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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59)화 (59/122)

제59화. 10장. 우연이 계속되면 의심해라 (1)

머릿속에 번뜩인 가능성은 좀처럼 믿기 힘들었다.

제르아일의 황제.

성군이라 불리지만 동시에 폭군이라 불리는 그는 단테만큼은 아니더라도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미소 같은 경우는 철저한 연습과 계산으로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보니 그림을 그린 것처럼 완벽했지만 이질감이 느껴지곤 했다.

때문에 이티엘이 진심으로 웃을 때는 파급력이 엄청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게 되곤 했는데 바로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대체 왜 부끄러워하는 거야!’

정신을 차린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평소에 낯간지러운 말들을 서슴없이 하는 주제에 고작 이런 걸로 소녀처럼 구는 이티엘이 낯설었다.

한편으로는 그런 반응이 신선해서 가슴께가 간질거리기도 했다.

‘정신 차려, 나! 저걸 귀엽다고 생각하면 지는 거야!’

몇 번이고 자신을 질책한 후, 이티엘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어, 저기….”

“아무 말도 하지 마라, 그웨니르 영애!”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요?

멀쩡한 표정과 달리, 이티엘의 귀는 여전히 붉었고 목소리는 다급했다.

몸소 언행불일치의 표본이 된 그는 잔뜩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혼란스럽다. 그, 영애가 날 그렇게 생각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이티엘의 귀에 쏠린 피가 조금씩 사방으로 퍼지는 모양이었다.

옅은 분홍빛을 띠는 얼굴을 따라 나 또한 간질거림과 머쓱함이 배가 되었다.

‘누가 보면 서로 고백을 주고받은 줄 알겠네.’

나는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꼈다.

이런 분위기에서 누군가 들이닥친다면 오해를 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앤이었다.

“차와 디저트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놈의 타이밍!’

어떻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가 있어!

“들어오라.”

혼란스러운 마음이 뒤섞인 가운데, 이티엘이 대신 대답했다.

붉었던 귀와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색을 되찾은 채였다.

그 덕분에 나는 누군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제 막 들여온 다즐링 차와 스콘입니…. 아가씨?”

짧은 설명과 함께 테이블에 티팟과 스콘을 내려놓던 앤이 의문 섞인 목소리로 날 불렀다.

“왜 그래, 앤?”

“혹시 제가 무슨 실수라도 저질렀나요?”

“아니? 왜?”

“그게…, 제가 들어올 때부터 계속 노려보셔서요.”

돌아오는 진솔한 대답에 민망한 마음이 밀려들었다.

내 딴에는 이티엘과의 묘한 분위기를 들키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 앤에게는 불만을 시위하는 모습으로 보일 줄이야.

“미안해, 앤.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랬어. 내가 집중하면 그렇잖아.”

둘러대는 내 말에 앤은 의아한 시선을 던지면서도 이티엘의 존재를 떠올리고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녀는 내가 이 자리를 퍽이나 불편해한다고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저것 또한 오해긴 했지만 고백했다고 생각하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그럼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불러 주세요.”

완벽하게 티타임 세팅을 마친 앤은 우리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응접실을 나섰다.

‘대미사’를 말하며 꺅꺅거리는 모습이 연상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프로의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이제 어쩌지?’

오해를 사지 않은 건 다행인데, 아직 내 앞에는 이티엘이라는 관문이 남아 있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의연하던 그는 앤이 오기 전처럼 귓가를 붉혔다.

이대로라면 아까의 그 어색한 분위기가 반복될 것이 뻔했기에 서둘러 상황 정리에 나섰다.

“그…. 폐하,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어디까지나 객관적으로 말씀드린 거고, 사적인 감정은 조금도….”

“알고 있다.”

대답과 달리, 이티엘의 시선은 티팟에 고정된 채였다.

‘뭘 알고 있는데…?’

가슴 깊은 곳에 있던 불안과 걱정이 슬금슬금 기어 나와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이런 내 우려가 무색하게도 이티엘이 한 말은 예상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영애가 내게 마음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콩깍지가 단단히 씐 탓에 원활한 사고를 못 한다고 생각했더니 아닌 모양이었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이티엘은 놀란 나를 보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예상치 못했다는 표정이군.”

“그야… 그렇죠.”

내 의사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식으로 대했잖아?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는 가운데, 이티엘은 말을 이어 갔다.

“처음에는 의아했지. 지금껏 나를 거절한 여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런 시간이 계속되니 한 가지 생각이 들더군. 영애는 내 얼굴을 잘생겼다 여기지 않는구나, 하고 말이야.”

“하, 하하하….”

그저 헛웃음이 나왔다.

사고회로가 어떻게 돼먹었으면 생각이 그쪽으로 튀어 가는 거지?

얼굴과 당신 마음이 부담스러운 거랑은 별개의 문제잖아?

