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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54)화 (54/122)

제54화. 9장. 그들과 나의 눈치 게임 (3)

“칭찬 아니거든?”

신경질적인 내 말에 레이프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피식 웃을 뿐이었다. 얄미워라.

“그나저나 아까 이티엘의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던데 왜 그런 거야?”

집착모드라는 게 발동이 되어서 이 모양이 되었단다.

가슴속에 꽉 찬 답답함 때문이었는지 나는 시스템을 쏙 빼고 있던 사실들을 쏟아 냈다.

“나도 몰라. 린든이랑 친구 먹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와서는 린든을 남편으로 원하냐는 둥 하길래 헛소리 좀 하지 말라고 했더니, 자기를 걱정해 주는 거냐면서 린든보다 자신을 좋아하는 거 아니냐고 그러더라고.”

“흐응…. 그랬구나.”

어째 레이프의 태도가 이상했다.

백 프로 공감을 해 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티엘의 집착에 대해 뭐라고 할 줄 알았는데.

“뭔데? 불만이 있으면 확실히 말해.”

“린든이랑 친구가 되기로 했다고?”

“….”

이티엘도 그렇고, 이놈들은 왜 이렇게 친구에 민감한지 모르겠다.

반응을 보니 대충 비슷한 생각과 짐작을 하는 것 같아서 귀찮아도 한마디를 덧붙였다.

“오해하지 마. 정말 친구니까. 절친도 아니고 남자친구도 아니고 그냥 지인보다 조금 더 친한 수준의 관계야.”

“그래도 친구잖아? 많은 변수를 가질 수 있는 관계지.”

“너도 이티엘이랑 같이 이상한 조언이나 이야기들을 듣고 다니니?”

나는 기가 차서 대꾸했다.

이성 친구가 주위에 있을 때 눈 돌아가는 건 대부분 연인일 경우였다.

그렇지만 나는 저놈들과 연인이 아니었다.

백번 양보해서 썸을 타는 사이라고 쳐도 내가 누구와 만날지는 오롯이 내 의지와 결정이지 그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잘 들어, 레이프. 몇 번이고 꾸준히 말했지만 나는 연애에 관심 없어. 그보다 내 인생을 알차고 부지런하게 보내는 게 훨씬 중요해. 그런데 내가 린든과 친구 이상의 관계가 될 거라고 생각해?”

물론 공략캐 중의 한 명과 엔딩을 봐야 한다고 한다면 린든이 제일 낫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에게 애정을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레이프는 내 말에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네 생각을 존중하지 않는 건 아냐. 하지만 너도 ‘이 안에’ 있는 이상, 다른 사람들의 구애를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어. 그러니 사람을 잘 골라야….”

‘이 안’이라는 단어가 이 세계임을 알아차린 나는 얼굴을 굳혔다.

“그러면 나더러 어떡하라는 거야?”

“세이딘.”

“친구로 지낸다는 것에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뭐라고 하면서 구애를 무시할 수 없다고 하잖아. 그렇게 말할 정도로 자신 있으면 어디 한번 좋은 방법을 제시해 봐. 한번 해 보게.”

“….”

레이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적어도 모순적인 말을 했다는 자각은 있는 모양이었다.

그를 똑바로 쳐다본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잘 들어, 레이프. 네가 바이올린에서 벗어나고 싶듯이 나도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는 내키지 않아도 필요한 일이라면 열심히 할 생각이야. 그런데 이게 그렇게 잘못된 거야?”

그 와중에도 레이프는 단호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린든은 안 돼.”

“그럼 한번 물어보자. 대체 린든은 왜 안 된다는 건데?”

소년에서 청년으로 향하는 레이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잔뜩 어려 있었다.

한참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는 짙은 한숨을 터뜨렸다.

“그는 위선적이고 널 사랑하지 않아.”

‘친구부터 시작하는 척을 시도합니다.’

순간 머릿속으로 업데이트된 린든의 설명이 지나갔다.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상단을 운영하는 그의 배경을 생각하면 충분히 계산적으로 굴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선적이라고 하는 건 좀 너무하잖아?’

어찌 됐건 린든이 공략캐 중에서는 치유캐고 가장 정중해서 그런지 레이프의 말이 마냥 좋게 들리지 않았다.

‘하여간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자기 좋을 대로만 받아들이려고 한다니까!’

나는 팔짱을 끼며 물었다.

“증거 있어?”

“뭐?”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정도면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 정도는 있어야 할 거 아냐.”

내 말에 레이프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자기가 생각해도 마땅한 이야기가 없겠지.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무언가 한참을 생각하던 레이프는 고심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떤 증거를 원해?”

“응…?”

“직접 현장에서 보여 줄 수도 있고 그게 싫으면 상황을 재현해서 보여 줄 수도 있어. 선택은 네 자유야.”

레이프는 자신이 보여 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기가 막히도록 술술 설명했다.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 덕에 나는 말문이 막힌 채로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보면 기회긴 해.’

린든에 대해 적혀 있던 부분을 확실하게 알게 될 테니까.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난 직접 현장에서 보는 걸로 할래.”

설핏 레이프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좋은 생각이야. 보면 분명 생각이 달라질 거야.”

“글쎄, 그건 이후에 생각할 문제고.”

지금은 이티엘이 가장 큰 문제였다.

