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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58)화 (58/122)

제58화. 9장. 그들과 나의 눈치 게임 (7)

레이프는 내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상황이 바뀌었다, 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확실히 해.”

레이프는 호박빛 눈동자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들이 잠든 밤처럼 고요한 시선이었다.

“그럼 나는?”

짧지만 강렬한 물음에 나는 눈에 힘을 주었다.

이런 말을 하지 않을까 스치듯 생각하면서도 막상 듣고 나니 당황한 나머지 그저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널 놓고 싶지 않았어.’

그런 와중에 떠오르는 것은 납치에서 풀려난 뒤, 공원에서 들은 레이프의 말이었다.

‘놓고 싶지 않기는 무슨.’

기억을 따라 그때의 날씨, 스치던 바람, 그리고 냄새가 되살아나려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미소를 지었다.

“이미 알고 있지 않아?”

나를 응시하던 호박빛 눈동자가 한층 더 깊어졌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긍정임을 알 수 있었다.

레이프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은 내가 유일하게 연애 엔딩을 보지 못한 공략캐라서였다.

어떤 일이든 정보를 가진 편이 없는 편보다는 훨씬 유리하니까.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여러 이유 중 하나일 뿐이었다.

내가 레이프를 거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진정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가 데스티니에서 완전히 해방되기 위해서는 선택받은 자의 진실한 사랑이 필요했다.

그렇다는 뜻은 아무리 레이프의 호감도가 높아도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지 않는 이상, 엔딩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침묵을 깨고 말했다.

“넌 어떨지 몰라도 난 널 진심으로 사랑할 자신이 없어.”

애초에 공략캐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기 위해 이러고 있는데 말 다 했지.

이 정도면 납득했으려니 생각하고 있는데 레이프가 예상치도 못한 말을 꺼냈다.

“그건 자신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냐.”

올곧게 바라보는 눈동자가 타오르듯 뜨거웠다.

얼굴이 뜨겁게 느껴져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럴 수 없었다.

레이프가 말을 이었다.

“모르는 순간 스며들어 있을 뿐이지.”

끝맺은 말과 함께 그가 한 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시작한 걸음은 조금씩 나와의 거리를 좁혀 팔을 뻗으면 닿을 정도가 되었다.

이상하게도 숨이 턱턱 막혀 왔다.

“널 응원하겠다는 마음은 변함없어. 하지만.”

계속 응시하고 있어서일까, 순간 앳된 소년의 모습이 자란 것처럼 보였다.

레이프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길게 늘어뜨린 내 머리카락을 잡았다.

무언가의 의식처럼 조심스레 머리에 입을 맞춘 그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날 봐 줬으면 하는 마음도 진심이야. 그것이 거짓이라도.”

*  *  *

새삼 생각하지만 내 안에는 연애세포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보통 설레는 말을 들으면 그렇게 가슴이 두근거린다던데, 나는 심장을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너무 두근거려서 그런 게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정말 말 그대로다.

그냥 맞은 것 같다.

“나쁜 새끼…….”

지저귀는 새소리가 상쾌한 아침임에도 전혀 그렇지 못한 나는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차며 몸을 일으켰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심장을 비롯한 온몸이 근육통이라도 난 것처럼 욱신거렸다.

“설마 마법이라도 쓴 건 아니겠지?”

온몸을 쭉 펴며 여기저기 스트레칭을 했다.

매일같이 이러는데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절로 이런 말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느닷없이 폭탄을 던진 레이프는 그 후로 홀연히 모습을 감췄다.

보나 마나 단테에게 갔을 것이 분명했다. 가장 만만하니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 마탑에 쫓아가서 내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멱살을 잡고 싶었지만, 괜히 추해질 것 같아 참았다.

어차피 움직이지 않아도 때가 되면 알아서 기어들어 올 테니 그때 물어봐야지.

“아, 귀찮다.”

입으로 투덜대면서도 필사적으로 잠과 이 찌뿌둥함을 떨쳐 버리려 노력했다.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며칠 누워 있었으니 하루 더 뒹굴거린다 해서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똑똑!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여명의…, 아니 황제 폐하께서 오셨어요.”

“이렇게 빨리?”

벌써 약속 시간이 되었나 싶어 시계를 보았지만 그보다도 한참 이른 시각이었다.

‘이 성격 급한 남자 같으니라고!’

나는 왈칵 미간을 찌푸렸다.

호감이고 나발이고 이렇게 사람을 불안하게 하면 마이너스라는 걸 모르나?

‘아, 그래. 모르겠지.’

곧바로 튀어나온 생각에 곧장 침착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원하는 것이라면 전부 쟁취해 온 남자가 배려를 알 리가 없지.

오히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른 시간에 온 것이 칭찬할 거리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만나면 꼭 한마디 해 줘야겠네.’

땅이 꺼지라 한숨을 뱉어 내며 문밖의 앤에게 대꾸했다.

“이제 막 일어났어. 황제 폐하께는 준비를 해야 하니 기다리라 전해 줘.”

“네? 하지만….”

어떻게 황제를 기다리게 하냐는 의미가 담긴 말 줄임에 나는 살짝 심호흡을 했다.

“앤, 몰라? 원래 먼저 좋아한 사람이 지는 법이야. 싫으면 알아서 떨어져 나가는 거고.”

