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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51)화 (51/122)

제51화. 8장. 일단 엔딩만 보자 (4)

【세이딘?】

“아, 미안해요! 잠깐 다른 생각을 해 버렸어요. 하여튼 애플벌룬 말고도 디저트 가게는 많으니까 미안하면 그걸로 대신하기예요. 알았죠?”

결국 아티야는 마지못해 알았다고 했다.

그 후로도 우리는 조금 더 대화를 나누다가 손님이 찾아오는 바람에 통화를 마쳤다.

그 손님은 당연하게도 린든이었다.

“저를 찾으셨다고요, 그웨니르 영애?”

내 방에 들어온 린든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단정했던 머리는 이리저리 헝클어져 있었고,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어야 할 옷은 여기저기 구겨져 있었다.

누가 봐도 날아왔습니다, 라고 증명하는 모습에 괜스레 내가 민망해졌다.

“저…, 그렇게 급히 오지 않으셔도 괜찮은데.”

“제가 괜찮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영애께서 저번처럼 없어지실 수도 있고요.”

대체 이 사람은 날 어떻게 보길래 고작 시간 좀 늦은 걸로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할까?

‘그래도 공략캐들 중에서는 제일 멀쩡하다고 생각했는데….’

스멀스멀 올라오는 아쉬움과 함께 고개를 든 나는 얼굴을 굳혔다.

린든의 머리 위에 빨간 글씨로 무언가 적혀 있었다.

[린든 브누아: 집착모드]

너무 정신이 없어 잊고 있었다.

엑스트라의 휴일을 쓰기 전, 시스템이 알려 줬던 사실을.

당시에도 워낙 경황이 없어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는데 설마 아직도 저 상태일 줄이야.

나는 놀라는 한편, 의문이 들었다.

‘집착모드인 것치고는 굉장히 순한데?’

자고로 집착은 상대가 무엇을 하든 하나하나 알길 바라고, 싫다고 해도 끈덕지게 들러붙어 질척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린든은 눈썹이 휘날리게 나를 보러 온 것 외엔 어떤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때도 그다지 강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일주일도 안 된 일인데도 너무 많은 일이 있던 탓에 기억이 가물거렸다.

결국 더는 기억 더듬는 것을 포기하고 린든의 말에 대답했다.

“걱정 말아요. 그런 걸로 안 없어져요.”

“정말이십니까?”

화색이 도는 린든에게 나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한 그가 환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

“네?”

나는 무심코 속마음을 던졌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님을 증명하듯, 린든은 유려한 미소를 띤 채로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영애가 도망가지 않을 거란 증거 말입니다.”

‘아, 망했다.’

청록빛의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나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안에는 강한 소유욕이 들끓고 있었다.

‘나는 무슨 생각으로 린든이 만만하다 생각했을까?’

상식인이고 선을 잘 그어도 머리가 돌면 다 그놈이 그놈인 것을.

나는 스스로를 향해 마른 웃음을 터뜨리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게임에 없던 집착모드였기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지만, 단 한 가지만큼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여기서 잘못 대답하면 호감도가 깎이는 걸로 끝나지 않을 거야.’

최악의 경우, 페널티는 각오해야 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 머리는 이럴 때 빛을 발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증거라면 이미 있잖아요.”

미소 지은 린든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무슨 말씀이시죠?”

“브누아 영식이 이 자리에 있는 것 말이에요.”

위험하게 빛났던 눈동자에 서서히 놀라움이 어렸다.

항상 껌딱지처럼 붙어 있던 레이프가 지금 이 자리에 없다. 하물며 다른 공략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제야 자신만 초대받았다는 것을 안 린든은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저를… 불러 주셨군요.”

그나마 당신이 제일 말이 통할 것 같았거든. 이제는 그마저도 알 수 없게 되어 버렸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 없던 나는 그저 웃으며 말했다.

“명색이 후원자이신걸요. 제일 먼저 만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아아….”

린든은 탄성을 흘렸다.

“그렇다면 절 이 자리에 부르신 건 어디까지나 후원자로서라는 말씀이시군요.”

왜 또 눈이 그렇게 매서워지는 건데?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네? 왜 갑자기 말이 그렇게….”

“게다가 ‘제일 먼저’ 저를 만난다고 하셨죠. 그렇다는 건 이후에 다른 분들도 만나실 거란 말씀 아닙니까?”

내가 한 말을 콕 짚어 말하는 린든을 보며 나는 당황한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아니, 이걸 또 받아치네?’

꽤 괜찮은 대답이라고 생각했던 나로서는 기가 막힌 일이었다.

‘이 정도로는 집착모드가 사라지지 않는 건가?’

내 생각을 증명하듯 린든의 머리 위에 집착모드 표시 외에도 게이지가 하나 생겨났다.

3분의 1 정도를 채운 분홍색을 보니, 아무래도 저 게이지를 다 채워야 린든이 집착모드에서 벗어나는 모양이었다.

‘세상에, 저만큼이나 채워야 한다니….’

