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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52)화 (52/122)

제52화. 9장. 그들과 나의 눈치 게임 (1)

눈곱만큼도 양심이 찔리지 않는 가운데, 다행히도 린든은 내 말을 믿는 듯했다.

그 증거로 그가 생각에 잠긴 시간과 비례하게 집착모드의 게이지가 착실하게 쌓였다.

마침내 게이지 전체가 핑크색으로 물들었을 때, 린든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린든 브누아의 ‘집착모드’가 해제되었습니다.]

[린든 브누아의 호감도가 증가했습니다!]

‘해냈다!!’

호감도가 오른 건 썩 기뻐할 수 없었지만 집착모드를 없앤 것은 큰 수확이었다.

알림을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중, 린든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웨니르 영애. 영애 덕분에 줄곧 초조하고 답답했던 속이 단숨에 개었습니다.”

그건 네가 집착모드에서 벗어나서 그런 것 같아요.

“제가 한 게 뭐 있다고요. 전 그냥 제 기분을 이야기한 것뿐인걸요.”

“덕분에 깨달았습니다. 그간 영애를 너무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것을요.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없는데 제가 초조하다는 이유로 원하는 대로 하려 했어요.”

‘어째 게임 장르가 바뀐 것 같다?’

하지만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떨까.

일단 누군가와 엔딩을 봐야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상황은 바뀌지 않는걸.

속으로 씁쓸해하고 있을 때, 린든이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그럼 앞으로는 편지를 보내겠습니다.”

“네? 편지요?”

느닷없이 편지는 왜?

놀라는 내게 린든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지인에서 친구로 가기 위해서는 원래 편지가 필수입니다만….”

아카데미를 다니는 것이 아닌 이상, 사교계나 큰 행사에서 만난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를 해 나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난 3년간 이 세계에 적응하느라 바빴던 내겐 적용되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새삼 그런 것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나는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아, 알았어요. 대신 큰 기대는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 편지를 쓰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요.”

“괜찮습니다, 영애께서 써 주시는 거라면 뭐든 감사히 받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면 진짜 딱 한 줄만 써서 보낸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은 신뢰 가득한 린든의 눈빛에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럼 곧 편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린든은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도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어지간히도 좋아서 그러겠거니 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수십 번이나 같은 말을 복사해서 붙여넣기를 하고 있으니 답답함을 넘어 짜증이 제 존재를 드러내려 했다.

하지만 린든은 기민하게 내 상태를 파악하고는 정중한 인사만을 남기고 떠났다.

“…눈치 엄청 빠르네.”

정말 아무나 사업하는 게 아니라니까?

나는 상태창을 확인하며 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곳곳에 숨은 사용인들의 시선을 느꼈지만 나는 전부 무시했다.

괜히 눈이 마주치면 그대로 붙들려 린든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물어볼 것이 뻔했으니까.

사실 말하기 싫은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그렇게 쳐다보면 무섭다고!’

이게 가장 큰 이유였다.

사용인들은 내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하다 못해 취조를 할 것 같은 기세였다.

“하, 무서워라….”

겨우 방에 도착해 문을 걸어 잠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집요하게 쳐다보던지 계단을 오르는 내내 살얼음판이 따로 없었다.

“앞으로 며칠은 죽은 듯이 있어야겠네. 공략캐를 저택에 부르지 말고.”

내가 이런다고 해서 안 올 놈들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 그러기로 했다.

“그나저나 영향력이 오래가네?”

저택의 사용인들은 대부분 오랫동안 일해 온 사람들이어서 부모님만큼이나 나를 예뻐했다. 데스티니를 연주하면서 더욱 심해졌고.

집에서만큼은 최대한 데스티니와 멀리하려 했지만, 부모님이 몇 번이고 연주를 부탁해서 어쩔 수 없이 잡았었다.

하지만 최근 2주 정도는 집에서 데스티니를 연주한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사용인들은 여전히 마법에 걸린 상태였다.

“레이프가 힘을 되찾은 것과 연관이 있는 건가?”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제일 타당하겠지.

게다가 주기적으로 유지해야 하는 단테의 마법도 이미 효력을 다했을 테니 말 다했다.

“허허허허….”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계속될 거라고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는 아까 확인하다 만 시스템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린든에게 무슨 변화가 있을지 보기 위해서였는데, 기왕 보는 거 상점에 들어가서 마법의 영향을 완화시키는 아이템이 있는지도 확인할 생각이었다.

“어?”

린든의 호감도를 살핀 나는 당황했다.

틈틈이 띠링거리며 소폭으로 오른 호감도도 호감도였지만, 그보다도 신경 쓰이는 것은 달라진 린든의 상태였다.

[친구부터 시작하는 척을 시도합니다.]

“하는 척이라니….”

황당한 마음이 절로 소리가 되어 흘러나왔다.

린든이 내 제의를 온전히 받아들인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게 개심한 듯한 태도를 보이는 걸 보면 조금이라도 내가 한 말들을 생각해 보고 염두에 뒀겠거니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그야 호감이 있는 사람을 하루아침에 지인에서 친구로 대하는 게 쉽지 않은 건 알았지만….”

