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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56)화 (56/122)

제56화. 9장. 그들과 나의 눈치 게임 (5)

“뭐?”

이놈이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깜박거리는 시선은 의문으로 가득했다.

그 모습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거짓말을 할 리 없잖아? 정말 궁금해서 그래. 그렇게 비효율적인 행동을 하는데 어떻게 날 좋게 볼 수 있지?”

“…레이프, 지금까지 주변에서 사람들이 너한테 의견을 묻거나 그런 적 없어?”

“있지, 그렇지만 이해할 수 없었어. 굳이 묻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면 되는 거잖아?”

기본적으로 레이프의 논리는 맞았다.

어떤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가 알아서 잘하면 요구나 지시를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눈치가 빠르거나 남들과 다른 머리를 가진 사람들에게나 적용되는 이야기였다.

‘대체 얼마나 제멋대로인 인생을 살아온 거야?’

방금 전 말을 통해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레이프는 뛰어난 대마법사인 탓에 말하지 않아도 원하는 것이 이미 준비되어 있는 상황이 숨 쉬듯 자연스러웠다.

반대로 원하는 것은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쟁취해 왔겠고.

그 결과가 바로 이거다.

자기가 원하는 건 상대도 원하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것.

‘어쩐지 눈치가 있는 듯 없다 싶더라니….’

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면서도 어떻게 하면 제대로 설명이 전달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세이딘?”

조심스럽게 부르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마침 어떤 식으로 설명할지 결정했으니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샌드위치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데스티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맞혀 봐.”

“생각?”

레이프는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순순히 내 말을 따랐다.

살짝 찌푸린 미간을 보니 꽤나 고민하는 듯싶었다. 이제 더 이상 속마음을 읽을 수 없는 데다가 필사적으로 표정 관리를 하고 있는 중이니 알아채기 어려운 것은 당연했다.

“어떻게 하면 내 봉인을 풀 수 있을까 하는 생각?”

“그건 항상 하는 생각이고. 내가 바라는 건 바로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야.”

샌드위치를 떠올린 이유는 이제 좀 있으면 점심시간이고 배고팠기 때문이었다.

떠올리기에 상당히 시답잖은 거지만, 레이프가 그동안 나를 제대로 봤다면 이 정도는 충분히 맞힐 수 있을 터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레이프는 겨우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던졌다.

“배고프다?”

“그래, 맞아.”

샌드위치가 아니더라도 배고프다는 근본적인 부분을 짚어 냈으니 맞힌 건 맞힌 거였다.

레이프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긴장했던 기색을 떨쳐 냈다.

“후우, 다행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걸 왜 하는 거야, 세이딘?”

“이제 알게 될 거야. 그러니 질문에 답해 봐. 어떻게 내가 배고프다는 사실을 알았어?”

“그야 매번 이 시간쯤 되면 배고파했잖아. 설마 내가 그 정도도 모를 거라 생각한 거야?”

“경우에 따라서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레이프를 향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이 눈치가 빠를 수 없다는 것과 레이프가 지내 온 환경에서는 더욱더 사람들의 감정에 공감하기 어려울 것이라고까지 이야기를 했다.

이윽고 불편한 설명이 다 끝나자, 레이프는 턱을 괸 채 말했다.

“그러니까 요는 내가 너무 잘난 덕에 세이딘의 마음이 어떤지 이해를 못 한다는 거지?”

맞는 말이긴 한데 왜 이렇게 인정하기 싫을까?

싫은 티를 팍팍 내며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프는 턱을 괴고는 한숨을 흘렸다.

“흐음,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말이야.”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적어도 지금까지 보여 준 모습은 그렇거든?”

단번에 무라도 자를 듯한 내 기세에도 레이프는 그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나의 아가씨는 정말 큰일이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동자를 깜박이던 그는 사르르 녹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 내가 몰라서 그랬다고 생각해?”

그 말을 듣는 순간,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해졌다.

“설마… 거짓말한 거야?”

“그럴 리가,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세이딘은 어떤 관점으로 말할지 알고 싶었거든.”

새싹처럼 피어난 의심은 빙글빙글 웃고 있는 레이프를 보니 확신으로 바뀌었다.

이놈이 장난을 쳤구나!

머릿속에 번뜩인 생각과 함께 나는 근처에 있던 베개를 집어 던졌다.

“아앗, 세이딘!”

“넌 좀 맞아도 싸! 심심하면 혼자 조용히 놀 것이지 왜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시비야?”

“하지만 어쩔 수 없는걸!”

“개풀 뜯어 먹는 소리 하지 마!”

[데스티니의 호감도가 증가했습니다!]

상황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알림음과 알림이 더욱 내 머리를 돌게 만들었다.

머리 꼭대기까지 오른 화로 인해 나는 그 후로도 레이프와 한참을 실랑이를 벌였다.

그와 함께 정신없이 울리던 알림은 방금 전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건 변태 새끼가 분명해.’