가슴속에 답답함이 물밀듯이 차올랐다.

요는 내가 린든을 얼마나 잘 어르고 달래느냐에 달렸다는 소리였다.

허탈한 마음으로 게이지를 보던 나는 마음을 추슬렀다.

‘할 수 있어!’

그리고 스스로에게 세뇌라도 하듯 격려를 쏟아부었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가라앉는 마음을 좀처럼 붙잡을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속으로 힘껏 심호흡을 한 나는 똑바로 린든을 바라봤다.

먹힐지 안 먹힐지 모르지만 부딪치기로 한 이상, 뭐든 해 보는 수밖에.

“뭔가 오해하시는 것 아닌가요, 브누아 영식?”

“무슨….”

“말씀대로 영식과 저의 관계는 후원자와 지원자예요. 그 외에 달리 정의를 내리자면 친구일지도 모르는 정도의 사이죠.”

평소엔 절대로 하지 않는 말이었기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공략캐 중 린든이 가장 말이 통하는 상대라고 하지만 그는 집착이라는 불치병에 걸려 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강하게 말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호감도 때문이었다.

호감도가 낮으면 모를까 어느 정도 쌓여 있는 상황이니 적당히 벽을 치면 알아서 물러서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다행히도 린든에게는 이 방법이 먹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내 말에 제법 충격을 받은 듯 한참을 눈을 깜박이지 않은 채였다.

“그…렇군요, 그웨니르 영애의 말이 맞아요.”

한참이 지나 입을 연 린든의 목소리는 혼란이 가득했다.

그는 목이 조인 듯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실례를 범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두 번은 없었으면 해요.”

겉으로는 의연하게 대꾸했지만 내 속은 환희와 안도로 가득했다.

‘와, 진심으로 다행이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그렇다면 한 가지 제안해도 되겠습니까?”

하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질문에 슬금슬금 멀어지던 긴장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또다시 쫄깃하게 뛰는 심장을 외면하며 나는 물음을 던졌다.

“뭔가요?”

“어쭙잖은 행동으로 영애의 마음을 살 수 없다는 건 잘 알았습니다. 그러니 먼저 서로를 알아가는 것부터 시작하면 어떻습니까?”

나는 속으로 허허 웃었다.

듣기에 그럴싸하게 들렸지만, 서로를 알아가자는 건 결국 진지한 관계를 염두에 두고 만나자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한편으로는 나를 바보로 생각하는 건가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과한 생각이었다.

린든 브누아는 귀족이면서 동시에 상단주였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합의가 가능한 선을 생각해 제안해 온 사람에게 이런 행동은 당연하디당연한 일이었다.

“내키지 않네요.”

짧은 내 대답에 린든은 찰나 동안 얼굴을 굳혔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브누아 영식의 사업적인 능력은 인정하는 바예요. 몇 차례 만나면서 보여 주신 모습도 정중하고 인상적이었죠. 하지만 그것만 보고 미래까지 염두에 두며 만나는 건 부담스러워요.”

린든의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그는 내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자신이 한 말을 짚어 낼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듯싶었다.

물론 귀족사회의 생태계를 생각하면 남녀 간의 관계에 관한 일일수록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 맞지만, 생사가 달려 있는 마당에 그런 걸 따질 여유는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이미 익히 아실 거예요. 저는 누굴 만날 생각이 없어요.”

“그럼….”

“친구가 되어 보는 것부터 해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여주인공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을 했을 때야 얼마든지 내 주장을 피로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어떤 놈이든 하나를 골라 엔딩을 봐야 한다면, 무작정 구애를 피하기보다 어느 정도 받아들여 밀당을 하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웠다.

“진심…이십니까?”

한편 린든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뭐, 놀라는 것도 이해는 한다.

이티엘이 보낸 각종 구애의 증표들을 눈 하나 깜박 안 하고 태워 버리는 나를 봤던 그였으니까.

게다가 서로를 알아가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말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협상을 위해 던진 서두였을 뿐, 실제로 그가 예상했던 것은 이보다도 변변찮았을 것이 분명했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공격적으로 제안하셔 놓고 놀라시니 당황스럽네요.”

“그…, 이성에는 관심이 없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왜…?”

어지간히 놀랐는지 린든은 되레 내게 물음을 던지기까지 했다.

‘대체 평소에 날 어떻게 생각했길래 저런 반응인 거야?’

나는 속으로 허허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다고 해서 친구가 되지 말란 법은 없잖아요? 생각해 봐요, 영식이라면 잘 모르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구애를 받고 청혼받으면 기쁜 것보다 당황스러움이 앞서지 않겠어요?”

“그…렇죠.”

비슷한 경험이 있는지 린든은 살짝 질린 표정이었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는 사실에 기가 차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은 안타까웠다. 이 세계에서 이런 걸 알려 줄 사람은 없으니까.

“그래서 한발 뒤로 물러나 보기로 한 거예요. 무작정 거부하다가 좋은 사람을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나는 네놈들 중 하나와 엔딩을 보고 원래 예정대로 욜로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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