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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55)화 (55/122)

제55화. 9장. 그들과 나의 눈치 게임 (4)

걱정이 가득하면서도 거침없는 돌려까기에 나도 덩달아 얼굴을 구겼다.

다른 건 몰라도 미적 감각을 무시당하는 건 상당히 기분이 더러웠다.

지금은 좀 힘들어서 그렇지 내가 얼마나 예쁘고 아름다운 거에 민감한데!

“너무한 거 아냐? 그야 일반적으로 파는 반지에 비해서는 아쉬울 수 있지만 이건 평범한 반지가 아니라고.”

“이미 당근을 모티브로 한 것부터 평범하진 않아, 세이딘.”

틀린 말이 아니라 할 말이 없네. 한편 레이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철벽 반사를 바라보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할 걸 그랬나?’

샅샅이 살피는 시선에 나는 뒤늦은 후회를 하기 시작했다.

레이프도 내가 지금 상황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 마법 효과가 완화되는 반지를 샀다고 해서 딱히 의심하진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구동 주문을 말하기 싫은데 어떡하냐고!’

구구절절 이어지던 후회는 가장 근본적이고 솔직한 이유로 인해 마음속에서 사라졌다.

그래, 이미 엎질러진 거 후회는 하지 말자.

나는 몇 번이고 스스로를 도닥여 주었다.

한편 철벽 반사를 훑어본 레이프는 놀란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설마 이거 마법 도구였어?”

“응, 일정 기간 동안 주위에 있는 마법 효과를 어느 정도 차단해 주는 거래.”

“어쩐지 디자인이 별로더라니.”

왜지? 납득을 하는데도 전혀 기쁘지 않아.

레이프는 앓던 이를 뺀 것처럼 시원한 표정을 짓더니 이제는 탐구심 가득한 눈으로 철벽 반사를 이리저리 살펴봤다.

“세이딘, 혹시 그거 잠깐 봐도 돼?”

“안 돼, 지금 빼면 효력이 사라진단 말이야.”

“그거 참 조잡하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기왕 만드는 아이템 좀 더 예쁘고 실용성 있게 만들면 안 되나?

나는 시스템을 구축한 신을 향해 속으로 한껏 불만을 중얼거렸다.

“그럼 내구도가 어떤지 살펴보는 정도는 어때?”

고민 끝에 내놓은 레이프의 제안에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아이템창에서 보이는 설명만으로는 이 아이템의 효과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나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그럼 일단 가벼운 것부터 해 볼게.”

레이프의 말과 함께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나는 순간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 줄 몰라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깜박였다.

“흠, 꽤 견고하네?”

하지만 이어지는 중얼거림에 멀리 떠나간 정신이 곧바로 제자리를 찾았다.

깊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이, 이 미친놈아!”

혼신을 다한 외침에 레이프의 호박색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끔뻑이는 눈동자가 상황 파악을 조금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눈이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친절한 나는 화난 이유를 콕 짚어 설명했다.

“사람한테 무턱대고 마법을 쓰는 경우가 어딨어?!”

“겨우 초급 마법 수준의 바람이었는걸?”

“자칫하면 귀가 날아갈 뻔했는데 초급?! 장난해?!”

“진정해, 세이딘. 안 날아갔잖아? 만약에라도 그런 일이 벌어지면 내가 치료했겠지만.”

“안 날아가면 그만이고 치료해 주면 그만인 문제가 아니잖아? 사람이 위험할 뻔했는데 그런 소리가 나와?”

찰나에 일어난 일인데도 떠올리기만 하면 심장이 철렁할 정도인 걸 레이프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니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지금도 그랬다.

그는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이제는 고개까지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 반지 덕에 무사하잖아. 그런데 왜 화를 내는 거야?”

오늘도 어김없이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레이프의 말이 맞았다. 맞는데 화가 난다.

“실험을 할 거였으면 적어도 어떤 식으로 할 거라는 것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잖아! 그런데 마음의 준비도 할 틈 없이 그런 식으로 마법을 쏴대면 누가 잘했다고 해?”

의문 섞인 호박색 눈동자에 그제야 납득의 기색이 스쳤다.

“알았어, 세이딘. 앞으로는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제대로 말해 줄게.”

“그래, 제발 그래 줘.”

그래도 납득을 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진짜 날 생각하는 건가?’

문득 레이프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내가 싫어하는 일은 일절 하고 싶지 않다고 했을 때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순순한 태도를 보니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심 반 신선함 반의 마음으로 고개를 들자, 시선을 마주친 레이프가 사랑스럽게 눈가를 접었다.

“그래서 세이딘, 지금부터 마법을 하나 더 사용해 볼게.”

“뭐? 으아악!”

쏜살같이 날아오는 불마법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철벽 반사의 효과인지 아기 머리만 한 불덩어리는 내 어깨쯤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어 갔다.

아무래도 이 미친놈은 그냥 자신이 허락을 구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네?

무언가 툭 끊기는 기분과 함께 나는 독기를 가득 품었다.

그러자 돌아오는 건 아까보다 한층 더 짙은 레이프의 미소였다.

“이번에 날아가는 건 물마법이야.”