말을 잇지 못한 나는 실없는 웃음만 흘렸다.

기가 막히는 건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사업가인 린든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다니.

“다 됐고, 내숭이라도 잘 유지해 줬으면 좋겠다.”

나는 간절한 마음과 함께 호감도 메뉴를 나갔다.

그다음으로 상점에 들어간 나는 새로운 아이템이 무엇이 있는지 확인했다.

H가 넉넉하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최대한 확인해야 했다.

그러다 문득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반지 형태를 한 거창한 이름의 아이템이었다.

[철벽 반사]

주위에 마법의 장벽을 두른다. 크고 작은 마법 효과들을 반감시키는 효과가 있다.

▷발동 조건: ‘철벽’ 혹은 ‘반사’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발동 기간: 2일.

“생각보다 쓸 만한데?”

이틀밖에 사용하지 못한다는 건 유감스러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사람들이 광공처럼 날 뚫어지라 보거나 집착하는 일은 지금보다 덜하겠지.

구미가 당기는 효과를 보니 수십 개씩 쟁여 두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현재의 자금 사정으로는 한 개를 사는 것이 고작이었다.

고작 10H를 남긴 채 구매에 성공한 나는 철벽 반사를 곧장 손가락에 끼웠다.

이후에 공략캐 중 누군가가 오면 실험 삼아 한번 사용해 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날, 실험을 할 준비가 이루어졌다.

이후로 공략캐 중, 저택에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면 이티엘이 제일 먼저 찾아오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나였다.

“잘 지냈나, 그웨니르 영애?”

담담한 말투, 그리고 그와 상반되게 빤히 쳐다보는 붉은 눈동자 앞에서 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우리 사이에 그렇게 딱딱하게 인사할 필요 없어. 그러니 편히 대하게.”

며칠 전, 그 난리가 머릿속에서 지워졌는지 이티엘은 이전과 변함없이 단단히 콩깍지가 씐 채로 나를 대했다.

“제국의 빛께 일개 백작 영애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부디 이해해 주세요.”

나는 이티엘을 향해 최대한 다소곳하게 답하면서 머리로는 어떤 타이밍에 철벽 반사를 사용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신중해야 해. 갑자기 태도를 바꿀 수도 있으니까.’

철벽 반사의 효과로 데스티니의 마법이 중화되면 나에 대해 이것저것 지적할 가능성이 있으니 최대한 그런 상황은 피해야 했다.

한편 이런 내 생각을 모르는 이티엘은 선을 긋는 나를 굉장히 슬픈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 영애는 시간이 필요하다 했었지. 잊고 있었어.”

거짓말도 풍년이다. 치매도 아니면서 며칠 전에 한 말을 잊었대?

입안에서 둥둥 떠다니는 말들을 뒤로하고 나는 용건을 물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나요?”

“린든과 만났다는 소리를 들었다. 사실인가?”

방금 전까지 그렇게 아련한 눈빛을 할 때는 언제고, 이티엘의 얼굴은 질투로 활활 타올랐다.

‘얘도 집착모드였지?’

참 산 넘어 산이 아닐 수 없었다.

힐끗 시선을 들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티엘의 머리 위에는 집착모드 게이지가 보란 듯이 있었다.

린든과 다른 점이 있다면 게이지에서 핑크색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허허, 그것참. 집착으로 똘똘 뭉쳤네.’

아마 린든과 내가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저렇게 바닥을 치지 않았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뒤로하고, 나는 이티엘에게 입을 열었다.

“네, 맞아요. 제가 브누아 영식에게 보자고 했어요.”

“어째서지?”

이티엘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린든을 부른 이유에 대해서라면 몇 가지고 말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걸 전부 나열한들 이티엘은 납득하지 못할 것이었기에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를 골랐다.

“브누아 영식이 가장 상냥하거든요.”

이티엘은 어지간히도 충격이었는지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상냥? 린든이?”

“네, 매우 상냥하죠. 친절하고 배려심 넘치고 이야기도 잘 들어 주고요.”

내가 한 마디를 말할 때마다 이티엘은 목이라도 졸린 것처럼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반면 나는 속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해졌다.

철벽 반사를 사용할 걸 생각해 깍듯하게 대해야 한다던 생각은 대신, 조금 더 놀리고 싶은 충동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앞으로 한번 잘 지내볼까 해요.”

실제로는 친구가 되어 보자 정도의 이야기였지만.

“친구가 되기로 했다는 건 린든에게 들었다.”

내 예상과 달리, 이티엘은 그다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단지 한없이 깊은 눈동자로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왜 저렇게 차분해?’

방금까지 그렇게 충격받아 놓고는 대체 왜?

영문을 알 수 없어 끊임없이 가설을 세워 가고 있을 때, 이티엘이 나직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웨니르 영애.”

“네, 네!?”

화들짝 놀라는 내게 이티엘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대는 린든이 남편이길 바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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