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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57)화 (57/122)

제57화. 9장. 그들과 나의 눈치 게임 (6)

자포자기한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올려놨던 얼마 되지 않던 핑크색 게이지는 거짓말처럼 전부 사라져 버렸다.

‘철벽 반사는…?!’

아까 그렇게 잘 작동해 놓고 이 타이밍에 꺼진 건 아니겠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이 세계에서 살면서 느낀 바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신인지 시스템인지 날 어떻게든 공략캐들과 엮으려고 안달이었으니까.

하지만 예상과 달리 시스템창에 보이는 철벽 반사는 작동 중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근데 왜 효과가 없어?!’

나는 아랫입술을 자근거렸다.

작동 중인 것이 확실하다면 이티엘이 나를 향해 저렇게까지 열을 올리지 않았을 것이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레이프가 나를 감싸듯 내 앞에 섰다.

“걱정하지 마, 세이딘. 이제 곧이니까.”

“이제 곧이라니?! 대체 저 모습 어디가?!”

“아직 사정거리가 아니어서 그래. 조금만 기다려.”

레이프의 말에 내 시선은 자연스레 시스템창으로 향했다.

철벽 반사의 설명 끝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마법 효과 거리 반경 1.5w’라고 적혀 있었다.

‘1.5w면 1.5m 정도 거리니까…. 너무 짧잖아!’

어쩐지 레이프가 쓰는 마법이 죄다 근처에서 사라진다 했다.

속은 기분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후로는 쓸데없는 곳에 H를 쏟아붓는 일이 없을 테니까.

이런 생각과 함께 나는 조마조마하며 이티엘이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제 그와는 철벽 반사의 사정거리에 가까웠다.

“지금이야.”

나직한 레이프의 신호에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부릅떴다.

부디 거지 같은 거리감인 만큼 효과가 있기를!

형형한 붉은 눈동자로 이쪽을 걸어오던 이티엘이 멈칫했다.

그 순간, 모든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어찌나 느린지 이티엘의 눈썹, 눈, 입, 얼굴에 있는 모든 근육들의 미세한 움직임이 보일 지경이었다.

붉은 눈동자가 한 차례 깜박이자, 살기등등했던 눈동자가 신기루처럼 느껴질 정도로 온순하게 변했다.

꿈에서 깨어난 듯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던 이티엘은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뭘 하려던 거지?”

뭘 하려 하긴. 상상 속 여자친구의 외도 아닌 외도를 잡으려고 했지.

이티엘은 자신의 손에 들린 검기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짓고는 곧 없앴다.

“미안하네, 그웨니르 영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긴장하던 중, 이티엘이 느닷없이 사과를 했다.

예상조차 하지 못한 상황에 필사적으로 할 말을 쥐어짜려 하는데 다음 말이 이어졌다.

“그대가 데스티니와 함께 있는 것이 싫다는 이유로 검기를 꺼내다니, 내가 잠시 어떻게 됐던 모양이야.”

잠시가 아니라 언제나 그랬습니다.

아직까지도 건재한 집착모드를 증거로 들이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으니 아쉬울 따름이었다.

‘표정을 보면 진심인 것 같은데….’

이티엘을 힐끗 쳐다본 나는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껏 당해 온 일들이 있다 보니 선뜻 그럴 수가 없었다.

‘저러다 갑자기 태도를 바꿀 수도 있는 거잖아.’

사정거리에 들어오기 전의 이티엘의 태도도 한몫하다 보니 더욱 그랬다.

그렇다고 해서 일개 영애가 황제의 사과를 받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럴 때 엑스트라의 휴일을 쓰면 딱인데.’

뒤늦은 아쉬움이 밀려왔다.

엑스트라의 휴일은 업데이트가 된 이후로 더 이상 살 수 없는 아이템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생각의 흐름에 이끌려 신을 욕하게 된 나는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황 속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날아든 레이프의 말은 가뜩이나 머릿속에 가득 찬 물음표의 수를 더욱 부풀렸다.

“이게 과연 미안하다는 말로 끝날 일일까?”

호박색 눈동자를 가늘게 뜬 레이프는 누가 봐도 악당처럼 보였다.

‘얜 또 왜 이래?’

꿍꿍이 가득한 그 모습에 나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를 보냈다.

예상치 못한 일을 벌이는 레이프였기에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할지 긴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기대됐다.

무슨 일이 됐건 이 상황보다 나은 거라면 옹호해야지, 그렇고말고.

직설적인 레이프의 말에 이티엘은 놀란 듯 살짝 눈을 크게 뜨더니 곧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원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보상하도록 하지.”

앗, 정말?

나는 귀를 쫑긋했다.

“아무거나?”

레이프는 대답할 틈도 없이 또다시 물음을 던졌다.

어쩐지 가슴이 답답했다.

왜 당사자의 의사는 물어보지 않고 대화를 진행시키는데요.

하지만 그것은 곧 아무렇지 않아졌다.

저놈들이 하루 이틀 그러는 것도 아니고.

“그래, 아무거나.”

“그렇다네, 세이딘.”

몇 번이고 확인사살을 한 레이프는 나를 향해 씨익 웃었다.