살다 살다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보지 않아도 문밖에 선 앤이 얼마나 놀랐을지 눈에 선했다.

어쩐지 굉장히 나쁜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지만 모른 척했다.

그런 것까지 신경 쓰기엔 오늘의 컨디션은 좋지 않았고, 내몰리듯 나갈 준비를 하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

생각 끝에 앤이 물음을 던졌다.

“정말 그렇게 전해요?”

“응, 정말로.”

문 너머로 짙은 한숨과 동시에 멀어지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저렇게 말했지만 앤도 나 못지않은 마이웨이의 소유자였다.

분명 이티엘에게 내가 한 말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전할 것이 분명했다.

‘과연 어떤 반응이려나.’

조금 들뜬 기분으로 침대맡의 줄을 잡아당겼다.

이티엘을 맞이할 준비를 위해 부른 것을 알았는지 방에 들어온 시녀는 총 세 명이었다.

하지만 어쩌나, 지금 당장 준비할 생각은 없는데.

“아침 식사를 갖다줄래? 오늘은 상당히 배가 고파서 평소보다 좀 많이 준비해 줬으면 좋겠어.”

“네? 하지만 아가씨, 황제 폐하께서….”

“걱정할 필요 없어. 좀 늦는다고 했거든.”

태연한 내 말에 시녀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하고 싶은 말을 했다.

“그래서, 안 갖다줄 거야?”

데스티니의 마법 효과는 대단했다.

그저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을 뿐인데도 시녀들은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했으니까.

“지, 지금 갖다드리겠습니다!”

“그 외에 필요하신 건 없나요?”

“말만 하세요!”

서둘러 문밖으로 나가는 시녀와 뭐든 시켜 달라는 나머지 두 사람을 보니 속으로 찔렸다.

‘대체 이놈의 마법 효과는 언제까지 지속되는 거지?’

아무리 레이프가 힘이 많이 돌아왔다고 해도 그렇지, 데스티니를 연주하지 않은 시간이 상당히 흘렀는데도 이런 걸 보면 조금 무서울 지경이었다.

‘탈주다. 엔딩 보고 무조건 탈주야.’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다짐하며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이티엘을 만날 준비를 했다.

*  *  *

“좋은 아침이군, 그웨니르 영애.”

이티엘은 그웨니르 저택의 가장 큰 응접실에 있었다.

커다란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소파에 앉은 그는 한껏 빛나고 있었다.

밤처럼 짙은 청색 머리카락은 갠 하늘처럼 맑았고, 그 아래로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는 루비처럼 찬란했다.

번화가를 둘러보기 위해 평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간소한 복장을 했지만, 그조차도 외모에 가려져 버렸다.

그래,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었어.

“왜 그러지, 영애? 몸이 안 좋은가?”

하도 넋을 놓고 서 있으니 이티엘이 물음을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 거기 계세요!”

안 그래도 잘생긴 사람이 유독 빛나 보인다. 이럴 땐 적당한 거리가 중요했다.

얼굴에 정신 팔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는 건 곤란하니 말이다.

다행히도 이티엘은 내 말을 잘 들었다.

그는 내디뎠던 한 걸음을 다소곳이 모으고 붉은 눈을 깜박였다.

“그웨니르 영애?”

“해가 되니 거기에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해? 무엇이 말인가?”

“폐하의 미모요.”

부끄러움이 하늘을 치솟았지만 내겐 선택지가 없었다.

게임이었다면 주책맞게 호들갑을 떨며 이벤트를 즐기면 되겠지만, 현실이 되니 가까이에 다가오는 것부터가 곤혹스러웠다.

때문에, 비록 상대가 제멋대로 해석하는 일이 벌어질지라도 솔직히 말하고 양해를 구해 거리를 벌리는 편이 여러 방면으로 편했다.

“…영애는 날 잘생겼다고 생각하는가?”

어지간히 놀랐는지 이티엘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이 세계의 공략캐들은 자신의 얼굴이 가진 파급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 무심한 단테도 제 입으로 괜찮은 외모라고 말할 정도니 말 다 했지.

때문에 여느 공략캐들과 다른 이티엘의 반응은 매우 당황스러웠다.

무슨 의도인지 한참 고민하던 나는 겨우 질문에 답했다.

“당연히 잘생기셨죠. 제국에 폐하만큼 잘생긴 사람은 손에 꼽잖아요. 추종자들도 있어요.”

‘대륙 미남 사랑한다’라고. 들어 보셨나 몰라.

모처럼 솔직하게 대답해 줬건만, 이티엘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런가.”

끊어질 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 이티엘은 미간을 좁히는가 싶더니 그대로 한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폐하…?”

머릿속에 물음표가 터질 듯이 밀려들었다.

‘잘생겼다는 말에 화가 난 건가? 그것도 아니면 칭찬이 너무 밋밋해서?’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들이었지만, 이 세계는 게임이었고 눈앞에 있는 사람은 제국의 황제였다. 그러니 모든 가능성은 열어 두어야 했다.

긴장 가득한 얼굴로 이티엘의 눈치를 살피는 가운데, 문득 시야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티엘의 귀였다.

도자기처럼 하얗고 멀끔한 안색과 달리, 귀만큼은 잘 익은 문어처럼 새빨갰다.

합리적인 의심이 스쳐 갔다.

‘설마… 부끄러워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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