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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60)화 (60/122)

제60화. 10장. 우연이 계속되면 의심해라 (2)

당황스러운 마음이 앞선 나머지 나는 오해를 정정했다.

“뭔가 잘못 알고 계세요, 폐하. 제가 그들에게 받은 것들은 상황에 따른 필요 때문에 받은 거예요.”

“하지만 영애, 저번에 내가 마차를 빌려주겠다 했을 때도, 통신구를 준다고 했을 때도 거절하지 않았나?”

“그때는 집을 나갈 생각이었으니까 그렇죠.”

이제는 당시의 상황을 아는 이티엘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좀처럼 납득하지 못하는 반응이었다.

“사실 중요한 건 선물이 아니야, 그웨니르 영애.”

“그럼요?”

“다른 이들에 비해 내가 그대와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는 거야.”

단정한 얼굴에 설핏 비친 미소는 씁쓸함이 가득했다.

그 모습에 괜히 죄책감이 밀려왔다.

어떻게든 공략캐들과 엮이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지만, 그런 내 노력과 달리 여러 가지 이유들로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티엘을 제외하고는.

‘미치겠네. 의도하지 않은 일에 왜 내가 미안해해야 해?’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왜 이렇게 된 건지 곱씹어 본 결과, 희한하게도 이티엘에게는 관계 진전을 위한 돌발 이벤트가 없었다.

확인차 시스템 창을 살펴보았지만, 관계 진전 이벤트는 있어도 강제적이지 않았다.

‘왜 이렇게 밸런스가 엉망인 건데….’

이 세계를 구축한 신이 아닌 이상, 이렇게 속으로 한탄해도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새삼 철저한 을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꺼냈다.

어떻게든 빨리 상황을 수습하고 싶을 때 이만큼 좋은 수단은 없었다.

“그렇게 느끼셨다니 죄송해요. 하지만 폐하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난 너를 비롯한 모든 공략캐와 얽히기 싫었거든요.

이 진심이 닿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이티엘을 바라보았다.

그는 생각을 하는 듯 시선을 내리깔더니 곧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오히려 내가 미안해, 그웨니르 영애. 머리로는 그대가 모두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이 따라 주지 않는군.”

“아닙니….”

“그러니 내게도 기회를 주지 않겠나?”

―또로롱!

아, 제발!

나는 마른세수를 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철벽 반사로 콩깍지 효과가 반감되면 뭐 하냐, 이벤트는 여전히 건재한데!

울며 겨자 먹기로 이벤트를 살펴봤다.

[이티엘의 돌발 이벤트 – 너와 나의 연결고리]

이티엘과 하루를 알차게 보내며 끈끈한 관계를 만들어 보자!

30초 후, 시작됩니다.

마지막에 쓰여 있는 말에 울컥하는 마음이 치솟았다.

업데이트를 하고 좀 나아진 줄 알았더니 내 착각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보상은?’

그간 많은 일을 겪은 덕인지 짜증을 추스르는 속도는 빨랐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보상을 훑어보았다.

어차피 겪어야 할 거, 보상이라도 두둑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보상: 이티엘의 호감도 100 증가 / 3000H / 랜덤 박스]

‘…좋은데?’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계산을 두들겼다.

누구든 빠르게 엔딩을 보려고 하는 나에게 최적화된 보상이 아닐 수 없었다.

‘밸런스가 엉망이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랜덤 박스가 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복불복에 마음을 쓰기보단 엔딩을 보기에 확실한 것들에 초점을 두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니까.

나는 초 세기에 들어간 시스템 창에서 시선을 돌렸다.

기회를 달라고 한 이티엘은 살짝 굳은 얼굴로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그가 말했다.

“린든에게도 기회를 주지 않았나. 많은 건 바라지 않아. 그저 있는 모습 그대로 날 봐 줬으면 해.”

이티엘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일부러 감정에 호소하는 말들을 골라 한 것이 그 증거였다.

얄밉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렇다 해서 이티엘을 비난하지는 않았다.

나 또한 필요에 의해 그를 이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좋아요.”

짧은 내 대답에 굳어 있던 이티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시간을 아로새기듯 붉은 눈동자가 호를 그렸다.

“고마워, 그웨니르 영애.”

담백한 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가슴께가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가운데, 심장에 위험한 미소를 띤 이티엘이 말을 이었다.

“그럼 기회를 받은 기념으로 당장 선물을…….”

“됐어요.”

나는 칼같이 거절하며 걸음을 내디뎠다.

제 손으로 좋은 분위기를 망가뜨린 이티엘은 의문 반, 아쉬움 반이 섞인 얼굴로 나를 따랐다.

우리는 번화가 속 광장을 지나 부티크 애비뉴에 도착했다.

지난번에는 초행이라 길을 헤맸지만, 이번에는 사람들의 도움 없이도 한 번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공방은 늘어선 가게들을 한참 지나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그웨니르 영애, 그대가 찾는 공방이 정말 여기가 맞나?”