‘원하는 거라….’

갑자기 생각하려니 막상 고민이 되었다.

이티엘에게 부탁할 만한 것이라고는 당분간 나타나지 말아 달라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안 나타날 이티엘이 아니었다.

알겠다는 말이 무색하게 이틀 내로 저택을 얼쩡거릴 것이 뻔했다.

나는 여러 가지 생각 끝에 결정한 바를 입에 담았다.

“저와 번화가에 가 주세요.”

“번화가?”

“네, 살 것이 있거든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실상은 철벽 반사의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마법 영향을 심하게 받는 이티엘이 지금처럼만 얌전하다면 엔딩을 볼 캐릭터를 굳이 린든으로 한정 지을 필요는 없었다.

‘린든보다는 이티엘이 호감도가 더 높으니….’

하도 게임 시스템에 휘둘리다 보니 이제는 일단 엔딩부터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황제인 게 마음에 좀 걸리지만 어차피 내가 뒷수습을 할 것도 아닌데 뭐 어때?’

한편 이티엘은 믿을 수 없었는지 눈을 휘둥그레 뜨고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진심인가?”

매일같이 싫은 티를 팍팍 내 왔으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사실 번화가를 고른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티엘 연애 이벤트 — 번화가 탐방]

혹시 몰라 들여다본 이벤트 목록에서 지금 당장 실행 가능한 이벤트였기 때문이었다.

기왕 올려야 할 호감도라면 엔딩을 볼 확률도 같이 올리는 게 나았으니까.

이런 생각을 뒤로한 채, 나는 다소곳이 말했다.

“맘에 안 드시면 거절하셔도 상관없어요. 원하는 건 다른 걸 생각해도 되니까요.”

“아니, 아니다.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영애에게 그럴 리 없지 않나?”

“그럴 리 있어도 상관없는데….”

너무 격렬한 반응에 나도 모르게 한마디를 얹어 버렸다.

이티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제 의견을 피력했다.

“그웨니르 영애, 그대가 원한다면 부디 번화가에 함께 갈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면 해.”

먼저 가자고 한 것이 민망해질 만큼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이티엘을 보며 나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그웨니르 영애.”

무뚝뚝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놀란 나머지 가슴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티엘이 저렇게 순진무구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이티엘이 웃는 경우는 대부분 대외적인 이미지 관리나 꿍꿍이가 있을 때였다.

그 외에는 언제나 굳은 표정이거나 미간을 찌푸리거나, 혹은 질투에 타오르는 얼굴이었으니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또 뭔가 감추고 있는 건 아니겠지?’

수없이 뒤통수를 맞은 여파로 인해 또다시 의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이런 내 마음을 모르는 이티엘은 아까보다 한껏 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무척 기대되는군. 일정은 무조건 영애가 되는 시간에 맞출 테니 충분히 생각해 본 뒤에 말해 주길 바라.”

그 후로도 이티엘은 재미있을 것 같다, 좋다, 신난다 등의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은 후에야 저택을 떠났다.

혹시 사정거리를 벗어나서 다시 돌아와 딴소리를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다행히도 우려에서 그쳤다.

“그렇게 싫다더니 데이트 약속을 잡았네?”

오늘도 겨우 살았구나 하는 마음에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레이프의 비아냥거림이 들려왔다.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어쩔 수 없잖아. 누구든 일단 이어져야 자유로워지는데.”

“그렇다고 해서 제일 싫다던 놈과 만나려고?”

“린든은 안 된다며? 그러면 이티엘이랑 단테 두 사람밖에 없는데 거기서 거기잖아.”

“말이라고 해, 세이딘? 당연히 단테가 훨 낫지! 대화가 답답하기는 해도 이티엘만큼 싫어하진 않잖아.”

“그게 더 무섭지! 바꿔 말하면 단테는 대화가 답답해서 좋은 감정도 식을 정돈데.”

레이프는 황당한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나는 꿋꿋했다.

마음 같아서는 호감도에 대한 설명을 해 주고 싶었지만, 이걸 말하는 순간 이 세계가 게임이라는 사실마저도 밝힐 수밖에 없었다.

‘하, 진짜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해?’

나는 가슴까지 차오르는 답답함을 어떻게든 털어 버리려 노력했지만, 납득할 수 없다는 레이프의 단호한 시선 때문에 어려웠다.

다소 비겁하긴 해도 이럴 때는 잊고 있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다.

“그런데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아? 내가 누굴 만나든 응원한다며.”

소년 레이프의 얼굴에 당혹이 어렸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날 응원한다며 거리까지 두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건….”

“변명은 됐고. 너도 알다시피 나는 빠르게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는 이티엘이 가장 만만해서 그런 것뿐이야. 린든보다 훨씬 내게 호감을 표하기도 하고.”

실은 가장 호감도가 높은 건 레이프 너지만.

내 설득이 통했는지 그는 진지한 얼굴로 턱을 괬다.

“그건 그래. 그래서 처음에도 네게 이티엘은 어떠냐고 물어본 적이 더러 있었고. 그때마다 싫다고 했었지만 말이야.”

“상황이 바뀌었잖아. 그 정돈 감안해 줬으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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