터 너머로 사라진 점원이 돌아왔다.
이티엘은 모처럼 좋은 분위기를 방해받았다고 생각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에요! 적절한 때에 잘 오셨는걸요.”
그가 그러건 말건 나는 어찌나 반갑던지 당장 달려가 그녀의 손을 잡고 덩실거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눈에 띄었을 텐데도 점원은 내색은커녕,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해요. 대신 선물을 주고받는 두 분 모두 마음에 드실 만한 것들로만 선별했으니 기대해 주세요.”
점원은 정녕 프로였다. 나뿐만이 아니라 이티엘의 기분까지 고려한 대답을 했으니 말이다.
“…어디 한번 보도록 하지.”
방금까지 불쾌한 티를 팍팍 내던 이티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무심하게 대꾸했다.
예전이라면 눈에 보이는 그대로 판단했겠지만 그를 봐 온 시간과 빈도가 제법 되는 지금은 확실히 안다.
이티엘은 상당히 흐뭇해하고 있었다. 고작 선물을 준다는 표현 하나에.
‘참 많이 변했어.’
집착이라는 키워드에 걸맞게 참 강압적이고 협박도 서슴없이 했었는데 말이야.
감회에 젖는 것도 잠시, 다시금 찾아오려는 술렁거림의 조짐에 나는 의식적으로 점원의 행동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테이블에 검은 벨벳을 깐 그녀는 장신구들을 하나씩 늘어놓았다.
목걸이부터 시작해 브로치까지 다양한 종류를 자랑하는 장신구들은 디자인도 각양각색이었다.
이렇다 보니 차라리 보석으로 분류해서 구경하는 편이 훨씬 나을 지경이었다.
이 세계에서 선호하는 보석은 한정되어 있었고, 그 안에서도 마법을 부여할 수 있는 보석 또한 손에 꼽다 보니 보석은 총 네 종류만 있었다.
그중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단연 사파이어였다.
루비와 같은 뿌리를 가진 원석이어서 내구도가 좋은 데다 다양한 색상이 있어 호불호가 거의 갈리지 않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루비는 황실에서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최상급의 원석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설령 구하더라도 거기에 마법까지 걸렸다고 하면 가격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마법 효과를 담기란 어려웠다.
‘루비는 걸러야지.’
붉은색을 선호하는 편이 아니기도 한 데다 가격도 어마무시했기 때문이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저 중에서 가장 작은 루비가 들어간 귀걸이의 경우, 작은 영지 하나 정도는 너끈히 사고도 남을 가격은 될 것이었다.
내가 사는 거였어도 망설였겠지만 이티엘이 사 주기로 한 이상, 루비는 더욱이 걸러야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에게 루비를 받는다는 것은 곧…….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웨니르 영애, 루비든 뭐든 다 괜찮으니 그대가 맘에 드는 걸 골랐으면 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귀신같은 타이밍에 이티엘이 말했다.
배려로 포장된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와 반짝이는 눈동자가 가리키는 바는 명백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가를 살짝 찌푸릴 뻔하다가 노선을 바꿔 활짝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죠, 그러니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만 볼게요.”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던 이티엘이 씁쓸한 투로 중얼거렸다.
“…루비가 빠져 있군.”
“빨간색을 별로 안 좋아해서요.”
무표정했지만 뚫어지라 쳐다보는 눈동자에는 명백한 불만이 담겨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무시했다.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니 양심이 찔릴 것도 없었다.
사파이어로 된 장신구들 중 몇 가지 맘에 드는 것들을 추린 후 그다음 보석인 다이아몬드로 넘어갔다.
“다이아몬드를 목걸이로 만들다니. 특이하군.”
다이아몬드를 구경하는 이티엘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원래 세계에서는 귀금속에 흔하게 쓰이는 보석이었던 반면, 이 세계에서 다이아몬드는 주로 무기에 쓰였다.
강도가 단단하고 날카롭게 만들 수도 있어서 좋다나 어쨌다나.
“다이아몬드에 관심을 보이시다니 안목이 높으시네요.”