나는 이제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니….”

반면 이티엘은 잔뜩 무언가를 떨쳐 낸 듯한 개운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루비를 연상시키는 눈동자가 맑게 반짝거렸다.

“정말 다행이야.”

“오해가 풀리셨다니 다행이에요, 폐하. 하지만 착각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을 겨우 추스른 나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얼굴과 마음은 별개예요.”

필사적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머리가 지끈거릴 일이 벌어졌다.

―또로롱!

[이티엘의 호감도가 올라갔습니다!]

‘맙소사.’

나는 이마를 치고 싶은 충동을 꾹 억눌렀다.

공략캐 중 가장 인기가 많았던 집착캐 이티엘은 고작 잘생겼다는 말 한마디에 가슴을 뭉클해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다행이라면 철벽 반사 덕에 마법 효과가 떨어져서 그런지 호감도가 오르는 폭은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모질게 대했나?’

이쯤 되니 이 모든 문제는 사실 내게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과 함께 혼란스러웠다.

피식피식 흐뭇한 미소를 흘리던 이티엘은 활짝 핀 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도 나를 잘생겼다 해 주니 고맙네.”

아무래도 이건 신종 벌칙게임이 아닐까?

*  *  *

나는 이티엘과 번화가에 나섰다.

몽글몽글하고 핑크빛이 감돌려는 분위기를 어떻게 수습하고 빠져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머릿속에는 직설적인 이티엘의 진심을 필사적으로 모른 척하고 화제를 돌리기 바빴다는 것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영애가 용건이 있는 곳은 어디지?”

내게 물음을 던지는 이티엘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얄미운 마음이 스멀스멀 고개를 쳐들었다.

‘저렇게 감정을 잘 추스르면서 왜 지금까지는 그렇게 안 했대?’

속으로 입을 비죽였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입장일 뿐, 이티엘이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 모르는 건 아니었다.

지금껏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손에 넣었던 이티엘에게 나는 처음으로 호감을 느낀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나는 눈치를 보면서도 어떤 관심도 두지 않았으니 그로서는 초조한 마음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뭐,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심정이지만.’

그나저나 문제는 이게 아니었다.

‘갈 곳을 못 정했네.’

철벽 반사를 실험해 보겠답시고 그 자리에서 둘러댄 게 화근이었다.

그 후에라도 생각을 했으면 좋았겠지만, 레이프와의 대화가 신경 쓰여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웨니르 영애?”

의문과 재촉을 담은 이티엘의 부름에 나는 땀이 차는 손을 꽉 쥐었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쇼핑이나 하자!

“설마 아무 계획도 없었던 건….”

“부티크에 갈 거예요.”

나는 딱 잘라 대답했다.

이티엘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긍정했다가는 멋대로 상상하고 기대하며 호감도를 올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장신구를 사는 건가?”

“네, 뭐 그런 셈이죠.”

“그웨니르 영애, 그런 거라면 진작에 말하지 그랬나. 당장 가 보도록 하지.”

두 눈을 반짝이며 앞장서는 이티엘을 보며 나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내가 큰 착각을 한 모양이었다.

철벽 반사는 어디까지나 마법 효과를 반감시킬 뿐, 기존에 있던 호감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뭐, 그래도 집착하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철벽 반사가 없었으면 이티엘은 지금까지 내게 집착하며 피곤하게 굴었을지도 몰랐다.

상념에서 벗어난 나는 콩깍지가 덜한 이티엘을 향해 조심스러운 거절을 건넸다.

“폐하,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거지만 제게 뭘 사 주려 하시는 거면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왜지?”

왜냐고 묻다니, 그걸 말이라고 해?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부담스러워서요.”

그러자 이티엘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이들의 선물은 받으면서 말인가?”

“네? 제가 언제…….”

“영애가 끼고 있는 붉은 반지는 마탑주에게 받은 거지.”

나는 당황함을 넘어서 깜짝 놀랐다.

대체 어떻게 안 거지?

하지만 이티엘의 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대의 저택에서 대접받은 다즐링 차는 린든에게, 그리고 머리에 달고 있는 장식은 데스티니에게 받은 걸로 아는데, 아닌가?”

아니,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아는 건데요?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 차올랐다.

아무리 이티엘이 눈썰미가 좋다고 해도 구체적으로 준 사람까지 특정 짓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에 가까웠다.

‘설마….’

의심이 조금씩 몸을 부풀리려는 가운데, 이티엘이 단호하게 답했다.

“그웨니르 영애, 미리 말해 두지만 스토킹한 게 아냐. 그들에게 직접 들은 거지.”

그 말에 안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느 틈에 이런 이야기를 나눈 건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섣불리 묻기엔 그들에 대한 호감으로 비쳐질 수도 있어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이티엘은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더군. 다른 사람들의 호의는 받으면서 내 호의는 받으려 하지 않으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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