그런 게 아니라면 두들겨 맞는 중에도 호감도가 오를 리가 없지.

확신과 함께 나는 심호흡을 하고 레이프를 바라보았다.

피로와 배고픔이 겹쳐 더 이상 힘쓸 체력은 없었지만 신나게 몸을 움직인 덕인지 아까보단 한결 가벼웠다.

“왜 그랬는지 한번 이야기나 들어 보자.”

베개로 신나게 두들겨 맞은 레이프가 고개를 들었다. 흐트러진 머리 사이로 보이는 호박빛 눈동자가 평소보다 더욱 뇌쇄적으로 보였다.

“세이딘과 함께 있으면 좋아.”

담담한 목소리에 잠시 가슴이 튀어 올랐지만 그뿐이었다.

레이프의 저런 화법을 하루 이틀 겪는 것도 아니니 분명 저 뒤에 뭔가 더 있겠거니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하지만 이렇게 예상을 하고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도 그다음에 날아드는 레이프의 말은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정말 살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

“허허허…!”

참으로 웃기는 놈이 아닐 수 없었다.

애써 이 세계가 반복되는 걸 레이프가 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그 부분을 꺼내 감성팔이를 하니 말이다.

그야 반복되는 세상 속에서 단 한 번도 자신의 눈에 띄지 않았던 내가 예상치 못한 행동들을 하고 다니니 신기할 법도 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런데 좀 착각하는 거 아냐?”

“무엇을?”

“난 장난감이 아니고 사람이야.”

“세이딘, 넌 세상의 어떤 존재와도 맞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야. 그런 널 내가 함부로 대할 리 없잖아.”

방금 전 아이템이 효과 좋은지 확인한답시고 사정없이 마법을 날리던 사람이 어디의 누구더라?

다소 과장된 듯한 태도가 꼴 보기 싫었던 나는 얼굴을 왈칵 구겼다.

그럼에도 레이프는 어설픈 연기를 멈출 생각이 없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말했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상처인걸? 나는 널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어.”

제발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했으면 좋겠다.

내가 변함없이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바라보자, 이 이상은 무리수라고 생각했는지 레이프도 가증스러운 연기를 거두었다.

“뭐, 솔직하게 말하면 놀리는 맛이 있긴 해. 네 반응이 좀 재미있어야 말이지.”

“그래, 솔직하게 말하니까 차라리 낫다. 기분 나쁜 건 여전하지만.”

“하지만 지금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정말 너와 있으면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들어.”

레이프의 얼굴에는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덕분에 나는 지금껏 씩씩댄 것이 무색하게 머쓱해졌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대체 레이프는 이 세계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내 의지를 거스르고 입이 먼저 움직였다.

“레이프, 넌 얼마나….”

“거기까지!”

뜬금없는 외침에 나는 깜짝 놀랐다.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니 소파에 다소곳이 누워 있던 이티엘이 서슬 퍼런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폐하?”

당황한 나는 레이프에게 힐끗 시선을 보내며 속삭였다.

“원래 이렇게 효과가 짧니?”

레이프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이상하네? 앞으로 한 시간은 더 정신을 못 차려야 정상인데.”

레이프와 내가 속삭이는 것이 아니꼬웠는지 이티엘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그냥 좀 중요한 할 말이 있어서요.”

“그렇다면 직접 말을 하면 될 것을 왜 그렇게 그윽한 시선으로 서로를 보고 있는 거지?”

아, 쳐다본 게 문제였구나. 속삭이는 건 듣지도 못했고.

참으로 놀라운 콩깍지가 아닐 수 없었다.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해서 눈을 굴리고 있는데 레이프가 느닷없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보다시피 이런 사이라서. 자꾸 쳐다보게 되네. 그렇지, 자기야?”

달처럼 예쁘게 접힌 호박색 눈동자에 경악으로 가득 찬 내가 비쳤다.

‘이 정신 나간 놈은 왜 일을 더 복잡하게 꼬는 건데?!’

끊임없이 이어지는 물음표의 향연 속에서 으드득거리는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확인하지 않아도 이티엘의 어금니가 출처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데스티니, 당장 그 손을 놓게.”

쳐다보지 않아도 옆에서 쏟아지는 시선은 살기로 가득했다.

‘그래, 제발 좀 놔!’

“싫은데.”

간절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레이프의 대꾸에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 청개구리 뺨칠 새끼야!!’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

그렇게 말한 이티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몰니르의 여파인지 몸을 휘청거리긴 했지만 잠시뿐이었다.

이티엘은 이쪽을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흘러나오더니 조금씩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임에도 나는 단번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검기…!”

나는 하얗게 질렸다.

이티엘이 이 세계 설정상 가장 강한 검사이자 소드마스터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라는 자리에 있는 만큼 그는 자신의 힘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

게임에서도 납치당한 아티야를 구하기 위해 단신으로 갈 때 외에는 검기를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티엘은 검기를 보이고 있었다.

내가 레이프와 붙어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입에서 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집착도 정도껏 해야 할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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