“아니, 이건 통보…, 꺅!”

피하려고 반사적으로 움직인 몸과 달리, 철벽 반사는 제 할 일을 확실하게 했다.

이마에서 흐트러지는 물 덩어리를 보며 나는 허허허 웃었다.

소리가 범상치 않았던 것으로 보아 직접적으로 맞았으면 머리쯤은 가볍게 사라지고도 남았겠네.

‘에휴, 미친놈에게 무언가를 바란 내가 잘못이지.’

나는 스스로를 향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인제 와서 이렇게 생각한들 상대에게 큰 변화를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 후로도 레이프는 추가적으로 몇 가지 마법을 더 구사한 뒤, 상쾌한 얼굴로 손을 털었다.

“겉보기완 다르게 상당히 튼튼한 마법 도구네. 솔직히 놀랐어. 내가 봉인된 후로 이 정도로 마법을 구사하는 사람은 단테를 제외하곤 없다고 생각했거든.”

“어, 그래.”

레이프가 늘어놓는 자화자찬이자 사실은 좀처럼 내 귀에 닿지 않았다.

여러 번에 걸친 마법 세례 덕에 긴장이 풀려 그저 쉬고 싶을 뿐이었다.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레이프를 지나친 나는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제야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레이프가 의문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세이딘, 피곤해?”

“그걸 이제야 묻니?”

톡 쏘는 내 대꾸에 공기 섞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 하지만 네가 사용하는 거라면 제대로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

피로감이 장난 아니게 몰려오긴 해도 레이프 덕에 철벽 반사가 어느 정도까지 효과가 있는지는 확실히 알았다.

하지만 그거랑 지친 건 별개의 문제였다.

나는 정색하며 레이프를 바라보았다.

“미안하면 다야?”

“으음…. 진심으로 미안해?”

“그건 아니지. 성의가 없잖아.”

“성의?”

“그래, 하루 종일 멋대로 구는 네 덕에 이 상태가 됐는데 고작 미안하다는 말로 끝낼 셈이야?”

솔직히 큰 기대를 하고 꺼낸 말은 아니었다.

입으로만 진심이라고 하는 레이프에게 조금이라도 바싹 긴장감을 줄 수 있을 정도면 성공했다고 생각했으니까.

“성의를 보여라….”

내 말을 곱씹은 레이프는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거라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

왜 나는 불안한 거지?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레이프의 발소리가 들렸다.

힐끗 고개를 돌리자 침대 근처에 선 레이프가 몸을 굽혀 나와 시선을 맞췄다.

오른손을 가슴에 올린 그는 정중하게 몸을 숙였다.

“힘들게 해서 미안해, 세이딘. 부디 용서해 줬으면 해.”

그렇게 말한 레이프는 조심스레 내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췄다.

심장이 머리를 뚫고 나올 것 같았다.

“뭐, 뭐 하는 거야!?”

레이프는 화들짝 놀라 손을 빼려는 나를 제지했다.

“이거론 부족해?”

“부족하다니, 그런 문제가…. 윽!”

손바닥 안에 닿는 열기에 나는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이게 뭐라고 볼에 기습적으로 키스를 당했을 때보다 정신이 혼미한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조금 성의가 있어 보여?”

오롯이 나만을 담은 호박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나는 뒤죽박죽 엉켜 가는 머리를 최대한 정리하며 비아냥거렸다.

“성의 두 번만 있다간 큰일 나겠다.”

“하하! 만족스러웠다니 다행이네.”

너무 기가 차다 보니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설원처럼 차가웠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미안.”

곧바로 사과할 거면서 왜 이러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손을 뺀 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경고를 던졌다.

“또 이런 짓을 하면 다시는 널 안 볼 거야.”

이렇게 말했지만 실제로는 이런 일이 또 있으면 철저하게 레이프를 무시하겠다는 의미였다.

사실 레이프의 봉인을 풀지 않는 이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고, 설령 봉인을 풀더라도 마법을 사용해서 주변을 맴돌면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런 말을 꺼낸 것은 요 며칠 레이프가 보인 행동 때문이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달리하고 나를 배려한다면 조심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하루라도 빨리 엔딩을 보는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하지만 다행히도 레이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의지를 보여 주기 위함인지 그는 양손을 어깨 위로 들고 뒤로 물러났다.

“정말 미안해. 몇 번이고 다짐했는데도 막상 이렇게 앞에 두면 몸이 먼저 움직여서 큰일이야.”

그 말에 심장이 덜컹거렸다.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말했으면 ‘레이프가 또 레이프 했네.’ 정도로 넘겼겠지만 지금 레이프의 대답은 더없이 진지했다.

‘하, 왜 난 레이프를 공략 못 해서 이 고생을….’

공략이라도 했으면 하다못해 훅 치고 들어오는 말들에 조금이라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한들 이미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바싹 정신 차리고 대응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그건 짐승이고.”

나는 심호흡하고 말을 이어 나갔다.

“정말 나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행동하기 전에 물어봐. 그러면 좋고 싫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으니까 실수도 덜할 거 아냐.”

그 뒤로 이어지는 대꾸에 나는 잠시 사고가 멈췄다.

“왜 그런 게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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