이티엘의 반응이 반가웠는지 프로의 미소를 걸고 있던 점원이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생소하게 여기실 수 있겠지만, 다이아몬드는 귀금속으로 만들었을 때 굉장히 돋보이는 보석이랍니다! 게다가 이 반짝임은 저희 공방에서 최초로 개발한 커팅 기술로만 만들 수 있는 것이어서 희소성이 상당하죠.”
이티엘은 흥미를 보였지만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다이아몬드는 프러포즈할 때 쓰인다는 것과 브릴리언트 컷인지 뭔지가 굉장히 반짝거린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건 어떤가, 그웨니르 영애?”
별생각 없이 다이아몬드 장신구들을 구경하던 중, 이티엘의 물음이 날아들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다이아몬드로 된 팔찌였다.
사실 말이 좋아 팔찌지 실제로는 주먹만 한 다이아몬드가 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딱 봐도 안 가벼워 보이는데 왜 저런 걸……. 아니, 그나저나 이티엘은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지금껏 자신을 거절한 것이 괘씸해 골탕 먹이려는 걸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썩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었기에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이티엘은 남의 속도 모르고 눈부신 미소로 맘에 들어 하는 이유를 늘어놓았다.
“이거라면 불시에 어떤 일이 생겨도 안심할 수 있어. 이 정도 크기에 강도라면 상대를 한 방에 기절시킬 수 있으니 말이야.”
황당한 이유에 머리가 어질거리는데 한술 더 뜬 점원이 이티엘의 말에 동의를 하고 나섰다.
“손님 말씀대로랍니다. 이 팔찌는 호신용으로 나온 거라서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는 장점이 돋보이죠. 여차하면 이렇게 손에 쥐고 휘두르거나 던지셔도 돼요.”
정성스러운 설명과 진지하게 듣는 이티엘을 보면서 나는 새삼 이곳이 정신 나간 세계라는 것을 실감했다.
저들은 알까? 던진다는 설명을 하는 시점에서 그 다이아몬드가 팔찌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당연히 모르겠지. 알면 저럴 리 없으니까.’
더 알고 싶지도 않고 이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인지라 서둘러 다른 것을 찾아보았다.
저 두 사람의 상태를 봐선 이대로 가다간 팔찌라는 이름을 빌린 주먹만 한 다이아몬드를 갖게 생겼…….
“영애, 그렇다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
아악!
빨리 적중하는 불안에 순간적으로 짜증을 담은 비명이 터져 나올 뻔했다.
필사적으로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드니 기대감에 가득 찬 붉은 눈동자가 부담스럽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다이아몬드가 반짝이고 있었다.
“…어떠냐고요?”
“그래, 영애에게 선물하는 건데 그대의 의사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겠나?”
그걸 아는 인간이 그런 걸 골라요?
‘당연히 안 괜찮지! 너무 별로야! 구리다고!’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말을 그대로 뱉어 버릴까 고민했지만, 상대가 누군가.
내가 사는 나라의 황제다.
그뿐인가?
호감도가 두 번째로 높으신 저분은 엔딩을 볼 유력한 대상 중 하나였다.
거기다 이벤트까지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니 말하고 싶은 걸 전부 쏟아 내기엔 지금은 시기가 썩 좋지 않았다.
“저…는 이게 좋을 거 같은데요?”
나는 근처에 있는 다이아 브로치를 들어 가슴께에 있는 리본 장식에 댔다.
그러자 이티엘은 고민이라곤 일절 하지 않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나쁘진 않지만 그래도 팔찌에 비하면 임팩트가 약하군.”
“아, 그렇죠. 브로치는 바로 손에 쥐거나 할 수 없으니 말이에요.”
저기요, 언니?
나는 정신없이 흔들리는 동공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프로 같은 태도와 똑 부러지던 첫인상과 달리, 이티엘에게 동조하는 점원은 무척이나 해맑아 보였다.
그 후로도 몇 가지를 골라 봤지만 이미 다이아몬드 팔찌에 꽂힌 이티엘은 미적지근한 반응만 보일 뿐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 나는 극약처방을 하기로 결심했다.
“알았어요. 폐…, 아니 바르시는 그걸 사요.”
이어지는 말에 환희로 차오르던 붉은 눈동자가 삽시간에 늪으로 가라앉았다.
“저는 저대로 살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