“깨어나는 건 확실하지?”

“당연하지, 아무리 마법에 내성이 없는 사람이라도 오늘 중으로는 무조건 깨어날 거야. 며칠은 후유증에 시달릴 가능성은 높지만.”

“부디 이걸로 문제 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

“으음, 한번 노력해 볼게.”

참 불안한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기절한 이티엘을 한 번 더 본 뒤, 철벽 반사를 낀 오른손을 다른 손으로 감싸 쥐었다.

실험 대상이 기절한 것은 아쉬웠지만 그렇다 해서 하염없이 이티엘이 일어나기를 기다릴 수 없었기에 일단 이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우선 그… ‘철벽’이나 ‘반사’ 중 하나를 말하는 거였지?’

다시 한번 시스템창을 확인한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건 그냥 아이템을 착용하면 작동하게 해 주면 안 되나? 대체 이 시스템은 어디까지 흑역사를 만들어 줄 셈이지?’

샘물처럼 솟아나는 아쉬움을 몇 번이고 도닥인 나는 기회를 엿보기 위해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단테랑 대화는 잘 했어?”

내 물음에 레이프는 놀란 듯하더니 방긋 웃었다.

“응. 뭐, 나쁘지 않았어.”

그린 듯이 완벽한 것 같으면서도 왜 어색하다고 느껴질까?

나는 의문을 뒤로하고 질문을 던졌다.

“대체 무슨 대화를 하는데 지금까지 안 들어왔던 거야?”

“안 왔다기보다는 못 왔다고 해야겠지. 네가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까?”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레이프의 말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렇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직접적으로 말을 들으니 머릿속이 이리저리 뒤엉켰다.

‘진정하자.’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마냥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레이프 덕에 모처럼 대꾸하는 척하며 철벽 반사를 작동시킬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으니까.

모름지기 찾아온 기회는 곧바로 잡아야 미덕이었다.

나는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하여간 철벽이야. 괜히 그렇게 말 돌리면서 단테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슬그머니 넘길 생각인 거지?”

“철벽? 갑자기 벽은 왜 말하는 거야?”

“아….”

잊고 있었다.

레이프가 워낙 잘 알아듣기로서니 내가 있던 세계의 말을 알아들을 리가.

뒤늦은 깨달음으로 인해 밀려오는 민망함에 나는 필사적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그냥 비유가 그렇다는 거야. 한번 정한 게 있으면 사람들 말 듣지 않는 그런 사람들 있잖아.”

“처음 듣는 말인데.”

“당연하지. 최근에 생긴 유행어인걸.”

문제는 나만 안다는 거였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함을 드러내던 레이프는 곧 피식 웃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네 눈에 그렇게 보였다니 좀 슬프네. 나는 널 배려하려고 그렇게 말한 것뿐인데.”

조금도 슬프지 않은 표정으로 말해 봤자 설득력이 없다는 건 알까?

나는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그런 말을 할 땐 적어도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는 게 어떨까? 뭐, 나한테 피해 주는 게 아니라면 비밀로 하든 말든 상관은 없지만.”

“더 안 물어보려고?”

“그럼 묻길 바라?”

나는 황당함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단테랑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알리고 싶지 않아서 그 부분만 제외하고 말한 걸 뻔히 아는데 더 안 물어볼 거냐고 물어보는 건 대체 무슨 심보지?

그러나 황당한 시선 앞에서도 레이프는 무척이나 떳떳하게 선을 그었다.

“그건 아니지.”

“…생각은 하면서 대답하는 거야?”

“물론이지. 모순적일지 몰라도 이게 지금 나의 솔직한 심정이야. 네가 관심을 가져 줬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도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어. 이 얼마나 잔인한 현실인지!”

레이프는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말과 행동을 서슴없이 했다.

나는 빠르게 외면했다. 어차피 지금 대화에서 내가 필요했던 건 철벽 반사를 발동시키기 위한 절차였을 뿐이었다.

‘아, 다행이다. 작동됐네.’

힐끗 반지 낀 손을 본 나는 안도의 한숨을 터뜨렸다. 겉으로는 어떤 반응도 없었지만, 반지 위에 떠오른 시스템창에는 ‘작동 중’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나저나 못 보던 반지네? 어디서 난 거야?”

예전처럼 지척에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레이프의 물음은 여전히 기습적이어서 가슴이 철렁거렸다.

나는 깜짝 놀란 티를 내지 않고 말했다.

“몰니르랑 같이 산 거야. 예쁘기도 하고 필요하기도 했고.”

“…예쁘다고? 이게?”

되돌아온 물음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랬다.

철벽 반사는 엑스트라의 휴일만큼이나 효과가 괜찮은 아이템인 반면, 디자인은 심각한 센스를 보여 주었다.

잠깐이었지만 내 나름대로 이해를 해 보려고 노력도 했다.

하지만 하고많은 모양들 중에서 하필이면 왜 당근 모양을 펜던트로 만들었는지부터 의문이 드는 순간, 모든 이해와 다짐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이런 마음을 전부 꾸역꾸역 밀어 넣고 필사적으로 진심임을 어필하고 있노라니 레이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좁아진 미간만큼이나 진심인 눈동자로 내게 말했다.

“세이딘, 나와 예술가 거리에 가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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