묵묵히 따라오던 이티엘이 물음을 던졌다.

화려하고 반짝이는 여느 공방과 달리, 눈앞에 있는 공방은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져 더욱 존재감이 남달랐다.

차마 집 나갈 때 거래한 곳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지라 괜히 정색하며 대꾸했다.

“폐하, 무엇이든지 겉으로 판단하면 안 되는 거예요.”

되는대로 던진 말이긴 했지만 틀린 소리는 아니어서 이티엘은 어떤 반박도 하지 못하고 함께 가게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 어머, 저번에 오셨던 분이시군요.”

카운터에 서 있던 점원은 나를 기억하고는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싹싹하고 과하지 않은 응대가 마음을 편하게 했다.

“오늘은 어떤 일로 오셨나요?”

“장신구를 보러 왔어요.”

“그중에서도 선호하시는 건 없으신가요?”

점원의 물음에 나는 조금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매일 착용할 만한 것이었으면 좋겠어요. 거기에 호신을 위한 마법 효과가 있고 가벼웠으면 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서 뚫어지라 쳐다보는 이티엘의 시선이 느껴졌다.

다른 건 몰라도 엄청 놀라고 궁금해한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네, 알겠습니다. 상품을 추려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티엘과 내 미묘한 신경전 앞에서도 점원은 프로 의식을 잃지 않았다.

기다릴 자리까지 안내해 준 그녀는 곧 카운터 안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이티엘이 내게 바싹 다가와 물었다.

“영애, 방금 그게 무슨 말이지?”

“들으신 그대로예요. 요즘 세상이 흉흉하잖아요? 만약을 대비해서 호신용 장신구 하나쯤 있으면 좋을 거 같아서 사려고요.”

제법 논리정연한 대답이라고 생각했건만, 이티엘은 조금도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신변이 걱정되는 거라면 원하는 만큼 호위를 붙여 줄 수 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폐하! 일개 영애가 어떻게 황실 기사의 호위를 받아요?”

“그게 아니야, 영애.”

“네?”

갑자기 뭐가 아닌데?

말이 끊겨 인상을 찌푸린 내게 이티엘은 한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처럼 이렇게 신경 써서 나오지 않았나. 그러니 정정해 주길 바라.”

아, 무슨 말인가 했더니 그런 거였어?

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무표정한 이티엘이었지만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는 이 순간만을 기다린 것처럼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왜 이렇게 이름에 집착해? 이름 성애자야?’

썩 내키진 않지만 어찌 됐건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순순히 그의 말을 따랐다.

“바르시.”

그 한 마디에 이티엘의 얼굴이 환하다 못해 찬연하게 빛났다.

“그래, 영애. 이제 마음껏 말하도록 해.”

순간 말문이 막혀 버릴 정도로 환상적인 미소였지만 나는 아슬아슬하게 정신줄을 붙잡았다.

지금까지 공략캐들을 상대하면서 생긴 연륜은 무시할 수 없는 듯했다.

“다시 말하지만 바르시의 기사에게 호위를 받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러면 내가 직접….”

“그건 더 말도 안 되는 거 알고 계시죠?”

세상에 어떤 황제가 일개 영애를 호위해?

물론 이 세계가 연애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했지만, 그건 그거고 나는 싫었다.

몇 번이고 단호하게 말했건만, 이티엘은 포기할 줄을 몰랐다.

“하지만 그깟 마법 도구보다 내가 그대 곁에 있는 게 훨씬 안전하다.”

나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꾹 참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 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것이 훤히 보였다.

“바르시, 자꾸 그러시면 저 돌아갈 거예요.”

다소 치사하고 유치한 말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고집스럽게 자신이 호위하겠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던 이티엘이 단번에 입을 닫았으니 말이다.

한참을 말없이 있던 그는 무언가 결심한 듯 올곧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그대가 사는 장신구를 선물하게 해 다오.”

“네…? 저 비싼 걸요?”

놀라서 무심코 본심이 튀어나와 버렸다.

이티엘은 나를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한테 금액을 운운했으니 어이없을 수밖에.

‘하, 제정신이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겐 그런 능력이 없었다.

어색함에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나는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게… 제 기준에서 비싸다는 거지, 폐하께 그렇다는 건 아니에요.”

“바르시.”

“그래요, 바르시.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렇게 비싼 건 받을 수 없다는 거였어요.”

이 세계는 마법이 있지만 누구나 사용할 수 없었고, 그로 인해 마법이 걸린 물건은 뭐든 비쌌다.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귀족도 1년에 한 번 큰맘 먹고 살 정도니 말 다 했지.

애초에 나도 갑자기 목돈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이런 고가의 물건을 살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번화가에 다녀온다는 말을 들은 아버지는 내가 느닷없이 집을 나갔던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맘껏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오라며 평소보다 다섯 배나 많은 돈을 주셨다.

역시 선물은 현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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